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의 끝자락. 내 나름대로 다가올 새해를 준비하는 중이다. 아빠는 내가 공부에 다시 매진하기 시작한 뒤 이제는 딸이 너무 방에만 갇혀 지내는 게 아닌가 하는 또다른 걱정을 하고 있다.
이번에는 옛 고서부터 거슬러 올라갈 생각이다. 표지를 덮고 이런저런 생각들을 종이 위에 써내려 갔다. 그런 뒤에 자신의 책장을 돌아보았다. 한동안 저 모습 그대로 있었는데, 슬슬 새책을 사러 다녀와야 할 것 같다. 아니, 아니지. 책이라면 굳이 사지 않아도 이즈나에게 빌리면 된다. 명문가의 자제니까 어쩌면 희귀한 책을 많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덧붙여 내 약혼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겠지. 두터운 외투를 걸친 나는 얼어붙은 길을 천천히 걸어 이즈나의 사가로 향했다. 지금쯤이면 녀석도 새로운 학문을 공부느라 머리가 아플 것이다. 최근에 군사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들었다. 방 앞에서 노크를 했지만 대답이 없길래 그냥 열고 들어와 버렸다. 이즈나는 예상했던 대로 검푸른색 머리를 부여잡은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으흠, 헛기침을 했더니 비로소 녀석이 나를 돌아봤다. "!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되게 많아." "자, 잠ㄲ… 오자마자 책상 앞으로 끌고 가는 거야?" "앗, 미안… 어, 어서와. 헤헤헷. 오는 길에 춥지 않았어?" "나는 괜찮은데, 좀 쉬어 가면서 해. 그런 다음 얼마든지 도와줄게." 이즈나가 펼쳐 놓은 책은 얼핏 보아 '제왕학' 같았다. 그런 쪽은 마다라가 더 잘 알 텐데. 뭐, 녀석도 한창 바쁠 때는 제일 아끼는 동생 한 번 만나러 오는 것조차 쉽지 않나 보다. 나는 이즈나를 따라 난롯가에 앉았다. 탁자에 바로 먹을 수 있는 차와 간식이 놓여 있었다. "차 마실래?" "그런 건 됐고, 잠깐 나 좀 봐." "응?" "얼굴이 반쪽이 됐잖아. 말해 봐, 내 약혼자를 고달프게 한 인간이 대체 누구야?" "아무도 날 고달프게 하지 않았어. 굳이 있다면 책이랄까… 어째서 군사학을 배우다 제왕학에서 막히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애당초 난 장남이 아닌데… 그러니까, 수장이 될 것도 아닌데…" "기왕 군사학을 공부하는 김에 제왕학까지 깨치면 좋잖아. 물론 그딴 거 몰라도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어. 하지만 소인배가 되지 않으려면 배워야지. 제왕과는 더더욱 거리가 먼 나도 배웠는걸." "알았어……." "-라는 건, 샌님들이 하는 소리야.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대충 살고 싶으면 대충 살든가. 내가 돈 벌겠다고 했잖아. 명문가에서도 한 명쯤은 한량이 나올 수 있는 거지. 안 그럼 남들이 부러워서 어디 살겠냐. 우리 이즈나는 좀 멍청해도 돼." "멍청한 남편이 다루기 쉬우니까? 아무리 뭐래도 평균 이하로 떨어지고 싶지는 않아. 형도 그렇고 집안에 똑똑한 사람들만 가득한데 나만 바보일 수는 없잖아. 나도 그… 토비라마 같은 녀석한테 지고 싶지 않다구." "흡…" 서둘러 웃음을 삼켰지만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아무리 귀여워도 이런 경우에는 웃으면 안 되겠지.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내게도 좋은 동력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너, 내가 정말 필요하다고 느낄 때 딱 맞춰서 나타나는구나. 신기하다." "사실은 네 공부를 봐주려던 게 아니고 책을 빌리러 왔어." "음… 내가 가진 책 중에 네가 아직 읽지 않은 게 있으려나…" "하하하! 농담도 참. 괜히 띄워 놓지 마. 좀 살펴 봐도 되지?" 이즈나 녀석, 내게 '수박 겉핡기식'이라는 말을 듣고 충격이라도 받았던 걸까. 그때부터 책을 한 권 한 권 깊숙이 들여다봤나 보다. 생각보다 가짓수가 많지 않고, 그의 말대로 대부분 이미 정독한… -라기보다는, 내가 추천했던 책들이었다. 이렇게 익숙한 책들만 나열되어 있는 걸 보고 있을 때면 나 자신이 정말 지독한 책벌레라는 생각이 들어서 회의감이 생긴다. '현타'가 온달까… 살면서 좀 더 중요한 것들이 많다는 걸 나도 당연히 알고는 있지만, 대부분 나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그나마 생소한 책을 하나 빼 들고 이즈나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누가 오타쿠 아니랄까봐,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푹 빠져서 읽고 있었다. 그리고 이즈나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뭐랄까, 굉장히 동경하는 듯한 눈빛으로. "저기… 미안한데, 읽어도 되지? 너 쉬는 동안." "물론이야. 원한다면 여기 있는 책 전부 다 읽어도 돼." 어쨌든 이참에 좀 더 읽어 보려고 했는데, 이즈나의 시선을 한 번 의식하고 나니 계속 신경 쓰였다. 집중하기 위해 미간을 약간 찌푸리는 찰나, 맞은편에 있던 이즈나가 내 옆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거 알아? 너, 책 읽으면서 미간 찌푸릴 때 진짜 멋있어." "…방구석에 쳐박혀 책만 읽는 오타쿠로 보이는 게 아니라?" "너도 알다시피, 내 주변에는 굉장한 사람들이 많아. 하지만 나는 그 사람들보다… 지금까지 비밀로 해 왔는데, 네가 내 우상이야. 똑똑하고, 남자답고… 아, 무, 물론 너는 남자애가 아니지만! 