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지 아저씨는 내가 우치하에 와서 좋아하게 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아니, 현재로써는 아빠와 이즈나를 제외하고 유일한 사람이라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모두 나를 멀리할 때 그는 내게 선뜻 다가와 말을 건넸고, 지금까지 나이와 관계 없이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덕분에 나는 더 이상 아저씨가 왜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미워하지 않고 똑같이 대할까라는 고민을 할 필요도 없어졌다. 아저씨가 일족 사람들에게 꽤 오래 전부터 괴짜 취급 받아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괴짜인 두 사람은 처음부터 잘 통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급하다고 해서 서둘러 말에 태우긴 했다만, 이제 슬슬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건지 가르쳐 줘도 되지 않니? 알다시피 나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어. 그런데 지금은 내 집, 그리고 달콤한 휴식과도 멀어지고 있구나."

 "어른 주제에 어린애의 부탁을 들어 주면서 투덜거리지 말아요. 혼자 남겨지면 어차피 술 마시는 것밖에 할일 없잖아요. 그런 건 휴식을 취하는 것도 아니지. 의원이 금주하라고 안 했어요?"

 "하지만 말도 쉴 자격은 있거든."

 "내가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궁금해요?"

 "으음… 아니, 됐어.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게 이미 너와 나 사이에 정해진 불문율 같구나. 더는 묻지 않으마. 하지만 나는 지극히 이성적이었던 처음의 내 생각을 끝까지 믿고 싶었단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 다른 사람들 눈에 띄면 아주, 아주, 좋지 않을걸. 너에게도, 그 행운아 녀석에게도 말야."

 "푸하핫! 걔를 행운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저씨밖에 없을걸요? 막말로다가 아저씨가 유부남이었다면 아저씨 부인은 행운아일 거 같아요? 아저씨나 나나 결혼하면 그날로 천하의 뻔뻔한 인간들이 되는 거야."

 "글쎄, 적어도 너의 경우는 이 길로 찾아가서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면 분명해지겠구나. 나는… 나는, 여자들이 술 잘 마시는 남자를 좋아한다는 게 헛소리라는 걸 증명해 보이겠어. 혼자서 외롭게 말야."

 아저씨는 직업이 마굿간지기인 걸 떠나서 말들에게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퇴근한 뒤에도 자기 말과 함께 다니기 때문에 종종 이렇게 나도 얻어 타곤 한다. 달리는 건 아니고 따그닥 소리를 내며 빨리 걷는 정도인데 그것만으로도 제법 스릴있고 재밌다. 차가운 밤공기와 뺨에 스치는 바람이 좋다.

 "이쯤에서 나는 돌아가야겠다. 내리는 거 도와줄까?"

 "아저씨는 내가 무슨 숙녀라도 되는 줄 알아요? 읏챠!"

 솔직히 처음엔 좀 무서웠지만 혼자서도 문제 없다. 등자를 밟고 능숙하게 말 위에서 내린 뒤 손을 흔들었다. 따그닥 따그닥. 아저씨와 말이 떠나자 주변이 고요해지면서 근처의 수로를 타고 흐르는 개울물 소리,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그럼 어디, 이제부터 내 잠입 능력을 시험해 볼까나.

 아저씨에게 들키지 않고 술병을 빼앗는 시험은 멋지게 통과했다. 후후후. 어쩌면 나한테 있어서는 우치하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친구가 될지도 모르는데 술 때문에 일찍 죽게 놔둘 수야 없지 않은가. 솔직히 말하자면 대체 어떤 맛이길래 그렇게 마셔대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계획했던 대로 잠입을 시작했다. 경비가 삼엄한 평상시였다면 꿈도 못 꿀 일이다. 지금쯤 타지마 님, 그리고 언제나 그의 뒤를 따르는 측근들은 한창 술판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물론 아저씨랑 똑같이 보면 안 되고, 부하들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대사를 논하기도 하는 자리다.

