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년만인가. 올해의 마지막은 불의 나라 영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커다란 행사로 떠들썩하게 마무리짓게 되었다. 거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영주뿐 아니라 그보다 작은 토착세력들도 대부분 참석한다. 군사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우치하와 센쥬 일족도 그 안에 포함된다.
지난번에는 센쥬로서 일족의 춤까지 췄는데 이번에는 우치하가 되어 같은 자리에 나타나게 생겼다. 그때와 달리 타지마 님께서는 딱히 춤 같은 걸 강요하지 않으셨지만 어쨌든 입장이 참 거시기하다. "이즈나아아, 부탁이야. 네가 타지마 님한테 말씀드려서 나 좀 빼달라고 해 줘어어." "그렇게 부탁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네가 싫다고 해서 빠질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뭐, 수장님 곁에 여자들도 있긴 해야겠지. 근데 나는 결혼도 안 했잖아. 엄연히 따져서 아직 며느리가 된 것도 아닌데, 왜? 어째서? 다른 여자들 놔두고 굳이 내가 따라가야 하는 거냐고." "아버지께서 나한테 특별히 당부하셨어. 그러니까 아마도 처음부터 의도하고 계셨던 일이 아닐까 하고… 네 마음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번 일에 대해 나한테는 아무런 힘이 없어. 사실 항상 그렇지. 난 형도 아니고, 아직 어리고… 못난 약혼자라 미안해." "아니, 뭐, 네가 미안할 것까지야. 근데 진짜 싫다. 그런 중요한 자리에 센쥬가 참석하지 않을 리 없는데… 보나마나 하시라마랑 토비라마도 올 텐데… 그 잘난 낯짝들을 또 봐야 한다니." 으으, 생각만 해도 열받네! 수장님 아들과 약혼하지만 않았어도… 하지만, 그래, 아아, 차마 부정할 수가 없다. 내 약혼자는 오늘도 귀엽다는 거. 젠장. 이리저리 몰려다니기 좋아하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요즘에는 내 뒤만 졸졸 따라다녀서 최근들어 부쩍 가까워졌다. " 너는 지난번에 영주님 앞에서 춤 췄지? 나, 다 기억해." "그, 그걸 어떻게… 나 외에도 몇 명이나 더 있었는데, 내 얼굴이 기억나? 말도 안 돼." "처음 만났을 때는 몰랐지.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내 인상에 제일 깊게 남았던 여자애가 너라는 걸 알겠더라고. 그때 되게 예뻤잖아. 하지만 내가 네 약혼자니까 알아차릴 수 있었던 거야. 다른 애들은 모를걸?" "아… 쪽팔려… 그런 건 자랑스러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잊어버려! 흑역사라고!" "아무튼 이번에는 앞으로 나설 필요 없으니까, 내 옆에 가만히 있기만 하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갈지도 몰라. 게다가 지금쯤이면 토비라마한테도 약혼자가 생겼을 텐데~ 너한테 신경쓸 경황이나 있을까~?" "윽…" "그런 중요한 자리에서 남의 여자를 힐끔거리기나 하는 녀석이 차기 주역들이라면, 난 센쥬의 미래가 너무 어둡다고 봐.(절레절레) 설마하니 우치하의 맞수가 거기까지 덜떨어지지는 않겠지." 그렇지! 저쪽이 나를 알아볼지 어떨지도 모르는 일인데 나 혼자 설레발치고 있는 거지! 하지만 만약에의 만약이란 게 있잖아! 혹시나의 혹시, 설마하니의 설마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행여라도 눈이 마주치는 날에는… 크아아아!!! 참을 수 없다!!! 특히 하시라마 그 자식은!!! "… 아직도 마음이 쓰여…?" 속이 울렁거렸다. 그때의 기억은… 마치 독한 술 같았다. 어쩌면 잠시 동안은 내 갈증을 해소해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짧은 순간이 지나고 나면 시원하게 토하고 싶은 기분을 느낀다.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는 녀석들이질 않은가. 약혼을 했든 안 했든 내 알 바 아니다. 아니, 궁금하긴 하지만… 문득 이즈나를 돌아보니, 어쩐지 조금 서운해하고 있는 듯 보였다. "무슨 오해를 하는 거야? 간단히 말해서 길가다 마주친다고 생각했을 때 불편한 사람1과 불편한 사람2야. 나랑 이미 약혼까지 한 너한테는 신경쓸 가치도 없지. 그러니까 쓸쓸한 표정 짓지 마. 나 이래 봬도 그런 거에 엄청 약하단 말야. 누가 보면 질투하는 줄 알겠네." 이즈나의 뺨에 보이지도 않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 주고 능청스레 웃어 보였다. 