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기 있다. 쉿."
"크크크, 잘 만났다." 들키지 않으려고 그렇게 속삭여 봤자, 눈을 밟으면 소리 때문에 다 알거든.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홱 돌아섰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였다. 휙─. 덥석─. "헉!" 뒤통수를 향해 날아온 눈덩이를 정확하게 받아냈더니 놈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즈나 녀석은 내가 마당에서 목검 휘두르는 모습만 아는 모양이지만 이래 봬도 꾸준히 반사신경을 단련해 왔다. 고오오오오오. 녀석들은 내 위엄한 자태에 압도되어 감탄하면서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저들끼리 싸인을 주고받았다. 체력만 남아도는 바보들이라 또 다른 눈덩이가 예약되어 있음은 예상범위 안의 일이었다. 휙─. 덥석─. "뜨헉!" 이번에는 날아드는 눈덩이를 캐치해 뭉개뜨리며 놈들에게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쯤 되면 놀라움을 넘어 전율마저 느낄 것이다. 네놈들은 내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어지간히 인정하라고. "우와, 뭐야… 저 계집애… 좀 대단한데…?" "계집애라는 말은 하지 마… 와타루가 그랬다가 친구들이랑 엉망진창으로 얻어터졌대…" 사내놈들은 오기가 있어서 저들이 던진 눈덩이가 적중할 때까지 끈질기게 쫓아다닐지도 모른다. 가끔은 넌덜머리가 나서 한 대쯤 맞아 줄까 생각하다가도, 서열정리는 확실하게 해 둬야겠다 싶어서 그냥 넘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이상 사내놈들과 싸움박질을 하고 다니면 아버지께 정말 폐를 끼칠 것이다. 지난번 학당에서 벌였던 싸움으로 소문이 퍼져 버렸으니 당분간은 주먹이 울어도 싸움을 자제해야 한다. "여기다! 어디 반격해 보시지!" "여자애라 던질 힘도 없냐? 하하하!" 진정한 강자는 약자를 상대로 싸우지 않는다지. 그러나 나는 예외다. 한 번 빡치면 미친개가 되거든. 자박자박. 자박자박. "이쪽으로 온다!" "빠, 빨리 방어해!" 센쥬에 있던 시절에도 그곳의 사내놈들에게 똑같은 괴롭힘을 지긋지긋할 정도로 당했다. 내 눈덩이를 맞은 녀석들은 머리에 혹이 생기겠다는둥, 눈에 돌을 섞은 게 아니냐는 둥 투덜거리곤 했다. 나는 남자아이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나 놈들보다 강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딱 알맞은 동기부여가 됐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서 눈싸움을 했던 날에는 나도 그 상황을 그냥 즐겨 버렸다. 적어도 마지막엔 놈들과 나도 라이벌… 친구 비슷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아무리 뭐래도 나를 괴롭히던 놈들까지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 가면 갈수록 멀어질 일만 남았는데, 마치 향수병이라도 앓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엄마와 다시 만나야 한다. 그러니까 엄마만 생각해야 한다.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을 터인데. 자괴감이 들면서 나 자신에게까지 화가 난다. 휙─. 퍽─. "으악!(털썩)" "괘, 괜찮아?;; 감히 내 친구를 쓰러뜨리다니! 용서할 수 없다, 센쥬!" 그래, 난 센쥬였어. 지금도 반은 센쥬야. 필요하다면 내가 기꺼이 악당 역할을 해 줄게. 이놈도, 저놈도, 다 내가 만만해 보이지? 어디 돌 같은 파워를 지닌 내 눈덩이를 막아 봐라! 퍽─. 퍽─. "가, 강하다…!" "반격하자…! 무찔러라…!" 이판사판이다. 타지마 님께서 아시게 되면 눈싸움을 좀 과격하게 했을 뿐이라고 둘러대지 뭐. 놈들도 딱히 없는 얘기를 만들어서 나를 모함하지는 않고 딱 저들이 당한 만큼만 일러바친다. 사람을 괴롭히는 게 취미인 주제에 이상하리만큼 정직하달까, 아무튼 구제불능까지는 아니다. 아직 철부지라 생각이 없을 뿐. "!" 이럴 수가. 어째서 돌아본 거지. 익숙한 목소리에 이름을 불리는 순간 방심했다. 놈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 이러다 크게 한방─ 퍽─!!! "……." 중심을 잃는 순간, 잿빛의 겨울 하늘이 시야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관자놀이에 눈덩이를 맞아 그대로 고꾸라졌다. 