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년 전, 센쥬에서의 마지막 시간. 그날의 밤은 평소와 다르게 이상하리 만큼 고요하고 쓸쓸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집 마당과 지붕 위에도 소복이 눈이 쌓이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딸인 내게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바로 전날까지는 어머니께마저도 숨기고 계셨던 모양이다.
'아빠, 저 모든 걸 알게 됐어요. 그림에 담긴 의미 말이에요. 모조리 불태워서 없앴지만 제 머릿속에서는 도저히 지울 수가 없어요. 거기에 그려져 있던 것들… 평범한 풍경 같지만 암호였죠? 전부 아빠가 예전부터 들려 줬던 동화에 나오는 것들이잖아요. 일부러 나한테 가르친 거죠?' '가슴이 무너질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네 엄마와 얼싸안고서 울고 싶구나. 옹알이를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컸다니… 정말 솔직히 말하면 말이다, 아빠는 네가 태어나지 않길 바랐어. 넌 축복임과 동시에 재앙이었지. 이제 아빠는 둘 중 하나를 버릴 수밖에 없단다. 아내와 딸… 둘 다 가질 수는 없거든. 물론 난 내 자식을 구할 거야. 왜냐면… 왜냐면…' '처음부터 다 가짜였어요? 센쥬에 투항한 것도, 부츠마 님께 충성한 것도,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도… 거짓말… 아니죠…? 다른 건 몰라도 엄마만은… 아니었죠…? 난 아빠가 배신자든 뭐든 상관없어요. 그냥… 내가 아는 아빠가 맞다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엄… 엄마 버리지 마요… 난 안 갈래요… 못 가요…' '사랑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어. 아빠는 네 엄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지만, 그래도… 계속 사랑할 거야. 너를 지키는 것으로. 아마도 그녀의… 아니, 분명히 내게 하고 싶은 마지막 부탁이겠지. 아직은 슬퍼할 때가 아니란다. 네가 눈물을 보이면 그때야말로 정말 우리 가족은 이별하는 거야. 다시 만날 때까지 엄마는 괜찮으실 테니까… 아빠랑 같이 가자꾸나.' '싫어요…! 엄마만 두고는 안 가요…! 엄마한테는 이제 아빠랑 나밖에 없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다 엄마를 욕할 거예요…! 바보같이 속았다고…! 버림받았다고 비웃을 거예요…! 어쩌면 전쟁의 구실로 삼으려고 이용할지도 몰라요…! 또 다른 인간하고 억지로 결혼시킬지도 몰라요…! 안 돼요…! 흑흑…' '…….' '엄마아… 안 돼…….' '미안하다… 너한테도… 아빠가 정말… 미안해…….' 서로에 대한 두 분의 진심만은 지금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왜냐면 아버지의 괴로움을 내 눈으로 지켜봤으니까. 당시에 아버지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비밀로 했던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였고 나 역시 그래야만 했다고 생각한다. 단지 잔인한 운명이 마지막 순간 우리 가족에게 찬란한 빛 대신 이별의 그림자를 드리웠을 뿐이다. 그때부터 내 삶은 눈처럼 새하얘져 갔다. 아무런 색도, 향기도 없는, 무색무취의 생활이 계속되었다. 어쩌면 나 자신이 그것을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의 하얀 악몽처럼, 일부러 백지로 남겨 놓은 것이다. 행여라도 얼룩이 지면 참아 왔던 슬픔이 밀려올 것 같아 두려웠다. 슬픔에 면역력이 생길 때까지, 냉정해질 때까지, 스스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께서 들려 주시던 동화를 정말이지 좋아했다. 그것이 이별을 의미하는 줄은 몰랐다. 마냥 좋아서 웃고, 그러다 잠들고, 엄마에게 아빠의 흉내를 내면서 얘기해 주기도 했다. 내가 떠난 뒤 홀로 남겨진 엄마는 그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얼마나 쓴 눈물을 삼켰을까. 나는 동화를, 엄마는 그림을, 각자의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엄마도 벽에 걸린 그림들을 보면서 우치하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아빠와의 행복을 꿈꿨겠지. 그때, 토비라마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엄마와 마지막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을 것이다. 언제나 냉정했던 토비라마에게는 거의 유일하게 이성에 반하는 행동을 했던 순간이었다. 