이 녀석… 내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서 무력화시킨 것으로 모자라 점점 치명적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제는 뭘 해도 귀여워 보여서 문제다. "원래는 나도 질투 같은 거 잘 안 한다 뭐… 평소에 전혀 질투하지 않는 너 때문이라구. 알아? 나라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관계는 뭘 해도 메마른 우물을 켜는 것처럼 무의미하게 느껴질 거야." "음, 그건 그래." "애초에 나는… 그다지 정당한 방법으로 너랑 약혼한 게 아니니까……." "하하하. 아직 나를 모르는구나. 너 아닌 다른 녀석이 타지마 님께 나랑 약혼하겠다고 말씀드린 거였음… 난 말이지, 그 놈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했을지도 몰라. 너니까 참은 거지." "나… 아슬아슬했구나…?" "어땠을 것 같냐? 사실 누가 보더라도 넌 나한테 과분한 결혼 상대야. 게다가, 어쨌든 지금은 잘 지내고 있잖아. 나 때문에 억지로 약혼했으니까 분해도 참아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마. 그 부분에 대해 적어도 너랑 나 사이에는 얘기 끝난 거야. 미안해할 거 없다고. 알았어?" "내 약혼자가 너무 멋있어서 정신을 못 차리겠어." "너한테 그런 말까지 하게 해서 도리어 미안하다. 풉." 이즈나가 나와 있을 때 유달리 온화해지는 것은 아마도 내 기분탓이 아닐 것이다. 원래 둥글둥글한 성격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는 아무리 뭐래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다. 평범하게 거친 구석도 있는 사내아이랄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런 당연한 것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그보다… 솔직히 말하면, 방금 전에는 좀 당황할 뻔했다. 약혼이라. 나는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하시라마가 6살 때였으니 지금쯤 11살이 됐을 토비라마에게 약혼자가 생겼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아직은 이즈나와 나처럼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은 모양이지만… 그래, 6년이나 흘렀으니까. 최소한 상대가 어느 일족의 누구인지 정도는 거론되었어야 한다. 최근 센쥬 일족의 움직임을 생각하면 딱히 유추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토비라마는 역시 일족을 위해 부당한 결정까지도 받아들였으려나. 뭐, 그랬다고 해서 반드시 불행하다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토비라마 이상으로 정략결혼을 끔찍하게 싫어했던 나도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내 약혼자와 웃고 떠들며 잘 지내고 있지 않은가. "그날, 내 옆에 있을 거지?" "미인계를 써대니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네." "갈 거야, 말 거야? 확실하게 대답해." "내가 졌다, 그래. 가면 되잖아, 가면." 더욱이 나는 아직도 불 같은 성격을 버리지 못했는데, 토비라마라면 보나마나 여전히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한 심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심장은 웬만해선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 같은 하수와는 다르다. " 너, 자꾸 딴생각 할래? 얼굴에 다 보이거든!" "어이쿠. 미안, 미안. 잔상이 남아서 좀 치우느라 그랬어." "결국에는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잖아." "머릿속을 깨끗이 비워서 다시 너로 채우려고 그랬지." "그런 말투…! 나도 너한테 배우고 싶어……." 약혼자가 이 정도인데, 어떻게 내가 여자애로 돌아갈 수 있겠냐고요. (…)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이면 여기서 회합이 열릴 게 뭐람. 이래서 더 오고 싶지 않았던 거다. 한때 센쥬였던 내가, 우치하 일족의 땅에서, 타지마의 며느리로서 손님맞이를 하고 있으니. 게다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던 인간이 또 하나, 계속 함께할 예정이다. 가족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안녕, 마다라. 