 어쨌든 여기서 내게 중요한 것은 이즈나의 사가로 향하는 길에도 순찰을 돌거나 보초를 서는 사람이 평소의 반으로 줄었다는 사실이다. 흠, 이 정도면 해 볼 만하지. 원래 애들은 자야 할 시간이지만… 뭐, 난 착한 애도 아닌걸. 가끔은 나도 장난이 치고 싶달까, 좀 더 놀고 싶다고.

 지금까지 이즈나네 집에 왔을 때는 언제나 문 앞에서 헤어졌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담벼락을 넘어서 건물을 빙 돌아 뒷쪽으로 이동한 나는 울타리 안쪽의 작은 정원으로 들어갔다. 이즈나의 취미가 식물 돌보기라도 되는 걸까. 뭐, 잘 어울리긴 하네.

 "하아─."

 갑자기 누군가의 한숨소리가 들려서 얼른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런데 보아하니 그곳은 이즈나의 방인 것 같았다. 녀석이 턱을 괸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무언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이즈나에게 다가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놀랐지!"

 "헉!"

 쉿-. 조용히하라는 내 제스쳐에 이즈나가 벌어졌던 입을 다물었다. 녀석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방문이 약간 열려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닫았다. 그런 다음에는 잠든 것처럼 보이기 위해 등불을 껐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역시나 잘 알고 있었다.

 "너어어… 여기서 뭐하는 거야아아…!"

 "왜, 내가 못 올 데라도 왔냐? 좀 진정해."

 "못 올 덴 아니지만… 지금은 밤이라구우…!"

 "달빛 아래 데이트를 하려고 일부러 밤에 온 거야."

 "데이트라니, 내가 호적에서 파이는 걸 보고 싶어? 응?"

 "걱정 마, 파여도 여자인 나만 파일 테니까. 요즘 남자들한테 어디 달밤의 밀회 정도가 대수냐. 아무리 엄격한 아버지라도 아들한테는 그렇게까지 안 해. 남자로 태어나서 행복한 줄 알아."

 "좋아, 나는 그렇다 쳐. 넌 그렇게 잘 아는 애가 어쩌려고 그래? 아니, 일단… 계속 거기 서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 누군가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단 말야. "

 "내 약혼자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는 위험이지."

 "하나도 안 멋있거든. 뭐라 해도 네가 여자애라는 걸 잊지 마."

 "사람들은 달밤에 약혼자를 만나러 갈 만큼 대담한 여자들도 많다는 걸 알아야 해. 뭐, 난 들키지 않을 거지만. 혹시 알아? 여자가 아무렇지 않게 먼저 청혼할 수 있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잖아. 실패할 땐 실패하더라도 부딪혀 봐야지. 언제까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해야 돼?"

 "난…"

 쨍─. 가방 안의 병이 창틀에 부딪혔다.

 "잠깐, 뭐길래 그런 소리가 나?"

 "이거? 쥬스야, 그냥 쥬스."

 "못 살아, 정말."

 자식, 안절부절 못하는 게 기대했던 것보다 더 귀엽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그런 반응을 보이면 괜히 더 장난치고 싶어지잖아. 하지만 들키면 정말 곤란하니까 얌전히 있다 돌아가는 편이 좋겠지.

 창틀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니 바깥과는 확연히 다른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등불을 모두 껐지만 난로의 불은 여전히 타고 있었다. 주변이 캄캄해서 서로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이즈나가 내게 바짝 다가오더니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문득 녀석의 손이 내 뺨을 감쌌다.

 "볼이 왜 이렇게 빨개졌어?"

 "몰라. 밖이 추워서 그랬겠지."

 사실은 들어오기 전에 아저씨의 술을 조금 마셨다. 한 모금 삼켰을 때 최악의 맛이라는 걸 깨닫고 퉷 뱉어 버렸지만. 그 정도의 적은 양으로도 아이에게는 충분이 독할 수 있나 보다.

 "이리 와. 난로 앞에 있자."

 "뭐라 말해도 너는 너네."

 "무슨 뜻이야?"

 "아무것도."