부츠마 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결국 마지막에는 나와의 우정을 택했다. 지금에 이르러 센쥬에는 미련이 없지만 나 역시 토비라마와의 추억만은 버리지 못했다. 부츠마는 어머니를 사가에 감금한 뒤 처음에는 부하들을 시켜 아버지와 나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곧 무의미하다는 걸 알았고, 아마도 책임은 어머니께 고스란히 돌아갔을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그림의 의미, 우치하의 암호를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부츠마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어머니 또한 부츠마에게는 세작을 감시하는 장기말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배신자가 되었고 그 또한 나를 위해서였다. 내가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행복하셨을 텐데.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엄마를 의심했다. 그녀가 모든 일의 원흉인 것처럼 말했다. '엄마도 결국 부츠마 님 지시를 받고 있었던 거지…? 그래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다 얘기했어…? 그 동화는 아빠랑, 엄마랑, 나만 알고 있는… 우리 가족만의 비밀이었던 거 아니야…? 나한테는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라 했잖아… 난 약속 지켰는데… 엄마는 왜 안 지켰어…? '센쥬'라는 성이 그렇게 중요해…? 아빠보다, 나보다 더 사랑해…? 아니, 아직 사랑하긴 해…?' '우리 … 내 아기… 엄마를 미워해도 괜찮아. 엄마는 네가 무사하다면 혼자가 되어도 상관없어. 어떤 말도 지금 너에게 위로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하나만은 믿어 줘… 엄마랑 아빠는 정말 서로 사랑해서 널 낳은 거야… 그 이후로 한 번도, 단 한 번도 서로를 의심해 본 적 없어. 언젠가 배신한다는 생각 같은 거, 그런 건… 딱 하나, 오직 너만 생각하면서 여기까지 왔어.' '토비라마한테 들었어… 엄마도 아빠처럼 처음부터 세작으로 쓰이기 위해 길러졌다고… 자신의 생각 따윈, 감정 따윈, 전부 지워질 때까지 매일, 매일, 지독하게 훈련받았다고… 이제 더 이상 엄마의 감정은 없는 거 아냐…? 훈련받은 대로 연기하고 있는 거 아냐…? 슬픈 척, 행복한 척, 사랑하는 척…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왔던 거면… 나는… 난… 너무… 무서워… 엄마가 무서워…' '맞아…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어… 그때였다면, 명령이었다면, 내 딸까지 배신했을 거야. 하지만 네 아빠를 만나고 나서 깨달았단다. 내 가족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는 걸. 너랑 네 아빠가 없었으면 엄마는 진작에 숨이 막혀서 죽었을 거야. 아무리 내 형제가 널 잊으라고 해도, 버리라고 해도, 이제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못할 거야. 네가 내 삶의 이유니까.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엄마는… 떨어져 있어도 계속 두 사람만 생각하면서 살 거야. 약속해.' '엄마는 센쥬니까… 이제부터 아빠랑 나는 엄마한테 적이 되는 거네…? 미워하지 않으면, 싸우지 않으면, 일족의 배신자가 되어 버리는 거네…? 어떡해… 나는 어린애라 아무것도 못하는데… 어른 될 때까지 못 올 텐데… 그때까지 울 엄마 어떻게 견뎌… 어떻게 사냐고… 흑흑… 흑…' '우리 딸이 슬픔에 빠지지 않고 건강하게만 자라 준다면 엄마도 용기낼 수 있어. 걱정 마, 배신자라 불릴지언정 부츠마도 혈육인 나를 어찌 하지 못할 테니까. , 엄마는 혼자 남겨지는 게 아냐. 매일 밤 꿈에서 아빠와 를 만날 거야. 슬픔, 괴로움, 그리움도 없어.' '조금만 기다려… 내가 금방 데리러올게…….' '우리 아기 울지 마… 엄마 괜찮아… 괜찮아…….' 약속했는데. 그로부터 2년이나 지났는데. 나는 아직도 애다. 아무것도 못하는 어린애. 그렇다고 엄마가 바랐던 것처럼 올바르게 성장하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잘 모르겠다. 약혼까지 한 주제 여전히 선머슴이라, 사람들에게는 고집불통에 매력까지 없는 최악의 여자아이로 비칠 뿐이다. 겨울은 길다. 온 세상을 뒤덮고도 아직 멀었다. 하얀 들판에 누워 사색에 잠겨 있었다. 엄마도 지금 나랑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까. 