장남으로 태어나서 수고가 많다." ", 이런 자리에서는 형한테 존댓말 써야 돼…" 평소처럼 인사했더니, 이즈나가 옆에서 눈치를 줬다. 마다라는 이제 그러든지 말든지 콧방귀나 뀌고 만다. "놔둬라. 안 그래도 낯간지러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녀석한테 무슨 존댓말까지 시켜. 지금까지 그 녀석이 한 번이라도 나를 윗사람으로서 겸손하게 대한 적이 있었냐. 절대로 없지." 내 말이 그 말이야. 세상에서 제일 만만한 마다라한테 존댓말을 쓰라니, 차라리 이즈나 너한테 애교를 부려 보라고 해라. 최선을 다할 수 있으니까. 둘 다 싫지만 꼭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면 후자를 택하겠어. "하시라마는?" "저쪽." 마다라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부터 왁자지껄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하시라마와 다른 일족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동네친구들처럼 웃고 떠들어대는 걸 보면 이미 천하통일 끝난 것 같다. 심지어 나와 눈을 마주치고도 뻔뻔하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웃기는 바가지머리야 정말. "마다라 너도 알다시피, 난 저 자식이 정말 싫어. 근데 사적인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보면 얘기가 달라지거든. 녀석이 가진 타고난 능력만은 네가 배워야 돼. 저 웃는 얼굴 좀 봐. 사람 좋아 보이지, 말만 하면 뭐든 들어줄 것 같지, 호구도 저런 호구가 없다는 느낌이잖아. 근데 하시라마가 어디 그런 녀석이냐. 절대 아니지." 마다라는 제 말투를 똑같이 따라하는 내게 여유로운 코웃음으로 답했지만, 하시라마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사뭇 진지한 표정과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지금까지 없었던 유대감. 그리고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피말리는 경쟁의식. 하시라마가 바보들 중에 제일 무서운 바보라는 건 마다라도 나만큼이나 잘 알고 있다. "저기, 저쪽에, 한때 너의 도련님이었던 녀석도 있으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봐 두어라. 네 말대로 너한테는 전혀 관심 없어 보이긴 한다만. 어쨌든 나는 얘기해 줬으니까, 약속을 지킨 거다." "……." 내가 하시라마를 봐도 아무렇지 않은 건, 여전히 미워하는 감정이 남아 있는 덕분이다. 그런데 토비라마에게는 없다. 그를 멀리해야만 하는 이유가. 센쥬 일족이라는 것 하나 말고는 아무것도. 그래서 솔직하게 인정하자면 지금도 애틋하다. 빌어먹을. 예상은 했지만 어떻게 한 번을 안 돌아보냐. 내가 여기 있다는 거 알면서, 자기를 보고 있다는 거 알면서. 반가운 인사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헤어지기 전, 처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날 도와줬던 것… 적어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선뜻 다가가 말을 건넬 수는 없었다. 생각만 해도 어색하다. 너무 어색하고, 낯설고… 하하하.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어색함이 뭐야. 낯설음이 뭐야. 상대는 토비라마잖아. 저 인간 저거 집에서는 은근히 응석 잘 부리는데. 나한테 거의 전남편인데. 약혼자랑 같이 안 온 건가? 혼자인 걸 보니 괜히 걱정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했다. 하긴, 그 성격 나 말고 누가 받아줘. ", 괜찮아?" 이즈나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 어쩌면 내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렇겠지. 토비라마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던 것 같…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인사도 나누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잖아. 남이나 다름없잖아. "오늘, 비 안 오려나." "비 내리면 전부 엉망이 돼 버리잖아." "전부 똑같이 비에 젖은 새앙쥐 꼴이 되면 얼마나 웃기겠어. 안 그래, 마다라? 딱 너다운 생각이지?" "네 생각이 나다운 거라고? 