 결국에는 친절하게 대해 줄 거라 생각했다. 이즈나 녀석은 언제나 그러니까. 친절이라 해도 딱히 내게만 통용되는 상냥함은 아닌지라 고마워하기 보다는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솔직히 이즈나가 나밖에 모르는 녀석이었으면 진작 사랑에 빠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결혼 상대로는 별로겠지만.

 "신기하네. 네 얼굴을 보니까 생각 이상으로 기분이 좋아졌어. 헤헤헤. 왠지 좀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졸린 것 같기도 하고… 나 잠깐 누워 있을래. 네 약혼자한테 무릎 좀 빌려 줘라."

 "…!"

 나는 이즈나의 대답을 끝까지 듣지 않고 멋대로 녀석의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워 버렸다. 스스로 그런 행동을 하고도 기분이 이상했다. 설마하니 내가 지금 술에 취한 건가. 아빠가 예전에 술 마시고 들어오면 엄마한테 애교부리고, 무릎베개 해달라 조르고, 딱 지금처럼 보였던 것 같은데… 누가 그 아비에 그 자식 아니랄까 봐, 똑같은 주벽을 그대로 물려받은 모양이다.

 "이즈나 너 고민 있지? 아까 한숨을 푹 쉬던데. 무슨 일이야? 나한테 얘기해 봐."

 "돼, 됐어. 세상에 고민 없는 사람도 있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으니까 신경쓰지 마."

 "그래서 잠도 안 자고 끙끙 앓고 있었냐? 걱정 마,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 테니까. 설마하니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겼다든지… 그런 건 아니겠지? 뭐, 그렇다 해도 괜찮아. 너한테 집착할 마음 없어."

 "…아, 정말? 장담할 수 있어?"

 "너도 중요한 사람과의 약속에 구애받고 있을 뿐 딱히 나를 좋아해서 약혼한 건 아니었잖아. 내 말은 그러니까 네 마음이 정 그래야겠다면 다른 사람을 좋아해도 돼. 대신 내 입장이 곤란해지지 않게 상대는 좀 봐 가면서 해 주라. 나한테 너랑 떨어지라고 얘기해 봤자 도리가 없으니 말야."

 "그런 일이 생기면 난 네가… 집착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불편한 기색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분명히 알겠어.  넌 그냥… 현실에 적응 중이구나. 정말 똑똑하네."

 "운 좋게 사내로 태어난 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나 있어? 빌어먹을, 너도 알잖아. 남자의 불륜은 진정한 사랑이고 결혼한 뒤에 애인과 만나는 건 당연한 일이야. 하물며 결혼하기 전인데, 내가 이해해드려야지 어쩌겠어? 괜히 미안한 척하지 마, 내 앞가림 알아서 할 테니까."

 "똑똑하다는 말 취소. 넌 그냥 비뚤어진 바보에다 고집불통이야. 누가 뭐라 말해도 네 눈에는 제대로 보이지 않겠지. 나 자신을 위해서도 너한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어."

 "말이 심하네. 아무리 뭐래도 내가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아야 할 정도로 끔찍한 약혼자냐? 톡 까 놓고 말해서 너는 어떤데? 혼자 살고 싶어하는 나를 강제로 이 관계에 끌어들였잖아. 나랑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정작 나에 대한 마음은 요만큼도… 작은 감정이라도 있었어? 아니지?"

 "…그래."

 자기도 결국에는 할말이 없는 입장이면서 새삼스레 왜 따지려 든담. 게다가 풀이 죽는 건 뭐야. 우울해도 내가 우울해야지.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약혼자한테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겠냐고. 마음 같아서는 이쪽이 따져 묻고 싶다고.

 "미안해."

 "뭐가?"

 "한번도 사과한 적 없었잖아. 나 때문에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하고 약혼까지 했는데… 이제 그 남자가 친구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 같으니 너한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다. 정말 미안."

 "?"

 뭐라는 거야? 지금 같은 주제로 대화하고 있는 거 맞지? 어째서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 저번에도 그렇고… 알다가도 모르겠네. 설마하니 이 자식 나한테 진심인가? 에이, 아니지?

