![]() 색깔 없는 눈처럼, 오늘도 무미건조한 일상이 무난하게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얼어붙은 손에 입김을 불다가 우연히 마주한 광경은, 내게 주변을 둘러싼 설산과도 비교할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낡은 산장의 지붕 위에는 아직도 눈이 가득 쌓여 있다. 오래 전에 버려져 난간이 다 부서질 지경이다. 그래도 전망이 끝내줘서 이따금씩 지나가는 이들이 들렀다 가곤 한다. 그곳에 이즈나가 있었다. 다소곳이 앉아 그림을 그리는 모습. 옆에는 붓을 넣고 다니는 통과 여전히 김이 올라오는 차가 놓여 있었다. "누군가는 설산이 아니라 널 그려야 할 것 같은데." 내 인기척을 느끼면 그림을 숨기고 보여주려 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등 뒤로 몰래 다가가 말을 건넸다. 녀석을 놀래킨 건 나였지만, 그림이 생각보다 훨씬 그럴싸했기 때문에 둘 다 눈이 커다래졌다. "… 앗……." 아차 했을 때는 물론 늦은 뒤였다. 행여 종이 구겨질세라, 조심스레 옆으로 가서 앉았다. 나 같은 것보다 훨씬 잘 그리는데 무얼 부끄러워한담. 능청스럽게 웃어 보이니 녀석도 포기한 듯, 다시 붓을 고쳐잡고 그림에 몰두했다. "잘 그리네. 깜짝 놀랐어." "나보다 놀라지는 않았을걸." 이런 게 팔불출의 기분이구나. 다음에 마다라한테 자랑할 생각하니 벌써부터 어깨가 으쓱해진다. 아니, 그 놈도 이미 짜증나는 브라콤이었지. 어쩌면 한술 더 떠 이즈나가 갓난아기 때 한 낙서까지 가져와서 보여주려 할지도 모른다. 마다라라면 한 점쯤은 간직하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기사, 동생이 좀 귀여워야 말이지. 지금이라면 나도 얼마든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헤헤헤. "뭘 그리 히죽거려?" "내 약혼자가 예뻐서." 이즈나는 쑥스러워하면서도 뾰루퉁해졌다. 어쩌면 속으로 구시렁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손은 이전과 다름없이 너무나도 태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 시선은 신기한 듯 붓끝을 따라다녔다. "나는 예쁘지 않아." "어째서?" "어째서냐니, 나는 남자애인걸. 너랑 달리 진짜 남자애란 말이야. 뭐라 말해도 여차할 때는 내가 널 지켜줄 거야. 예쁘다는 말을 들어도 소용없다구. 내 기분을 띄워 주고 싶을 때는 다른 말을 해 줘." "그야, 만약 지금 여기 우리 앞에 무서운 적이 나타난다면 네가 나를 지켜줄 거라 믿어. 하지만 나는 위험한 상황과 기꺼이 맞서싸우는 사람에게만 '남자답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 내 맘 알지?" "알아. 그런데 나는… 뭐라고 해야 할까, 너한테 그런 말을 들을 때 내 안의 무언가로부터 나약함을 느껴. 나라는 인간의, 한 사람의 '몫'을 잃어버린 것 같아. 네 뒤에 숨는 게 창피한 게 아니라, 그런 행동에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 네가 얼마나 강하든지 나 대신 싸우는 건 보고 싶지 않단 말이야." "흐음… 그래, 네 마음도 알겠어. 근데 난 진심이야. 계절에 따라 산이 예쁘게도 보이고 멋있게도 보이는 것처럼 가끔은 정말 네가 예뻐 보여. 그건 이상한 게 아니잖아. 톡 까 놓고 말해 선머슴같은 나보다…" "몇 번이고 말했지만, 너도 귀여운 여자애야. 다른 애들이 뭐라고 말하든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제발,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는 나를 감싸려고 하지 말아 줘. 뭣하면 약혼자로서 부탁할게." 약속해 봤자 몸이 말을 안 들을 게 뻔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전장에서는 남자로 있어도 좋다'고, 분명히 말했으니까. 이즈나가 약한 녀석도 아니고, 산짐승 정도는 맡겨 두어도 되겠지. 후우─.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내쉬고 나니 마음이 더할나위없이 편안했다. 이렇게 쭈욱 이즈나의 곁에 있다 보면 게을러지게 될까.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언제나 혼자서 싸웠으니까. 앞으로는, 내 약혼자가 날 지켜주겠다고 한다.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게 조금은 분하기도 하지만… 어쩐지 묘한 기분이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따뜻한 것이 가슴 안에 퍼져나가는 것 같다. 헤헤헤. "아까부터 계속 히죽거리네. 그 웃음으로 나한테 '난 강하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고 말하려는 거야? 그거라면 충분히 알고 있어. 솔직히 너랑 단련한 뒤에는 손목 뼈가 시큰거리니까." "그 양반 참, 웃겨서 웃는 거랑 좋아서 웃는 것도 구별 못하나? 내 얼굴이나 똑바로 보고 말하셔. 자, 봐. 내가 지금 너를 무시하거나 조롱하고 있는 것 같아? 아니면,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흐뭇해하는 것 같아?" "음… 흐뭇한 게 맞는 거 같아. 아마도." "그렇지? 나도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 좀 얼떨떨해." 내 편이 아무도 없을 때, 주변을 두리번거릴 틈이 어딨어. 맞기 전에 일단 싸우고 봐야지. 그렇지만 나도 처음부터 아무렇지 않게 남자애들이랑 치고 박고 싸웠던 건 아니야.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가끔… 아주 가끔은 걔네 뒤에 숨어 있는 여자애들이 부러웠어. 그러니까, 싸울 수 있다는 용기를 얻기 전에 말이야. 나, 잠깐이라도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지금이라면… 글쎄. 헤헤헤. 또 웃어 버렸네. "어라?"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이즈나가 문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그림에 대해 잊을 만큼, 내게 집중하고 있었다. 설산의 풍경처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무언가에 이끌리는 듯한, 그런 시선이었다. "왜, 왜…?" "내 기분 탓인지도 모르지만, 방금 네 웃는 얼굴이 평소랑은 달라 보였어. 그, 그게… 좀 더, 이렇게, 평범하게 귀여워 보였달까. 음… 나도 참,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추운 곳에 너무 오래 있었나 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가야겠다." 이즈나가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나도 그를 돕다가 일어났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길이 나눠지기 전까지는 함께하기로 했다. 어쩐지 녀석의 뺨이 붉어 보인다고 생각했을 때 즈음에는 내 얼굴도… 부끄럽지만, 약간 뜨거워져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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