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계절이 뚜렷한 불의 나라. 그곳에 뿌리내린 우치하 일족도 여지없이 하얀 겨울을 맞이했다.
눈이 발목까지 쌓여 있는 다른 곳들과 달리 내 앞으로는 청소를 해 놓아 깨끗했다. 단지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신발이 젖는 것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박자박.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눈길을 택한 것은 나였다. 물론 나는 바보가 아니지만 누가 뭐라 생각하든 상관 없었다. 어쨌든 나는 그 길을 걷고 싶지 않았다. 2년 전 모든 것을 가려 버린, 마치 없었던 일처럼 만들어 버린 침묵의 밤… 그날의 고요함이 나를 다시 찾아올까 두려웠다. 자박자박. 자박자박. 내가 토비라마의 시동이 되었던 것은 어느새 6년 전 일이 되었다. 아직도 나는 고작 12살에 불과하다. 정말 많은 일을 겪은 것 같은데, 지금 생각나는 것만 해도 수십 가지인데… 여전히 나는 어린아이다. 누군가의 허락 없이는, 자신의 의지로는, 무엇 하나 결정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 "……." 타지마 님께서 부르지 않으셨다면 이토록 추운 날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거다. 어쩌면 책을 구하기 위해 거리로 향할 수도 있겠지만, 요즘에는 책에도 흥미를 잃었다. 열심히 공부해 봤자, 목소리를 키워 봤자, 나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다. "킁-." 춥다. 울 엄마도 추운 거 되게 싫어하는데. 지금 저쪽은… 여기보단 조금 나으려나. 그랬으면 좋겠다. 추우면 더 쓸쓸해지니까. 지금 엄마한테는 아빠도 없고, 나도 없고… 아무도 없으니까. "하아─." 나는 애다. 그저 어린애일 뿐이다. 그래서 어른들의 결정에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 한다. 때로는 그것이 내 목을 죄어 오는 살인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시라마는 그것을 택했다. …라기 보다는, 자신의 친구로 만들었다.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나는 녀석처럼 될 수 없었다. '너, 바보구나.' 언제나 내가 하던 말인데. 설마하니 그게 내가 하시라마에게 마지막으로 듣게 된 말이 될 줄은 몰랐다. 이제 와서는 화가 난다기 보단 헛웃음이 나온다. 욕하고 싶지만, 때려 주고 싶지만… 내 눈에 보이기나 해야 말이지. 하하. 그래, 내가 너한테 졌다. 편지라도 쓸 수 있음 좋을 텐데. 나 오늘 시집간다, 하시라마 녀석아. "에잇, 퉤! 잘 먹고 잘 살아라." 지금이라면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친다 해도 어딘가에서 비명횡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곳으로부터 벗어나면 숨통이 트일 것 같다. 그러나 차마 나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아직 나한테는 아버지가 계시질 않은가. 어머니를 잊지 못하고 오로지 나만 바라보고 사는 울 아빠. 그 가슴에 맺힌 한에 비하면 내 비통함쯤은 아무것도 아닌지라, 나오던 눈물까지 쏙 들어간다. 가기 싫은데… 벌써 도착해 버렸네……. 어쩌면 바보는 정말 나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사내가 아니다. 귀족도 아니다. 단지 보통 아이들보다 조금 똑똑하다고 칭찬받는 머리 하나와 뜨거운 심장 하나를 가지고 태어났다. 겨우 그런─. 젠장──. 덜컥. 문이 열리고, 문턱을 넘어섰다. 그와 동시에 내 운명은 또 한 번 바뀌었다. 어디까지나 내가 아닌 타인에 의해 멋대로 결정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약혼자라는 녀석과 말 한 번 섞어 본 적 없다. 그런데 부부라니… 그런 녀석 때문에 연애 한 번 못하고 정절을 지켜야 한다니.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타지마 님을 닮아서 미남이란다.' '장남이 자기보다 똑똑하다며 자랑하고 다닌다더구나.' 글쎄, 아빠. 하나뿐인 딸내미 시집보낼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 "타지마 님, 입니다." "들어오너라." 궁시렁궁시렁… 차마 소리는 내지 못하고 입술로만 중얼거리며 금방이라도 욱 할 것 같은 마음을 다잡았다. 방 앞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있던 나는 문이 열린 뒤 조용히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만 쳐다보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이즈나와는 개인적으로 말을 섞어 본 적이 없지만 적어도 얼굴은 기억하고 있었기에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미 알겠지? 이즈나, 내 아들이다. 앞으로 너의 남편이 될 녀석이지만… 하하하. 사실, 아직은 철부지 꼬마나 다름없어. 네가 한 살 터울의 누나이니 곁에서 많이 가르치고 도움이 되어 주어야 한다. 