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를 겸비한 사람이 된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구나. 그것을 지금 어느 때보다 실감하고 있다.

 이제는 사교적인 부분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무엇이든 혼자 해결했던 예전과는 다르니까.

 약혼자가 생기고, 동료들이 생기고, 무어라 형용하긴 어렵지만 마다라도 생겼다. (…)

 그렇게 하나씩 늘어 가고 있다. 더 이상 자신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

 "미즈호는 항상 이해가 빠르구나."

 "가 뭐든 잘 가르쳐주기 때문이야."

 학당에서 나를 상급생으로 착각했던 여자아이. 미즈호라고 한다. 그날 이후 모르는 게 있을 때마다 쪼르르 달려온다. 춤추는 것처럼 보이는 검푸른색 양갈래 머리를 펄럭이며.

 "하지만 자꾸 한 사람에게서 배우다 보면 식견을 넓히기 어려워져. 다음에는 이즈나에게 부탁하는 게 어때? (소곤)잘생긴데다 귀엽지 않아? 후후."

 이미 약혼했다는 게 함정이지만. 나는 이즈나가 본인의 강점을 십분 활용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개인이 지닌 매력은 더할나위 없이 편리한 도구이자 강력한 무기다. 그런 것을 쓰지 않고 썩혀 두는 건… 글쎄, 어떤 의미에서는 낭비라고 생각한다.

 "으응… 내 친구들도 다 이즈나를 좋아해…"

 캬아-. 훌륭하구만. 존경받아 마땅하다.

 "미즈호는 어떤데?"

 "나…? 나는… 이제… 네가 더… 아, 아무것도 아니야! 가 그렇게 하는 편이 좋다고 말한다면… 뭐든지… 뭐든 열심히 할게…….(발그레)"

 "……."

 언제쯤 말해야 할지 좀처럼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다. 좋아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나는 남자애가 아니라고. 내가 쳐다보는 것만으로 부끄러워해도 이런 나로서는 어찌 할 도리가 없다고.

 참 희한하다. 그래서 싫냐고 묻는다면 딱히. 어떨 때는 내가 더 혼란스럽다. 너무 오랫동안 남자애로 지내 왔던 탓인가. 이즈나와 만나기 전이었다면… 어쩌면… 응, 어차피 혼인할 마음도 없었으니까. 데리고 살아도 좋았을 거야.

 "오늘 밥 먹고 왔어?"

 "아, 그게… 으, 으응…"

 머리카락을 살짝 만졌을 뿐인데 사과처럼 빨개졌다. 내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걸까. 도무지 모르겠다. 나는 하루종일 책만 읽고, 시력도 나쁘고, 가끔 코도 파는… 굳이 말하자면 이즈나 같은 애와 딴판 아닌가.

 뭐, 이렇게 보면 확실히 여자애는 남자애와 다르다. 나도 가끔은 '귀엽구나' 하고 생각한다. 듣자하니, 미즈호는 요리도 청소도 잘하는 모양이다. 근데… 여자끼리 밤일 같은 건 어떻게 하지?

 거기에 대한 책도 있으려나. 흠. 호기심이 생겨서 본의 아니게 딴생각을 하다가 미즈호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아니, 나는, 그런 게 아니라… 하하하. 이런 궁색한 미소에도 수줍어하는 걸 보니 괜히 죄스럽다.

 드르륵-. 미닫이 문이 열리며 이제는 어느정도 낯익은 사내놈들이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원래 방과후면 이즈나 패거리가 이 교실을 점거하곤 했는데, 이상한 방향으로 입소문을 타서 아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정신없긴 하지만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여기가 그 잘난 선생이 있는 곳이냐?"

 "아니, 잘못 찾아왔어. 넌 뭐야?"

 "하야토! 저번에 나랑 대련했잖아. 내가 첫번째라 제일 먼저 나가떨어지긴 했지만… 흠흠. 리더라면 이름 정도는 제대로 외워 두라고. 듣자하니 네가 애들 공부를 그렇게 잘 봐준다며?"

 "도대체 어디까지 소문이 퍼진 거야. 미즈호, 혹시 네가 범인이니?"

