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디어라고 말할 것까지는 없지만 오늘은 매일 똑같았던 어제까지의 하루들과 비교하면 조금 기묘하다고 볼 수 있는 날이었다.
책을 가지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할머니를 만났다. 뭐랄까, 평상시처럼 어르신 공경을 했을 뿐인데 감사하게도 내 점을 봐주겠다고 하셨다. "딱 하나만 물어봐. 전부 알면 재미없어." 겉모습은 영락없이 평범한 노파였다. 그녀의 눈이 미래를 내다본다고 예상했겠는가. 보기와 달리 유머로 점철된 입담에 키득키득 웃음이 나왔다. 지금까지 미신 같은 것은 한결같이 멀리했는데, 새삼스럽게도 흥미가 생겼다. "할머니, 저는 어떤 복을 제일 타고났어요?" 묻는다면 역시 이거지.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할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껄껄껄 웃었다. "그건 나한테 묻지 않아도 잘 알 텐데." "예?" "사내놈들이 줄줄이 따라붙는 팔자야. 아가씨가 멀리 한다 해도 말이야." "그러니까 할머니 말씀은 '연애운'이라는 거죠? 푸핫! 아하하하하핫! 아니, 어르신, 아무리 뭐래도 그건… 이렇게 말씀드려서 죄송하지만, 이번에는 점을 잘못 보신 것 같아요. 연애운이라니, 남자복을 타고났다니, 지금 제 모습을 보세요. 이렇게 선머슴같은 인기녀가 세상에 어딨겠어요." "어디, 보아하니 하나같이 인물까지 잘났구먼. 근데 얘기를 끝까지 들어 봐. 그 놈들 중에 장수할 팔자는 하나도 없다는 게 중요하니까. 안타깝지만, 전부 단명할 운명이야." 에휴, 그럼 그렇지. 점 같은 건 믿을 게 못 돼. -생각하면서도,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작은 기대감을 안고 그녀의 말을 들었을 때는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마음 속에서 희비가 교차했다. "흠흠… 저어, 할머니. 운명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지금으로선, 아가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누군가에 의해 간단히 휘어질 만큼 물렁한 놈들이 아니거든. 그나마 다행이라면… 비통함에 빠진 채 쓸쓸히 눈을 감지는 않는군. 다른 건 몰라도 하나만 기억해 둬. '그래도 이 정도면 썩 나쁘지 않아'. 왜냐면 아가씨는 모든 걸 잃은 게 아닐 테니까." 나 자신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정말로 남자복을 타고났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해도 죄다 단명한다니, 긍정적으로 생각할 구석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길고 지루하게 사는 것보다는 짧고 화끈하게 사는 게 낫다는 뜻인가. 내 생각에는 그보다 더 끔찍한 게 없었다. 이런 게 진짜일 리 없어. 끝까지 예의바르게 행동했지만 흥미가 사라진 뒤에는 잊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말이 좀처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단련을 하고 있을 때만큼은 결코 사념에 빠지는 일이 없었는데. 결국에는 쥐고 있던 목검을 내팽개친 뒤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즈나아아아아아!" ", 무슨 일이야?" "나랑 같이 좀 가자!" "어, 어딜 가는데?" "따라와!" 다짜고짜 쳐들어가 남들의 시선은 개의치 않고 이즈나를 데려왔다. 거의 납치나 다름없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내게 팔을 붙잡혀 순순히 끌려오면서도 녀석이 몇 차례나 이유를 물었다. 하지만 나는 마당까지 들어와서 각자의 손에 목검을 쥐기 전까지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덤벼!" "자, 잠ㄲ… 이렇게 갑자기?" 위험할 때 나를 지켜주겠다고? 그러게 나한테 그런 말을 왜 해. 지켜주지 않아도 되는데, 딱히 기쁘지도 않은데. 아니, 조금은 기뻤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괜히 끔찍한 생각이 들게 만들지 말란 말이야. ", 무슨 일 있었어?" 매섭게 몰아붙이는 내 기세에 점점 뒤로 밀려나다가 간신히 발을 딛으며 버텨낸 이즈나가 간절히 대답을 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쉴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밀어붙였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봐주기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네가! 단명할! 운명이래!" 딱! 딱! 딱! 