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나와 친해진 뒤로 이따금씩 녀석과 만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련을 하게 되었다. 무인들이 주를 이루는 일족의 아이들에게는 놀이의 일환이기도 하기에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아버지께 같이 인사를 드리고 나서 마당으로 이동해 본격적으로 목검을 부딪기 시작했다. 딱! 딱! 서로 합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정오가 되어 있었다. 이즈나가 으으 신음하더니, 자신의 목검을 내렸다.

 "이즈나, 왜 그래? 혹시 나 때문에 손목 다쳤어? 응?"

 "아니, 그냥 탄복하고 있는 거야. 역시 강하구나 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사내놈들의 덩치가 나보다 커졌지만, 그래도 성장하고 있는 아이들은 고작 한두 살 터울만으로 신체능력에 있어 크게 차이가 난다.

 굳이 따진다면 이즈나가 나보다 어리기 때문에, 이 대련은 애초에 그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뭐, 사실 누가 보더라도 내가 센 거지 이즈나가 약한 게 아니다.

 "흠흠… 최근에 말인데, 내 약혼자한테 좀 설렐 뻔했지 뭐야."

 "어… 그러니까 나한테 말이지? 왜?"

 "너랑 검을 맞대 보면 느껴져. 수장님 아들이라 확실히 혹독하게 훈련받은 티가 난달까. 겉으로는 비실해 보여도 남들이 안 보는 데서 엄청 노력했다는 걸 알 수 있어. 힘은 내가 더 세지만 너한테 배울 점이 많아. 게다가 11살짜리 남자애 몸에 그 정도 탄탄함이면 충분하지. 휘~"

 "모처럼 칭찬을 듣고 있을 때 이상한 농담 덧붙여서 기분 망치지 마. 너 말투가 점점 뭐랄까, 학교에서 문제 일으키는 남자애들처럼 변해 가는 것 같아… 이성의 아이에게 농담하고, 휘파람 불고, 그런 건 무례한 행동이라고 생각해."

 "내 농담이 기분 나빴다는 거야?"

 "아니, 난 그냥 좀 민망할 뿐이야."

 "부끄러워하기는. 알았어, 임마."

 "실은 너도 귀여운 여자애잖아."

 이즈나의 체형을 보면 또래에 비해 작은 편은 아니다. 다만 형제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 타지마 님의 가계가 훤칠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이 녀석은 갸냘픈 외모에 성격도 온화한 편이라 툭 치면 쓰러질 것 같다고 오해했던 것이다.

 "이즈나 넌 여자애들한테 인기 많겠다?"

 부드러운 말투라든지, 일부러인지 모르겠지만.

 "남자애들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거랑은 다르지 않아?"

 "아무튼 여자애한테 고백받아 본 적 있을 거 아냐. 얘기 좀 해 봐."

 "그게 널 즐겁게 만든다면야… 에휴-."

 갑자기 웬 한숨?

 곧 점심을 먹어야 하니 아버지께서 부르실 때까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사람은 누구나 의외의 면을 하나 정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 아빠는 당연히 전장에서 칼을 잘 휘두르지만 부엌에서도 만만치 않은 실력자다. 굳이 내가 옆에서 거들지 않아도 매번 훌륭한 한끼 식사가 차려진다.

 갈증을 해결한 뒤 이즈나에게도 물통을 건네고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아빠가 마당에 잔디밭을 만들어 준 덕분에 아무데나 풀썩 앉아도 된다. 행여 딸 무릎 까질까, 엄마의 빈자리를 느낄까, 집 곳곳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흔적이 보인다. 이렇게 자상한 남자니까 적의 여자도 반할 수밖에 없었던 거겠지.

 "있잖아, ."

 "응?"

 "나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 같아. 너한테 그런 얘기를 해도 정말 괜찮은 건지… 사실, 나는 너라는 여자애가 익숙하지 않아. 무슨 뜻이냐면…  넌, 전혀 질투가 나지 않을 거라 생각해? 내가 다른 여자애랑 엮이는 얘기를 듣고…"

 "무슨 말을 하려는가 했더니, 결국 그거였냐? 아, 그래 맞아. 여자애는 원래 지나간 일에도 일일이 예민해져서 화낼 만큼 질투가 심해야 정상이었지. 귀염성 없는 약혼자라 미안하다."