 "에, 엣… 아니야… 나는 가능하면 널 독차지하고 싶었… 꺄아아! 미안해애애애애!"

 다다다. 도망쳐 버렸다. '?'라는 표정을 하고 있던 하야토가 미씸쩍은 눈빛으로 나를 노려본다. 이쯤에서 걸고 넘어질 법도 한데. 내가 여자애한테 사랑받는 건 전혀 위화감이 없나 보다.

 "순진한 애 울리지 마라."

 "내 잘못이냐. 나도 당혹스럽거든."

 "쟤 내가 오랫동안 좋아했던 애라고, 짜식아."

 "그러게 나를 반만이라도 닮지 그랬냐, 짜식아."

 농담이 아니다. 어째서 나까지 얼굴이 뜨거워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어쭙잖은 보호본능인가. 지켜주고 싶다든지… 바보 같다. 그런데 표정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 아무리 봐도 귀엽다. 혼란의 대잔치다.

 "미즈호가 얼마나 요리를 잘 하는지 모르지?"

 "먹어 봤어?"

 "한 번뿐이지만. 어릴 때부터 이웃이었어."

 "부럽다. 나도 먹고 싶어."

 "넌 이즈나한테 해달라고 하던가. 풉."

 "에이씨… 징그러운 사내놈의 요리는 저리 치워!"

 이즈나에 대해 잘 몰랐던 때의 나라면 서툰 요리를 내온다 해도 맛있게 먹었다. 지금이라면, 하하하. 가증스럽도다. 이 놈도 저 놈들처럼 징그러워 보이기 시작한 지 오래다. 요리 따위로는 어림도 없지. 내 환심을 사려거든 하다못해 발가락 정도는 핥아야 된다 이 말이야.

 "아무튼, 도와줘 리더! 다음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못 받았다간 호적에서 파일 위기거든. 보다시피 이즈나는 여자애들한테 둘러싸였잖아. 분위기 칙칙해질까 나 같은 놈은 끼지도 못하겠어."

 "그 기분 알지. 근데 나도 마다라한테 배우는 입장이야. 다른 애들 가르쳐 주느라 정작 내 공부는 못하고 있어. 마다라는 바빠서 자주 나오지도 않더라. 젠장, 원래 이게 다 놈의 일인데."

 "저기, 리더? 차기 당주를 대놓고 놈이라 부르는 사람은 너뿐이야. 충견이 되고 싶어하는 녀석은 주인에게 바칠 먹이부터 찾고 보지. 사람도 그 중 하나고. 가족이라고 예외가 있을 것 같아?"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보다 더 듣기 좋구만."

 "하?"

 "이미 상위권에 있으면서 명문가에 태어난 죄로 공부에 목을 매야 하는 운명이로군. 힘을 합쳐 짊어지고 갈 사람을 찾고 있나? 미안하지만 넌 내가 점찍었어. 과연 내 오른팔답게 충언을 아끼지 않는구나."

 "무얼 멋대로 정하고 있어! 내 첫사랑을 훔쳐간 도둑놈 자식이! 젠장, 미즈호한테 내 얘기 좀 잘 해주라…"

 하야토는 아이들의 눈치를 보며 속닥인 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뒤로 물러났다.

 "그래서, 너는 어디까지 알게 됐어? 이즈나의 첫키스를 가져간 여자가 누군지는 알아?"

 재밌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라는 느낌으로 녀석이 능청을 떨어대기에 기꺼이 어울려 줬다.

 "글쎄, 네가 아니라는 사실조차 몰랐는걸."

 "내가 아니라는 건 생각할 것도 없잖앗!!!╬"

 "그러니까, 짐작도 안 가. 덕분에 어떤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어."

 "응?"

 "강한 여자를 동경한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귀여운 여자애를 더 좋아하는 것 같거든."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는 '강한 여자인 너를 귀여운 여자로 만들고 싶어하는 취향'이겠네. 개인적으로 나는 현재의 리더가 더 좋으니까 너무 쉽게 넘어가지는 마라."

