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러. 니. 까. 타지마 님께서 '네 잘못을 알았느냐'고 물으셨을 때만 해도, '잘못했습니다' 한마디면 복도에 꿇어앉는 벌을 면할 수 있었다는 걸 내가 모를 리 없다, 이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몇시간째 벌을 서는 중이다.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아 엉덩이가 들쑥들쑥, 쥐뿔도 소용없는 코에 침까지 발라 가며 버텼다.

 "괜찮아, ?"

 "어떻게 봐도 안 괜찮아 보일 때는 괜찮냐고 묻지도 마, 자식아."

 어두컴컴한 복도 한구석. 등불의 희미한 빛조차 닿지 않는다. 어느덧 모두 잠들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밥까지 굶고 벌을 서는 약혼자 때문에 이즈나는 아직 사가로 돌아가지 못했다.

 내가 귀가하지 않는 이유를 우리 아버지께 대신 설명해 준 빚은 나중에 갚아야겠지.

 "걱정되는데 어떡해, 그럼."

 "뭐래, 오글거리게… 좋아, 내가 인정할게. 그래도 이럴 때는 약혼자밖에 없구나. 사실 진작에 깨달았어. 그래, 그래, 웃어라. 얼마든지 흐뭇해하라고. 이제 네 마음은 잘 알았으니까, 집에나 가. 미래의 아내와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의리 있는 남편으로 소문나는 게 너의 진짜 목적이 아니라면."

 "후후후. 난 네가 말을 재밌게 해서 참 좋아."

 "웃으라 했다고 진짜 웃는다 또. 웃지 마, 정들어. 너 나한테 처음에 말하지 않았어? '어쨌든 너랑 내가 결혼하게 될 일은 없어'라고. 거울 앞에 서서 지금 네 표정이 어떤지 봐. 누가 보면 나한테 푹 빠진 줄 알겠어. 위험하다고. 그러다 진짜 나랑 결혼하고 싶어지면 어떡할래? 네 중요한 사람을 배신해도 되는 거야?"

 "네가 그 사람을 미워하는 건 이해해. 그치만 너무 오해가 커지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만약, 정말 만약에 그 사람의 마음이 바뀌면, 우리가 가짜 약혼자 행세를 할 필요가 없어지면… 약속할게, 내가 다 책임진다고."

 "염병… 차라리 남자답게 인정해. 그 인간한테 가서 솔직하게 말하고 사과하란 말이야. 내 첫인상이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너도 나를 꽤…"

 "만약의 얘기잖아… 아무것도 확실해지지 않았는데 함부로 말을 꺼내면 안 돼.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내 말은… 상대방이 약혼을 취소해 버리면 사람들이 너에 대해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 그럴 바에는 내가 책임지겠다는 거야. 양심적으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

 너 때문에 시집 다 갔으니 양심적으로 결혼하겠다는 거냐. 나한테 듣기 거북한 소리긴 마찬가진데.

 그래, 세상에는 양심까지 버린 놈들이 많으니까. 자기 때문에 처녀가 애를 가졌는데도 나몰라라 하는 새끼들 있잖아.

 그런 개자식들도 많은데 약혼파기쯤이야. 게다가 책임지겠다니, 그것들에 비하면 너는 천사다.

 "나 있지, 좀 충격 받았어… 네가 남자애들을 때린 것 때문에 아버지께서 이렇게 벌까지 주실 줄은 몰랐거든. 형이랑 내가 전후사정을 설명하고 몇 번이나 용서해달라고 빌었지만 기분이 안 풀리셨나 봐. 엄밀히 따지면 놈들의 잘못이 더 큰데 어째서 너한테만 화를 내시는 걸까?"

 "타지마 님께서 나한테 화를 내고 계시는 게 아니야. 애초에 내가 그 분을 화나게 만들 생각이었음 거기서 다른 놈들도 똑같이 벌해달라고 대들었지. 넌 똑똑한 얘가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냐? 내가 마을 애들한테 어떤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지 타지마 님께서 모르실 거 같아? 난 지금 시험대에 선 거야."

 "그렇구나…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어… 부끄럽네……."

 "무얼 기죽고 그래? 방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난 네가 똑똑하다는 걸 알아. 이번에는 날 걱정하느라 미처 알아채지 못한 거겠지. 잘 들어, 타지마 님께는 내가 알아서 길 테니까, 나 때문에 괜히 나섰다가 미운털 박히지… 제기랄! 네 형은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당신 앞가림이나 잘 하시라고 해. 혹시라도 내 약혼자 끌어들여서 바보같은 짓을 하게 했다간 가만 안 두겠다고 말이야."

 "……."

 이즈나는 잠시 벙찐 얼굴이 되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훕! 하하하…"

 제 머리칼과 같은 검푸른색 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는 녀석에게 뭐가 웃기냐고 따져야 했지만, 내게도 한 발 늦게 민망함이 밀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도리가 없었다. 입술만 잘근거릴 뿐.

 "형은 널 생각해서 그런 건데… 너무해……."