눈에 반쯤 파묻혀서 등 뒤로부터 한기가 전해져 왔다. 차가운 눈이 옷 안까지 들어왔지만 나는 멍하니 하늘만 쳐다봤다. 아아, 언제부터인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엄마……. 보고 싶어… 엄마……. 머리도 아프고 가슴도 아파서 눈물이 핑 돌았다.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엄마 생각이 나다니. 놈들이 내 우는 얼굴을 보기라도 했다간 끝장이다. 그랬다간 내가 자존심 상해서 못 산다. ", 정신차려 봐!" 에이 씨,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갑자기 거기서 왜 나타나냐고. 거기서 이름을 불리지만 않았어도 저 놈들이 던진 눈덩이쯤은 재빨리 피했을 텐데, 아니… 그보다는 괜시리 울컥하지 않았을 텐데. "센쥬가 쓰러졌다! 없애라!" "마구 던져! 완전히 끝내 버려!" 무언가 내 시야에서 반짝거렸다. 눈의 요정인가 했더니, 문득 그것이 내게 얄궂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하는 듯했다. '땡~ 틀렸습니다~ 저는 눈덩이입니다~'라고… 차례로 날아와서 온몸을 때려댔다. 퍽퍽. 퍽퍽퍽. 이즈나가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너희들 그만둬! 여럿이서 비겁하잖아." "이건 전쟁이야. 전쟁에 비겁한 게 어딨어?" "아버지께서 아시면 너희에게 실망하실 거야." "비켜, 이즈나. 안 그럼 너한테도 던진다?" "마음대로 해 봐. 대신 나중에 후회하지 마!" 비켜, 자식아.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게 쎈 척하기는. 이참에 화풀이하게 냅둬. 어쩌면 쟤네 부모님이, 형제가, 센쥬에게 죽었을지도 모르잖아. 나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어쨌든 누군가는 돌을 맞아야 돼. 눈덩이로 봐준다면 땡큐지. 녀석들의 분이 풀린다면, 그래서 다음 세대라도 전쟁을 끝낼 수 있다면… 뭔들 못하겠어? 내가, 지금 이 정도도 참지 못하면, 나중에는 가슴에 화살이 박히는 고통을 느끼게 될 거야. 내 소중한 사람들이 전쟁 때문에 죽어 나간다고. "쳇!" 처음에는 개구쟁이들의 장난으로 시작했다가 어느새 진짜 전쟁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한 사내놈이 홱 하고 내팽개친 마지막 눈덩이를 이즈나가 막아 줬다. 내 약혼자라지만 그동안 무시하기 일쑤였는데, 다시 봤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대범하고, 적을 끌어안을 줄 알고… 약혼자로서도 듬직한 녀석이다. 보기 보다는. "녀석이 뭐길래 네가 보호하는 거야?" "는… 그녀는…" 방금 전에는 녀석이 무심코 우리 관계를 밝혀 버리는 게 아닌가 하고 조마조마했었다. 과연 거기까지 날 놀래키는 일은 없었─ "그녀는 우리 집안 여자야!" "하?" "하아?" "……." "거, 거짓말하지 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정말이야, 아버지께서는 이미 그녀를 며느리로 생각하고 계셔. 너희들 전부 잘 들어, 를 괴롭히는 건 수장님의 가족을 괴롭히는 거야. 그러니까 그건, 그건… 바, 반역이야! 목이 잘린다고!" 아무리 뭐래도 괴롭히는 것 정도로 참수까지야… ─벌떡 일어나서 이즈나의 입을 틀어 막아야 하는데, 어이가 없달까, 귀엽달까, 아무튼 웃음을 참느라 결정적인 타이밍을 놓쳤다. "그럼… 그 녀석이… 이즈나 너의… 약혼녀야…?" "어… 어…? 그, 그건… 으음…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야…" 아니, 약혼자 선생님요. 마무리가 허술하잖아요. 참말로다가 미운데 미워할 수가 없네. 나는 눈덩이 폭격을 맞은 탓에 거의 이글루 같은 형상이 되어 있었다. 이즈나가 다급히 눈을 치웠다. 어두웠던 시야가 밝아지며 나 때문에 얼어붙은 녀석의 손이 뺨을 감싸왔다. 천천히 눈을 떠 보니 어느덧 눈발이 거세졌다. 아까는 찔끔찔끔 내려서 답답했는데, 보기만 해도 속이 시원했다. 하하하하. "야, 야… 쟤 왜 웃는 거야…?" "나도 몰라… 그냥 냅두고 가자…" 터덜터덜. 풀 죽은 사내놈들이 멀어져 간다. 푸하하하. 아하하하하핫. 인생 참 재밌단 말야. "쟤가 진짜 수장님 며느리야…?" "그런 거 같아… 벌써 약혼했나 봐…" "어떤 의미로는… 진짜 '우치하'였네……." "앞으로 센쥬라고 하지 말아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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