 이런 츤데레 같으니. 에이, 기분이다. 와타루에게 주려고 예약해 둔 내 사랑을 너에게 나눠 주마. 쪼오옥. 이번에도 얼굴을 끌어당겨 뽀뽀해 버렸다. 녀석이 으잇 하면서 소매로 입을 닦는다. 그런데─.

 "안녕."

 잠깐 방심해서, 이즈나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쩌면 화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나나 하야토나 딱히 당황해서 안절부절하지는 않았다. 방금 전의 그건 친구끼리의 짓궂은 장난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선택범위가 넓은 덕택인가? 약혼자를 잘 골랐네, 이즈나."

 "놀랐어? 내 약혼자가 이 정도야. 보기만 해도 굉장하지? 후후."

 아니, 기다려 봐. 굳이 따지자면 내가 잘못한 게 맞긴 한데. 장난이든 뭐든 기분 나쁘니까 하지 말라고 한마디만 하면 납득할 텐데. 아무리 내 성격을 잘 알고 있기로써니… 최소한 웃을 이유가 없는 상황이었던 건 분명하지 않나?

 이제는 내가 이해불가다. 이렇게까지 눈치를 봐야 한다면 차라리 인기 없는 쪽을 택하겠다. 어디 배알 뒤틀려서 살겠나. 물론 이즈나 정도면 착한 척, 얌전한 척하면서 제 뜻대로 흘러가는 상황을 보고 속으로 비웃을 여유 정도는 있겠지만.

 '내가 이런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는데.'

 그래도 약혼자라고, 알 것 같기도 하다.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훈련된 탓이겠지. 타지마 님께서 마다라의 부족한 부분들을 동생인 이즈나에게 대신하도록 강요하셨음은 안 봐도 뻔하다.

 마다라 자식은 장남으로 태어난 주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니까. 사회성 떨어지는 것까지 나랑 똑 닮아서 차마 변호도 못하겠다. 모두가 형을 좋아하도록 애쓰는 동안 동생의 속은 썩어 문드러져 가는데… 그래도 브라콤마냥 끔찍하게 아끼는 걸 보면 양심은 있나 보다.

 " 너도 형처럼 마음이 맞는 사람과는 금방 친해지는구나. 일단 가까워지면 누구보다 믿음직한 두 사람이라는 걸 일족 사람들에게 알려야 해. 그렇지? 내가 좀 더 힘내지 않으면."

 연극에 지친 녀석이 저도 모르게 연기를 부추기고, 그러다 또 연기를 강요받고, 결국에는 신물이 나버리는 전개의 반복이겠구먼.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하다. 하루 중에도 몇 번씩 그런 일이…

 "나, 긴장하고 있어."

 이즈나의 속삭임을 듣고 번뜩 깨어났다. 예상 못했기 때문에 심쿵했다. 뭐, 이렇게라도 표현해 준다면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긴장해야 될 사람은 나야. 쪽수만 봐도 내 패배잖아."

 "그럴까나. 적어도 나는 그런… 치사한 짓 안 하는데."

 "(끄응)…아무튼, 이즈나 너는 다시 여자애들한테 가 봐. 나도 하야토를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이따 잠깐 밖에서 보자.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 공부에 대한 거랑, 집안일에 대한 거랑, 뭐 여러 가지."

 "여러 가지. 알겠어."

 긴 말 필요없다. 내가 뭘 원하는지 알아채는 건 이즈나에게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누가 뭐래도 내 약혼자. 그것과는 상관없이, 눈치 빠른 하야토가 별꼴이라는 듯 손사래치며 제자리를 찾아갔다.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이즈나의 뺨에 가볍게 입맞췄다. 쪽-. 두 사람에게만 들리도록.

 "미안해, 안 그럴게."

 "일부러인가 생각했잖아."

 괜히 민망해져서 어색한 손길로나마 애정을 표현했다. 흠흠. 헛기침하면서 지나가다 얼핏 이즈나의 눈매가 얄쌍해지는 걸 봤지만 돌아섰을 때는 다시 기분 좋은 듯 웃고 있기에 그냥 그러느니 했다. 뭐, 너답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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