또래 중에서 가장 현명한 너니까 그리 해줄 거라 믿는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치하 타지마. 현 우치하 일족의 수장이자 당주. 한때나마 그를 죽여야 한다는 사명감을 품었던 내가 그의 아들과 결혼하게 생겼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마음은 전혀 다르지만 공손히 감사를 표한 뒤 고개를 들었다. 수장님께서 병풍을 등진 채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이즈나는 그로부터 약간 떨어져 있었다. 11살인가. 녀석에 대해 묘사하자면, 일족의 고유한 유전자를 하나도 빠짐 없이 물려받은 것 같았다. 단정하게 묶은 검푸른색의 긴 머리칼이 등 뒤로 차분하게 내려앉은 모습. 눈처럼 하얀 피부가 사람과 의복을 더욱 조화롭게 만들었다. 나와는 어쩐지 맞지 않는 일족의 전통옷이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자신의 혈족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그래서 약간 오만해 보이는 표정까지 완벽했다. 내 약혼자는, 이즈나는 딱 봐도 우치하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소년이다. "오느라 고생했구나. 돌아가도 좋다." "예." 나는 예를 다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는 순간까지는 공손함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마침내 방을 나가려는 찰나였다. 줄곧 뻣뻣하게 앉아 있던 이즈나가 나를 돌아봤다. 잠시뿐이었지만 눈이 마주쳤다. 녀석의 붉은색 눈동자가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 기분이었다. 너 지금 나한테 사륜안 깠냐? 초반부터 기선제압하겠다는 거야 뭐야. 기분 나빴지만, 입술을 꾹 다문 채 눌러참았다. 센쥬에 있을 적만 해도 사내자식들을 마구 쥐어팼던 나인데. 남자에게, 심지어 사랑도 없이 결혼한 남편 놈 따위한테 힘 없이 끌려다닐 거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어디 덤벼 봐. 덤벼 보라고. 안 그래도 억지로 할 생각에 짜증나 죽겠는데. 넌 내 밥이야. 알겠냐? 아앙?! ─이렇게 속으로 외치는 사이, 이즈나 자식이 선빵(?)을 날렸다. "아버지, 어차피 저도 사가로 돌아가야 하니 이참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 주겠습니다. 이제부터 많은 것들을 서로 알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하고 싶은 얘기도 많고, 묻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얘기하긴 뭘 얘기해? 묻긴 뭘 물어? 나만 네가 어색한 거니, 지금? 미쳤어? 피차 불편한 사이니까 혼인날까지 그냥 조용히 남은 자유를 즐기자고. 너도 사생활이 있을 거 아니야. 필요한 만큼 거리를 두자 이 말이야. "녀석, 약혼자가 생기니 어른스러워졌구나. 그래, 우리 일족의 여자들은 모두 강하지만, 그래도 지아비에게는 여인이다. 때로는 네가 나서서 지키고, 두둔하고, 보듬어 주어야 한다. 내 아들이니 너도 언젠가 전쟁에서 칼을 쥐고 싸우게 될 터… 무인에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녀 앞에서만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해. 화내지 말고, 언성 높이지 말고, 누구보다 부드럽게 대해 주거라. 알겠느냐." "예, 아버지. 그럼 저도 가 보겠습니다." 나도 무인의 자식이지만 칼 좀 쓴다는 놈들은 허구언날 쌈박질하느라고 처자식은 뒷전이다. 그런 와중에 수장님께서 애처가로 유명하시다는 게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 농담이 아니다. 지금도 나 대신 내 남편될 녀석에게 참된 아내 사랑을 가르치고 계시지 않은가. 감사해야 하는 건지 오히려 질색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저 모든 게 혼란스럽다. "명심하거라. 강해도 여자는 여자…" "알겠다니까요, 아버지. 부끄러우니까 그만하세요." 저도 부탁입니다, 시아버님. 지지고 볶든 치고 박고 싸우든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아, 제가 아무리 화나도 남편 때려 죽이는 그런 애는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알아들을 정도로만 팰게요. 어쨌든 나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돌아가는 길은 자박거리는 소리 없이 걸어야 했다. 대화 상대가 있다면 딱히 상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깨닫고 보면 두 사람은 이미 침묵의 구덩이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이즈나 너 이 자식… 네가 침묵해 버리면 어떡해…? 뭐라고 말 좀 해 봐…! "……." 으으, 하는 수 없지. 녀석과 대화 따위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침묵은 더 견디기 힘들었다. "저, 저기… 안녕." "안녕, ." 으악!!! 