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 나도 참고 있는데 우리 엄마가 그럴 리 없다. 나 같은 것보다 훨씬 강하고, 필요할 때는 얼마든지 냉정해질 수 있는, 내 우상이니까. 그녀는 언제나 태양처럼, 달처럼, 내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어야 한다. 언제쯤이면 나도 엄마처럼 강해질 수 있을까. 어쨌든 마당에서 목검만 휘둘러대는 것은 슬슬 그만둘 때가 됐다. 처음부터 슬픔을 잊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이제는 다시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 토비라마가 곁에 있어 준다면, 그때처럼 같이 책을 읽고 얘기할 수 있다면 외롭지 않을 텐데. 다음 목표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는 나로 하여금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끼게 하는, 이를테면 영감을 주는 존재였다. 때로는 내 뒤를 무섭게 쫓아오는 그에게 따라잡히고 싶지 않아서, 지고 싶지 않아서 더 죽어라 공부에 매달렸다. 그래도 힘들지 않았다. 언제나 돌아보면 거기에─ "토비라마……." 무심코 이름을 중얼거렸다가 밀려드는 그리움에 곧바로 후회했다. 슬프다기 보다는 진저리가 난다. 이제는 나를 약하게 만드는 존재일 뿐이고,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그래도 안 되는 걸까. 잊는 것은 무리일까. 아니, 잊어선 안 된다. 전쟁이 계속되는 이상 언젠가는 부딪치게 될 테니까. 필요하다면 미워하고, 싸워야 할 테니까. "참 잘생겼었지……." "센쥬 부츠마의 아들이? 정말?" "그렇다니까. 형제가 아주 물건…이, 아니라! 발소리 죽이고 몰래 다가와서는 무얼 자연스레 대화를 시작하는 거야! 이즈나 너 제법이다? 기척 숨기기가 보통이 아닌데? 혹시 내가 바람피는지 감시하려고 일부러 단련했어?" "아주 의미가 없지는 않았네. 남자 이름을 중얼거리다 딱 걸렸잖아.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절대 바람은 금물'. 다른 남자를 좋아하면 안 되고, 생각하는 것도 안 된다고. 게다가 형제라니, 는 그런 취향이구나~ 얼굴이 닮은 남자들을 양팔에 끼고 사는 상상을 하고 있구나~ 꿈도 야무지다. 쯧쯔쯔." "아, 아니거든! 과거에 한 번쯤은 꿈꿨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너를… 저기… 많이 좋아해. 바람 같은 거 생각 안 한다니까. 진짜루. 센쥬, 거, 그 놈들, 다 거기서 거기야. 지들이 잘생겨 봤자지. 어디 우치하랑 게임이 되겠어? 다 네 다리 밑에서 기어다닐 녀석들이야. 누가 뭐래도 나한테는 내 약혼자가 세계제일의 미남이다, 이 말이야." "세계제일까지? 다른 사람들 모두 우리 형제들 중에서 첫째 형이 제일 잘생겼다고 말하는데?" "첫째 형이라고? 하! 하! 하! 어이가 없네. 마, 마… 뭐였지? 맛탕인지 마라탕인지 난 기억도 안 나. 설령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아주버님은 형님한테 제일이면 되는 거고, 내 남편은 나한테 제일이면 되는 거지! …답변을 피하는 게 아니라, 그야 당연히!!! 말할 것도 없이 네가 더 좋아!!! 저기 흘러가는 구름도 너로 보인다니까? 캬아, 잘생겼다 역시. (중얼)어제 책을 너무 늦게까지 읽었나… 눈이 왜 이렇게 침침… 으흠! 에헤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지만… 꼭 부하들과의 술자리에서 돌아오신 우리 아버지처럼 변명하는구나. 괜찮아, 너무 푹 빠진 나머지 너 자신이 누구인지를 망각하지만 않으면 돼. 말해 봐, 넌 누구지?" "우치하 이즈나의 약혼자!" 가끔은 바보 연기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의외로 써먹을 데가 많달까. 하시라마한테 제법 괜찮은 걸 배웠다. 토비라마가 보면 경악하겠지만… 뭐, 지금은 이즈나에게 밉보이지 않는 게 상책이다. "잠깐, 정말 눈 밑이 까맣게 됐잖아. 요즘에는 목검 대신 책하고 친하게 지내는 거야? 아니면 책만 펼쳐 놓고 남자 생각 하는 거야? 아유, 아니, 그런 건 이제 됐고, 오늘은 일찍 자. 알았어?" "네-." 주변을 돌아봐야 한다. 엄마가 그립다고 실의에 빠져서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이 되면, 내 곁에 있는 아빠까지 힘들어진다. 나와 약혼한 이즈나도 마찬가지다. 알고 있기 때문에 힘들수록 웃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제는 두 사람 덕분에 그럭저럭 견딜 만해졌다. "웃지 마, 정들어…" "그러는 너는? 풉!" "으으, 정말 싫다…" "그래, 나도 네가 좋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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