뭐, 이번에는 그럴지도 몰라. 솔직히 지루해 죽겠으니까." "하여간, 둘 다…" 그래, 이건 아무것도 아냐. 다음에는 전장에서 서로에게 칼을 겨누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렇잖아. 차라리 하늘이 머리 위로 물벼락을 내려서 모두 정신차리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하잖아. "이즈나." "응?" "나, 생각이 바뀌었어. 손님맞이 정도는 도와야겠지." " 너한테는 옆에 있어 준 것만으로 고마워 하고 있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어쨌든 나도 이 집안 사람이 될 테니까." 하시라마는 바쁜 것 같아서 그런 형을 충실하게 지키고 서 있는 동생 쪽으로 걸어갔다. 내 약혼자인 이즈나와 함께. 우치하와 센쥬가 평화롭게 만나서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어디 쉽게 가질 수 있던가. 이참에 제대로 인사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토비라마, 오랜만이에요." 두 사람의 기척을 알아차렸을 때는 과연 무덤덤한 토비라마도 싫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넸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수장님의 아들이니까, 때로는 아버지를 대신해 일족의 대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거기서는 당연히 내 쪽을 볼 거라 생각했는데… 그의 시선은 나를 깔끔히 무시하고 내 약혼자에게 향했다. "우치하 이즈나로군. 예상했어." "나도 예상 못한 걸요? 대단하네요." "타지마의 아들과 혼인한다면 너일 게 뻔하지." "그럴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뻔하게 시작하지 않았어요.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라 내가 먼저 아버지께 그녀와 혼인하겠다고 말씀드렸거든요.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예측 가능한 게 아니죠. 안 그래, ?" 지금도 치열한 싸움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두 일족. 게다가 현 수장의 아들끼리 인사를 나누고 있으니 분위기가 껄끄러운 것을 넘어서 살벌해진다 해도 무리는 아니다. 냉정하고 차분한 토비라마와 밝고 능청스러운 이즈나가 그렇게까지 흉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쨌든 중재는 필요하다. "하지만 토비라마는 알았을 거야. 내게 시아버지 되실 분이 그에게는 적의 수장이니까, 모르는 게 이상하지. 그런 면에서 나는 아직 멀었나 봐요. 솔직히 말해서 당신의 약혼자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겠어요." "…." 괜찮냐고 묻는 듯한 이즈나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내 안색이 나빠졌음을 알아챈 것이었다. 내가 동요하고 있다는 것, 이즈나는 상관없지만, 토비라마가 알아서는 좋을 게 없다. 그렇기에, 부러 미소를 지었다. "장기, 더 잘 두게 되었어요?" "지난 2년 간 너에게 수를 읽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났지." "궁금하게 만들지 마요. 같이 둘 수도 없는데. 게다가, 이제 나는 하수나 다름없어요. 2년 동안 한 번도 장기를 두지 않았거든요. 당신이랑 둔다 해도 질 게 뻔하니 앞으로는 얘기도 꺼내지 말아야겠네요." "네 약혼자는 어떤데?" "마다라랑 두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이즈나도 꽤 잘 둬요. (속닥)마다라를 완전히 발라 버렸거든요. 후후후. 하시라마도 그렇고, 지금부터 자기 곁에 둘 책사를 잘 찾아 보지 않으면 나중에 곤욕을 치를 거예요. 아, 하시라마한테는 당신이 있으니 문제 없으려나요?" "마다라에게는 네가 있지." 이제야 나를 보는구나. 역시나 그리 따뜻한 눈빛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지만. 아니,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으로 내 안의 환상이 깨졌다면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다. "나는 지금도 붓으로 글을 쓰는 것보다는 전장에서 칼을 쥐고 싸우는 게 더 좋아요. 그쪽이 당신과 부딪칠 일이 적을 것 같기도 하고요. 