가감 없이 휘둘러대는 목검에서 이전과 다른 묵직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하아? 갑자기 그렇게 말해도… 우왓!" 휙-. 이즈나가 내 공격을 재빨리 피하더니 결국에는 막무가내로 돌진하는 나를 피해 도망다니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도! 사내놈이라고! 내가 다칠까 봐 걱정이나 하고 있는 거냐고! 그럴수록 나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미안하지만 지금 나 잡아 봐라나 하고 있을 기분이 아니란 말야. "다른 놈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지만 너는 아니야! 어디서 감히!" 나는 다다다 뛰어올라 목검을 내리쳤다. 딱!!! 빠직!!! 내 공격을 막아낸 이즈나의 목검이 두동강났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아빠도, 엄마도, 타지마 님도, 마다라도, 깜짝 놀라서 할말을 잃었을 것이다. "헉."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내 진짜 힘에 자신도 놀랐을 정도니까, 이즈나의 눈이 휘둥그레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도대체 무엇이 한 여자아이를 이토록 강하게 만들었는가. 그보다는 어떻게 숨겨 왔는가. 과연 경악할 만했다. "나랑 결혼하겠다고 한 주제에!" "어, 어어! 미안, 미안, 미안! 살려 줘!"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막을 건데! 짜식아!" "으아아아아악! 혀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마다라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달려올 만한 비명소리였다. 그런데 내가 이즈나를 너무 얕잡아 본 것 같다. 덥석. 설마하니 팔을 잡힐 줄은. 깨달았을 때는 녀석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너… 너어… 이런 것도 할 줄 알았어…? 날 기만하다니!!! 가만 안 둘 거야!!!" 나는 힘으로 뿌리친 뒤 악착 같이 목검을 휘둘렀다. 자신과 상대방을 둘 다 고려하지 않은 최악의 공격이었다. 게다가 거기서 이즈나가 방어태세를 풀 거라고는 더욱 예상 못했다. "어, 어어, 어어어어어!" 녀석은 바닥을 짚는 대신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쿵. 잔디밭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얄짤 없이 바닥에 코를 부딪는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이즈나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야아… 이즈나아아……." "아파라… 응, . 괜찮아?" "지금 내 걱정 할 때야! 누가 너더러 봐달랬어!" "하, 하지만 너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잖아. 뭐라 해도 내 약혼자인데, 나 때문에 다치면… 내가 어떻겠어? 차라리 손목을 삐는 게 낫지, 등을 부딪히는 게 낫지. 안 그럼 내… 내 마음이 더 아프단 말야." 그런 말은 귀여운 여자애한테나 하는 거지. 나한테 가당키나 하냐고. 젠장, 기분이 또 왜 이래? 오늘따라 이상하게 가슴이 간질간질하잖아. "죽으면 안 돼……." 애처롭게 중얼거리는 나를 달래듯 이즈나의 손이 다가왔다. 내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듯한 미소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 약혼자도 무서운 게 있구나. 나를 걱정하는구나." 쿵쿵쿵 뛰어대던 심장의 고동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듯하더니 신기하게도 다시 꿈틀거렸다. 뭐야, 뭐냐고. 이런 건 이상해. 서, 설마… 아니야… 말도 안 된다고……. 내가 이만큼 강해지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일어나서 싸워! 어째서 기대고 싶어지는 거야! 어째서 이제 와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바보같이 웃음이 나왔다. 솔직히 말하면 한편으로는 후련했다. 마음이 편했다. "하하하. 역시, 기분 탓이 아니었네. 그렇게 웃으니까 되게 귀여워." 따뜻한 손이 뺨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르겠다. 그냥 기대 버렸다. 거기서라도 정신차리게 해주길 바랐는데, 반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빌어먹게 편안했다. 뭐, 그래. 내 약혼자니까. 여기서만은─. "난 괜찮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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