 "저기, 혼란스러운 거 이해해. 네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약혼이라는 게 다른 평범한 관계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니까. 하지만 언제까지고 애매모호한 채로 계속 이어갈 수는 없어."

 "알았으니까 그만해."

 "아니, 지금부터 확실하게 해 두는 게 서로에게 좋아. 네가 나한테 단순히 약혼자로서의 역할을 기대하는 건지 아니면 그 이상을 원하는지 나도 알아야 할 거 아냐.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딱 잘라 말해."

 "그만하라니ㄲ…"

 "나는 이미 말했어. 네가 좋다고."

 "에… 아아… 그때… 그… 그거……."

 나는 당황한 이즈나의 표정에서 이미 대답을 돌려받았다 치고 잠시 기다리다가 손사래를 쳤다.

 "됐어, 말하기 싫으면 관둬."

 "아니, 나는… 내가 잠깐 착각을…"

 "어쨌든 지금은 좀 봐 줘. 내가 힘들 때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냐. 나도 딱 이만큼만 널 좋아했음 좋겠는데… 모르겠다. 요즘은 너랑 있는 게 제일 편해. 너는 곤란할지도 모르지만. 싫으면 앞으로는 나한테 필요 이상으로 잘해 주지 마. 난 그다지 상냥함에 익숙하지 않아서… 헷갈려. 정신차리고 보면 넌 언제나 다른 애들에게도 똑같이 친절한데 말이야."

 "아니야,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은 달라. 나한테도 당연히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 솔직히 말하면 웃으면서 나쁜 생각을 할 때도 많아. 게다가, 내가 이런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는데.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친절하고 싶었어. 정말, 정말 넌더리가 난단 말야. 괜히 이쪽저쪽 오해만 사고… 이제는 너한테까지…"

 "아, 알았어. 아니, 잘 모르겠지만 여기까지만 하자. 나 지금 머리가 좀… 으… 어지러워."

 "자기만 나타나면 다 해결될 것처럼 자신있게 말하더니, 너랑 얘기하는 게 아니었어. 네가 '여기까지만'이라고 말해도 난 이미 그만둘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단 말야. 어떻게 해 줄 거야?"

 "글쎄, 지금 같이 갈까? 너의 중요한 사람한테 가서, 정식으로 결혼 허락을 받고 올까?"

 "너, 진심으로 하는 말…"

 "웃기는 소리! 허락 같은 건 필요없거든. 이리 와, 자식아."

 "잠ㄲ… 으음! 으으음!"

 그래, 아빠가 취했을 때 말했던 '사랑해'에도 분명히 진심은 담겨 있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게다가 나는 한술 더 떠서 이즈나에게 뽀뽀까지 했다. 단순히 주정부리는 게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취하기 전부터 생각했던 거니까. 이쯤 되면 슬슬 저쪽에서 해주는 걸 기대하게 되는데. 내 생각이 맞다면, 아마도 무리겠지. 이즈나 너는 네 형을 너무 사랑해서 탈이야. 쯧쯧.

 "쉿-. 너, 딱 걸렸어."

 "하아… 하아… 뭐…?"

 "내 눈에는 훤히 보인다. 지금 뭐라 말해도 결국 네가 마지막에 택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인간이야. 사랑만으로 피를 억누르긴 힘들어. 아니, 그런 일도 가끔 있지만 적어도 너한테는 없어. 어떻게 확신하냐고? 너랑 똑. 같. 은. 인간을 하나 알거든. 외모도 성격도 다르지만 알맹이는 같아. 결국 나는 뒷전이지. 어차피 지 맘대로 할 거면서 무슨 말이 많아! 뽀뽀든 뭐든 할 수 있을 때 할 테다!"

 "무, 무슨 말을 하는 ㄱ… 으으으으음!"