귀여운 여자애지만! 그래도… 뭔가 특별해. 책을 읽을 때의 자세, 페이지를 넘기는 손가락의 움직임까지… 뭐랄까, 엄청 심오해서… 뭐라고 말로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반해 버렸지 뭐야… 헤헷-." 일단,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지만 이즈나가 두 손으로 제 뺨을 감싸고 있다. 나한테 적잖이 콩깍지가 씌어 있는 모양이다. 내가 책을 읽을 때… 예를 들면, 눈이 침침해서 노인네처럼 끔뻑끔뻑하는 거나, 아주 드문 일이긴 하지만 최상의 쾌적함을 위해 코를 파는 거나, 여러 가지로 필터링 된 것 같으니까. 여기서는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모른척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환상을 깨 줘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조용히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이즈나와 마주했다. "아… 으, 으흠! 잘 들어, 이즈나.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한 인간이 아니야. 왜냐면… 그래, 지금까지 읽은 책을 다 합해서, 내가 마다라보다 못해도 5배는 더 많이 읽었을 텐데… 정작 식견은 비등비등해. 능력을 따지자면 마다라 쪽이 더…" "5배나아아? 너는 노력파였구나… 몰랐어… 굉장하다… 와아아아아……." 역효과란 말인가. 녀석의 눈동자가 더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약혼자에게 존경받아서 나쁠 건 없지만 머쓱하게 뒷덜미를 긁적였다. 어떻게 하긴 해야 되는데. 이 정도 수준의 콩깍지는. "나도 좀 더… 잠을 줄이지 않으면……."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이즈나의 작은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콩깍지를 벗기든 뭘 하든 다음에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냥 너무 열심히 공부해서 휴식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너 말이야. 회합 이후로 계속 이랬던 거야?" 나는 이즈나의 이마에 살며시 손을 대보았다. "아, 아마도…?" 그럼 그렇지. 미열이긴 하지만 확실히 나보다 뜨거웠다. 천천히 쓸어내리며 안색을 살폈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서 며칠 정도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인사를 시키지 말걸 그랬나." "미안, … 난 그냥…" "시끄러워! 너는 애가 너무 착해서 탈이야.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 있으면 보통 그 사람을 나보다 못난 놈으로 까내리기 마련인데, 너는 반대로 그쪽을 높이 사고 너 자신을 낮춰 버리잖아. 잘 들어, 토비라마가 아무리 잘나 봤자 나한테는 안 돼. 그러니까 그 인간은 생각하지도 마! 나만 보면 돼! 알았어?" "응……." 머리가 좋다고, 노력한다고, 다 훌륭해지는 게 아니지. 이즈나 넌 나나 토비라마가 가지고 있지 않은 최고의 강점을 지녔어. 따라할 수도 없는 그런 부분들을 부러워하고 동경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즈나가 없었다면 나는 결국 우치하에 적응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괴짜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겠지. 게다가 나는 그렇다 쳐도 마다라 그 자식은 동생 없이 제대로 된 지도자가 될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아, 뿌듯해." "음… 으응…?" "허구언날 무언가에 빠져 살다 보면 으레 그렇듯 다른 중요한 것들과 멀어지게 마련이야. 내 삶은 하얀 종이와 검은 글자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단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됐게? 누가 봐도 내가 1등이지.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게 허상이 아니라면." 내가 볼을 꼬집는데도 녀석은 크게 몸부림치지 않았다. "아, 아얏…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어… … 아파……." "사회성 떨어지는 범생이가 아무리 똑똑해 봤자 퀸카와는 절대 사귀지 못해.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약혼은 가능하더라. 나 같은 애들이 쓰는 표현으로는 '입상'을 한 것과 같은 거야. 아, 무례한 표현이었다면 미안. 나도 가끔은… 있잖아, 열심히 공부하는 것에 대한 보상이 필요해. 내 경우는 이미 받아 버렸지만. 라기보다는 제 발로 찾아왔지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여기까지 왔으니 내 상장에 뽀뽀나 하고 가야겠다-. 우우우우-." "잠ㄲ… 뭐, 뭐야…!" 지난날 당한 게 있어서인지 이제는 내가 뽀뽀를 하려고 달려들면 일단 뒤로 피하고 본다. 개의치 않고 끌어당겨 녀석의 뺨에 뽀뽀 세례를 날렸다. 그때, 토비라마와 부딪치지 않았다면 이즈나가 자극을 받는 일도 없었겠지. 하지만… "아니. 역시 자랑하길 잘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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