 이즈나가 숨죽여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맞아… 아무리 뭐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머쓱하게 중얼거렸더니 그게 또 취향저격이었는지 두터운 소매 너머로부터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나에 비하면, 몇 년째 목검을 휘둘러대서 근육에 알통이 생길 지경인 여자애에 비하면 오히려 저쪽이 더 소녀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만큼 웃는 것마저 얌전한 녀석이었다.

 그것이 어찌 보면 내게도 이상한 부분에 눈을 뜨게 했다. 화가 나다가도 마음이 누그러진달까, 깨닫고 보면 어느새부터였는지 필요 이상으로 녀석을 이해하고, 받아주고, 상냥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억울한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 건, 이즈나가 나를 잘 대해 주는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야, 근데 말야. 어쩐지 좀 이상한 것 같아. 넌 내 약혼자니까 급한 마음에 빌 수 있다 쳐. 네 형은 알 만한 인간이 왜 같이 오바하고 난리냐? 동생이 외로워 보여서 그랬나?"

 "그, 그건… 음……."

 이즈나가 갑자기 우물쭈물하기에, 나는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동생 사랑이 유별나다는 얘기를 듣긴 했다만, 주변 사람들한테까지 피곤하게 구는 타입은 아니었음 좋겠네. 나한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말라고 해. 톡 까놓고 말해 좋은 아내, 좋은 제수가 될 자신은 없으니까. 너한테는 미안한데, 알다시피 내가 성질이 더러워. 죽어도 한 집안의 호구로는 못 살거든. 대신 너처럼 전쟁에 나가서 싸울게. 돈 벌어 오면 되잖아."

 내 말을 끝까지 듣고 난 뒤, 어느덧 이즈나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사라지고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사실 부끄러워하면서 몸을 비비 꼬는 남자애는 징그러울 법도 한데 오히려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 자신에게도 놀랐다.

 "정말이지… 벌써 나랑 결혼한 것처럼 말하네… 뭐, 기분 나쁘지는 않지만… 좀 더 말을 가려서 하는 편이 좋겠어… 누가 듣기라도 하면… 아니, 물론, 그게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보이기는 하겠지…"

 "말했잖아, 네 중요한 사람이 누구든, 뭐라고 하든, 난 이미 너랑 약혼했다고. 끌려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거든. 너랑 그 인간이 꾸민 짓인데 왜 나까지 다른 사람 눈치를 봐야 돼? 내가 못할 말 했어? 부끄러운 짓이라도 했냐? 지랄맞을, 이 얘긴 다음에 다시 하자. 지금은… 보다시피, 벌서는 중이니까."

 "내가 욕 쓰지 말랬잖아…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는데, 내 입장은 전혀 생각 안 해 주는 거야? 나도 애쓰고…"

 이어진 복도로부터 떨림이 전해져 왔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이즈나가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있단 말ㅇ… 음…!"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녀석의 얼굴을 끌어당겨 진하게 키스해 버렸다. 달의 그림자가 서서히 이동하며 두 사람의 머리에 푸른빛을 드리웠다. 발소리가 잠시 멈추었다가 빠르게 멀어졌다. 딱히 첫키스는 아니었지만… 입술이 떨어진 뒤에 깨달았다. 이번에도 무심코 숨을 참고 있었다. 과감히 저질러 놓고는 헉헉거리는 내 모습이 퍽이나 우스웠을 것이다.

 "어, 어이… 약혼자 씨… 거… 고개 떨구고 뭐 하냐… 무슨 말 좀 해라……."

 "아… 그런가… 응… 그렇네… 저기… 방금 네가 본 사람… 누, 누구였어…?"

 "글쎄…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키가 크고 뚱뚱한 남자였어… 아마도…"

 "그래… 그럼 다행이고… 아니… 뭐가 다행이야… 나한테 말도 없이 그러지 마…"

 누구는 복도에서 벌서는 주제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겠냐고. 나도 모르게 입술이 나간 거라고. 이미 해 버린 걸 어쩌란 말야. 이렇게 된 이상 타지마 님 귀에 얘기가 들어가지 않기만 바라야지. 어쨌든 결혼 전에는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는데… 지키지 못했으니… 아휴, 진짜 내가 왜 그랬을까.

 "방금 건 아니야. 취소해!"

 갑자기 정신을 확 차린 듯, 이즈나가 날카롭게 말했다.

 "뭐? 취소할 게 따로 있지!"

 녀석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벌떡 일어났다.

 "나 집에 갈래."

 "야, 잠ㄲ…"

 질색하는 반응을 보여야 할 타이밍은 한참 전에 지났거든. 도망쳐 봤자 뭐가 달라지냐.

 확실히 기뻐하는 표정은 아니었달까, 속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지만… 어째서?

 그 행동이, 그렇게까지 나쁜 거였어?

 난 너처럼 조신하게 자라지도 않았고 아직 숙녀가 아니라서 모르겠다.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멀어져 가는 녀석을 바라봤다. 뭐라 해도 통쾌한 기분이 드는 것은 별 수 없었다.

 뭣하면 이게 내 복수라고 생각하든가.


<제작> Copyright ⓒ 공갈이 All Rights Reserved.
<소스> Copyright ⓒ 카라하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