미래의 남편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리는 순간 두 팔에 닭살이 돋았다. 괜히 인사했다가 손가락이며 발가락이며 바짝 오그라들어서 펴지지가 않는다. 미치겠다. 이게 뭐야. 뭐냐고. 나한테 왜 이래. 난 이런 낯간지런 분위기 진짜 질색이란 말야. 으으으. "내, 내가 누나잖아. 왜 갑자기 반말…" "그래서? 나는 네 '하늘같은 서방님'이야." 발끈, 혈압이 치솟았다. 훅 하고 올라오는 한쪽 손을 다른 쪽 손으로 어떻게든 저지했지만, 주먹이 엉엉 울었다. 하늘같은? 하늘같은?! 그럼 난 우주다 이 놈아아아!!! 허억… 허억… 참자, 참어. "(어금니 꽉)우리 서로 지킬 건 지키자… 어…?" 내가 이런 식으로 말할 때 보통의 아이라면 내게서 범접할 수 없는 살기를 느끼고 움찔해야 한다. 그러나 수장님의 아들은 사뭇 달랐다. 타지마 님과 붕어빵같은 웃는 얼굴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나도 눈치채지 못한 내 앞의 돌부리를 발로 치워 버리는 여유까지 보였다. "이 약혼이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거 알아. 너나 나나 싫어도 싫다고 말할 수 없는 입장이지. 하지만 나는 내 특별한 상황 때문에 너보다 더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는 걸 알아 줬으면 해. 특히 아버지 앞에서는 조심 좀 해 주라. 그렇잖아, 너랑 결혼하겠다고 한 건 나인데, 내가 뭘 어쩌겠어?"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이즈나가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펼쳐서 내 머리에 씌워 주었다. 그의 어깨 한쪽에 눈이 쌓이고 있었다. 딱 그 장면 본다면 극적인 상황일지도 모른다. 하. 지. 만. 나는 이즈나의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잠깐의 침묵을 흘려보낸 뒤, 울컥했다. "너였어…? 네가 타지마 님한테 말씀드린 거였어…? 결혼하고 싶다고…? 나랑…?"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타지마 님께서 나를 아끼시기는 하지만 일족 안에서 상대를 찾는다면 나보다 괜찮은 여자애들이 얼마든지 더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였을까. 왜 하필이면 내가, 톡 까놓고 말해 선머슴이나 다름없는 내가 며느리로 낙점됐을까. 흑막은 여기 있었다. "착각하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내가 아버지께 간절히 부탁드렸던 건 널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야. 맨날 자기 집 마당에서 목검만 휘두르는 여자애를 위해 어떤 남자가 그렇게까지 하겠니? 좀 전에도 말했다시피, 너보다 더 곤란한 건 나거든? 제발 문제 일으키지 말아 줘." "저기… 나는 비혼주의자야… 무슨 말인지 알지? 할 수만 있다면 평생 혼자 살고 싶은 여자란 거야. 근데 너 때문에 다 망했어. 죽을 때까지 사내자식 수발이나 들게 생겼다고. 어디 이유나 들어 보자. 대체 왜 그런 거야? 나랑 결혼해서 너한테 득이 될 게 뭐 있는데? 응?" "미안, 나중에 얘기할게. 나는 비밀을 지켜야 하거든. 내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야. '어쨌든 너랑 내가 결혼할 일은 없어'. 이럼 되겠지? 사이좋은 친구로 지내자." 약혼은 했지만 결혼하지 않는다고? 사이좋은 친구로 지내자고? 야, 이 양반아. 그게 말이야 방구야. 네가 뭔데 나를 멋대로 이용해? 사람 인생을 완전히 망쳐 놓고 비밀은 무슨 얼어죽을 비밀? 죽을래? 진짜 죽고 싶냐? 아유, 약혼자만 아니면 콱! 일단 오늘은 참겠지만 갖잖은 이유기만 해 봐라.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정도라면 납득해 주지. 최소한 '일족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가 아니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너는 이제 기혼녀나 다름 없으니까 한 가지 분명히 해 둘 게 있어. '절대 바람은 금물'. 비혼주의라고 말할 정도면 딱히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긴 한데, 혹시 모르니까. 알겠지? 다른 남자 좋아하면 안 되고, 생각하는 것도, 쳐다보는 것도 안 돼. 그래도 내가 너 손해보는 일 없게 해줄게. 걱정 말고 나만 믿어." 때리고 싶다. 아니, 아니지. 최대한 잔인하고 포악한 방법으로 내가 당한 모욕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똑똑한 녀석은 부숴뜨리는 재미가 있지. 그 와중에 잘생기기까지 해서 더 아니꼽다. 뭐 하는 놈이야, 너? "듣자하니 2년 전까지는 네가 센쥬 일족 남자애들을 완전히 휘어잡고 있었다며?" "그래, 내가 바로 그 악명 자자한 '숲의 포식자'다. 알고도 이런 일을 벌인 거냐?" "딱이야, 딱. 그 정도는 돼야 우리 집안 여자라 할 수 있지. 후후훗." "……." 대체 뭔 속셈이냐고, 우치하 이즈나아아아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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