무서워서 도망친 나를 굳이 쫓아와서 때리지는 않겠죠?" "글쎄, 멀리 떨어져 있어도 네가 결국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게 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나한테 도전장을 내미신다 이거지. 도련님 많이 컸네. 뜻밖의 도발에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고맙게도 이즈나가 침묵을 막아 줬다. "의 빈자리가 큰가 보죠?" "부정하지 않겠어." 어째서 거기서 인정하는 거야. 나는 하물며 이즈나까지 할말을 잃어버릴 만큼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내 약혼자 앞에서 옛사랑 행세라도 할 셈인가. 아니, 뭐랄까, 딱 잘라 그런 일 없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이 되고 나니 이제는 그녀가 정복의 대상으로 보이나요?" "알고 싶다면야. 여전히 예쁘네. 얌전한 척하고 있지만 성격도 그대로야." 이즈나는 온화한 성격을 지녔으면서도 나처럼 가슴에 뜨거운 것을 품고 있는 녀석이다. 불에 가깝달까. 그렇다 보니 얼음 같은 토비라마와는 대비된다. 다르기 때문에 가늠하기 어렵다. "그게 급하게 생각해낸 말이에요? 어떤 약혼자도 홀딱 반하겠네요." "난 아직 약혼을 하지 않았어. 누구한테 무슨 말을 해도 잃을 게 없지." 다만 한 가지… 남자들 자존심 싸움 유치하다는 건 만국공통의 진리라는 걸 알게 되어서 괜히 내가 다 열받는다. 설마하니 이런 대화가 오갈 줄은. 내 생각이 짧았다. 인사를 시키지 말았어야 했는데. 둘만 놔두고 사라지면 안 되나. 이럴 바엔 마다라랑 있는 게 차라리 낫겠다. "어쨌든 반가웠어요." "얌전한 척 어지간히 해." 당신도 적당히 좀 하지? 나 옛버릇 나오기 전에. "저희 어머닌…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내부사정은 얘기해 줄 수 없어. 알고 있잖아." 이제 다시 적으로 돌아가시겠다? 으으으, 한 대 콱 때려 주고 싶다. 하지만 참아야겠지. 차세대 주역들이 다 모여 있는데 여기서 본모습을 보였다가는 내 앞날이 어두컴컴해질 것이다. "안부 전해 주세요." "……." 토비라마는 하시라마에게 관심을 되돌렸다. 하지만 그는 내 말을 잊지 않을 것이다. 센쥬로 돌아가서 엄마에게 내 얘기를 대신 해 줄 것이다.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었다. "나, 하시라마랑 인사해도 돼요?" "미안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무슨 말이에요?" "이번에는 네가 무시해. 그게 나아." 나는 하시라마를 돌아보았다. 이전과 다른 점은 없어 보였다. 여전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바보처럼 웃고 있을 뿐. 아까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손을 흔들어 보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토비라마의 말을 듣고 보니, 어쩐지… 아니, 기분 탓일 것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믿어 봤자 무슨 소용이람. ", 형한테 돌아가자." "응, 알았어. 난 이만 가 볼게요." 대답도 안 하네. 잘났다 그래. 나는 이즈나에게 팔짱을 끼고 자연스럽게 걸었다. 방금 전까지 웃는 얼굴로 일관하던 이즈나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돌아서서 언짡아하는 걸 보니 새삼 미안해지면서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야." "마음에 드는 게 이상하겠지, 저런 태도는." "너도 그래. 잠깐이었지만 괴로운 표정을 지었잖아." "그렇다면 더욱 내가 결백하다는 걸 알아야지. 어쩌면 예전의 나는 토비라마를 보면서 흐뭇한 상상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괴로움만 남아 있을 뿐이야. '절대 바람 금물'. 잊지 않았으니까, 걱정 마." 이제는 괴로움마저도 이즈나 너처럼 동그랗게 다듬어져서 그다지 아프지 않은데. 솔직하게 말하면 좋아하려나. 그럴지도 모른다. 문제는 삐친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좀 더 보고 싶다는 거. "정말 웃겨, 예쁜 건 알아 가지고." "그러게, 둘 다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질투유발에 성공했다는 듯이 우쭐대지 마." "후후후." "웃는 거 봐라. 좋아 죽겠지?" "여기서 내가 행복할 이유는 너밖에 없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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