 "말했잖아, 너는 귀엽다고. 내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 미안한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 일부러 남자애 흉내를 낼 필요는 없다는 거야. 나는 좀 혼란스러워. 너를 동성친구들과 똑같이 대해도 되는 걸까? 넌 괜찮아?"

 "나는 편한 걸 택했을 뿐이야. 그야, 나도 예쁜 아이가 되어서 너처럼 사랑받고 싶지. 하지만 그거 알아? 결국에는 이게 또 하나의 내 모습이 되어 가는 거야. 그러니까 물론 괜찮아. 혹시 모르지, 남자애처럼 사는 게 질려서 나중에는 여자애다운 모습으로 돌아갈지."

 "너는 다른 애들보다 조금 특별한 것 같아. 그런 거 있잖아, 여자애들에게는 여자들만의 색깔이 있어. 빨강이나 분홍 같은 거. 다른 애들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넌 달라. 어떨 때는 빨강이었다가, 어떨 때는 파랑이었다가… 사실 난 너의 그런 부분을 재밌다고 생각해. 언제부터 남자애로 사는 게 편하게 느껴졌어?"

 "별걸 다 물어 보네. 좋아, 알려 주지. 솔직히 말하면 계기는 대수롭지 않은 거야. 난 그냥 좀 의기소침해 있어. 지금까지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는 커녕 잃어버리기만 했거든."

 "뭔가 가슴 아픈 사연이 있는 거구나… 하지만 남자애처럼 행동하는 것과는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아무래도 네 얘기를 좀 더 들어야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여자애다운 행동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더라고. 예쁘게 꾸며 봤자, 내숭떨어 봤자, 질투 같은 걸 해 봤자… 어쩐지 나는 반대로 흉측해지는 기분이 들었어. 그러다 보니 다 귀찮아진 거야. 응."

 돌려말하다 쓸데없이 장황하게 늘어놔 버렸군… 안 봐도 비디오인 것을 무얼 묻고 있어. 쪽팔려서 어떻게 얘기해? 톡 까 놓고 말해서 '실연당했는데 아직 회복이 덜 됐다'라고 어떻게 얘기하냐고!

 네가 여자로 태어나서 하시라마 같은 놈 만나 봐, 내 맘 알 테니까. 예쁘게 꾸민다고, 내숭떤다고, 질투한다고 무너질 바보가 아니거든. 최소한 우즈마키 일족 수장의 딸 정도로 태어나야 한다니깐! 안 그럼 명함도 못 내민다니깐!

 "하지만 나는 네가 어느 한 쪽을 포기하기 보다는 둘 다 쟁취했으면 좋겠어. 예를 들면… 그래, 평상시에는 귀여운 여자애로 있는 게 사랑받기 좋겠지. 하지만 전장에서 성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잖아. 그럴 때는 남자애가 되는 거야. 멋있겠다."

 "이즈나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노력해 볼게."

 "고마워.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구나. 솔직히 말할 테니까 웃지 마. 사실 난 네가 여자애를 좋아하는 거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도 해 봤어. 그런 것만 아니면 뭐든 극복할 수 있을 거야. 너랑 나… 우리 모두."

 이즈나가 내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상당히 침착해 보였다.

 어쩌면 지난번 키스가 이 녀석 머릿속에는 별일 아닌 것으로 기억됐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최대한 빨리 잊어 버려야겠다고 생각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 너는 전혀 질투가 나지 않을 거라 생각해?'

 별일 아닌 척, 잊어 버린 척 하고 있거나. 적어도 하나는 맞겠지.

 나는 이즈나에게 천천히 몸을 기울이며 다가갔다. 녀석은 그런 나를 피해 반대쪽으로 점점 기울어졌다.

 "…"

 그래 봤자, 눈동자에 비치는 감정까지 다스리려면 아직 멀었다.

 "분명히 말했다? 내 약혼자는 너라고. 너랑 나. 그게 전부야."

 "으, 응…"

 마주닿은 시선으로부터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서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지만 마음은 흔들리는 게 보였다.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두 개의 자존심이 마치 기싸움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쩐지, 다른 의미로 대련 같은 게 되어 버렸네. 어차피 이번에도 내가 이기겠지만.

 "날 상대하려거든 밥을 더 든든히 먹고 와. 이번에는 네 패배야."

 "너야말로 반칙하지 마. 갑자기 그런… 하여간 치사한 행동이야."

 "무슨 행동? 내가 네 옷 잡아당긴 거? 아니면 뽀뽀하는 척한 거?"

 "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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