 방금 건 주정이었다. 아아, 부정할 수 없다. 아무리 뭐래도 그런 말을… 더군다나 두 번이나 뽀뽀할 것까지는 없었는데. 깨닫고 보면 이즈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지, 나는 그 위에 올라타 있지, 그야말로 덮치는 듯한 그림이 되었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내가 이럼 안 되는데. 에라, 모르겠다.

 "…! 으으음! 으으으음!"

 "푸하-. 내 말 잘 들어, 도련님. 내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확 저질러 버리고 싶은데, 너어얿은 마음으로 기다려 줄게. 가서 꾸물대지 않는 게 좋을 거라 전해. 딱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이야. 그때부터는 나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안 그래?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면 어디 두고 보든가. 깨끗이 인정하든지, 아니면 다시는 동생 얼굴 못 볼 각오 해야 할걸."

 "어째서 너는 여자애면서 나보다 힘이 센 거야… 이런 건 이상해… 흑… 진짜 이상하다고… 흑흑… 도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 여자애가 잘생긴데다 똑똑하고 심지어 거칠기까지 해… 왜 내가 두근거려야 돼… 원래는 내가 그쪽에… 너를 두근거리게 해야 하는데… 이게 뭐야아아… 싫어어, 싫다구우우……."

 젠장, 너무 귀엽잖아. 더 하면 진짜 눈물까지 보이겠네. 나도 딱히 일부러, 이즈나의 어떤… 사내아이로서의 존엄성에 상처를 입힌 건 아니었다. 자신에게 있어 더럽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나를 거칠게 만들었을 뿐. 흠흠.

 똑똑똑.

"이즈나, 괜찮은 거냐? 들어가도 되니?"

 "아… (킁) 저, 저는 괜찮아요…! 들어오지 마세요…! 저기… 옷을 벗고 있으니까… 부끄러워요…!"

"이런 겨울에? 그러다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뭐 어쨌든 큰소리가 들리길래 와 봤는데 별일 없다면 돌아가마. 혹시라도 수상한 기척이 느껴지거나 할 때는 나를 불러야 한다. 너도 알겠지만 오늘 밤은 바깥의 경비가 평상시보다 허술해서… 타지마 님께서 특별히 네 보호를 부탁하셨거든."

 "알겠어요…! 걱정 마세요…!"

 이즈나는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야 알아챈 모양이다. 당연히 나는 그보다 먼저 인기척을 느꼈다. 저 문이 열렸다면 아마도 엄청난 일이 벌어졌겠지만 그래도 좀 더 허둥대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이렇게 된 이상 놀려먹기라도 해야 직성이 풀린다. 나는 딱히 나쁘지 않은걸.

 "나 그만 갈게. 잘자."

 "잠깐, 이렇게는 못 가!"

 -라면서 대뜸 멱살을 잡길래 나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뜻밖에 부드러운 감촉이 다시 한 번 마음을 녹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전보다 더 대단했다. 이즈나가 먼저 나한테 뽀뽀한 건 처음이었으니까. 자기도 갈피를 못 잡고 있으면서 나중에 어쩌려고 그러는지. 뭐, 그것도 자업자득인가. 너야말로 나 때문에 울지 마라.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 없으니까.

 "으음… 하… 저기, 이즈나, 있잖아. 한 번은 실수로 할 수 있어. 그 정도는 네 형도 이해할 거야. 하지만 다음에 또 하게 되면 그건 실수가 아니야. 그냥 막 나가는 거지. 잘 생각하ㄱ… 음!"

 그리고 생각 끝났네. 아, 후련해라.

 답답했던 게 거의 내려갔다. 일단은.

 "으음… 고마워. 잘 자."

 "너도 잘 자, ."

 쪽-. 입술이 뺨에 가볍게 부딪혔다. 그러나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다정하게 들렸다. 이걸로 내 억울함도 어느 정도는 풀렸다고 봐야 하려나. 이렇게 되면 오히려 내 쪽이 미안해지는데. 후후후.

 (…)

 이즈나 : 아아… 어쩌지…….

 (차라리 천벌이라도 받아서 형보다 일찍 죽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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