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급닌자가 된 후 처음으로 카카시의 소대에 배치되어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급 닌자 시절 이후로 처음이다. 최근 임무를 나설 때면 언제나 어깨가 무거웠기에 오랜만에 짐을 내려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좋았지만 카카시 앞에서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다행히 임무는 별탈 없이 무사히 마쳤고, 아직 사후처리가 남아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팀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카카시와 나는 츠나데 님께 보고를 하기 위해 마을로 복귀하던 중 비를 만나 숲속의 동굴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쏴아아아아───.

  "이렇게 거센 비는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임무를 떠나기 전에 늘 날씨변화를 체크하고 나오는데도 지금처럼 발이 묶여 버릴 때면 대장으로서 면목이 없어."

  "대장도 사람인데 자연 앞에서는 어쩔 수 없지요. 오늘만은 보고하는 것이 조금 늦어져도 츠나데 님께서 크게 화내지 않으실 거예요. 비를 맞아 감기라도 걸려서 당분간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면 그때야말로 곤란해지잖아요."

  솔직히 혼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무섭긴 한데 딱히 싫은 기분이 든다거나 걱정이 되지는 않는다. 바깥으로부터 들려오는 잔잔한 빗소리, 은은한 모닥불의 조명이 예민해져 있던 기분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마을 밖에도 숙박시설이라든지 휴게시설이 많이 생겨서 불편함이 거의 없지요."

  오늘은 정말 갑자기 쏟아져 내려서 경황이 없었는데, 덕분에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랐다. 이 동굴은 과거에 나와 동료들이 흩어지게 되었을 때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던 집합 장소였다. 그리고 임무를 수행하다 비를 만났을 때, 야영을 하거나 쉴 곳이 필요할 때도, 지금처럼 모닥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전쟁이 끝난 뒤 닌자의 마음가짐도 흐릿해져서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은 옛말일 뿐이야. 앞으로는 더 편한 것만 찾겠지."

  나와 카카시는 전쟁의 시기를 겪었기 때문에 평화를 되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닌자로서의 마음가짐을 가슴 깊이 새겨 두고 있다. 시간이 흘러 흐릿해진 것이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솔직히 나도 쉴 때는 편한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 더 좋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따뜻한 방과 푹신한 이불이겠지.

  "동굴과 모닥불도 나름 운치 있잖아요. 요즘 아이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일까요?"

  "우리도 아직 그렇게 늙지 않았어. 너나 나나 요즘 애들이 생각하는 건 비슷할 거야."

  "역시 그러려나요. 하하하."

  무릎을 끌어안고 살며시 턱을 괸 채 모닥불로 시선을 되돌린다. 불을 쬐고 있기 때문인지 뺨이 뜨겁다. 깨닫고 보면 가슴도 두근거리는 것 같다. 아까는 어린 시절 동료들과 도시락을 나눠 먹었던 기억이 났는데, 이번에는 뭘까. 어떤 추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걸까. 시선을 옆으로 옮기자 카카시의 얼굴이 보인다. 빗물에 젖은 익숙한 샴푸 냄새도 난다. 아아, 그때구나.

  그동안 내게는 별로 좋은 기억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개의치 않고 다시 떠올릴 수 있다.

  "카카시."

  "응?"

  이따금씩 기회를 엿봐서 내가 말을 놓으면 카카시는 그것을 나름 애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갑자기 편하게 불려도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 준다.

  "좀 더 가까이 가서 앉아도 돼?"

  "아니, 적당히 거리를 두는 편이 좋아."

  "왜?"

  "어둡고 침침한데다 우리 둘밖에 없잖아. 가까이 있으면 엉큼한 생각이 들기 시작해서 제대로 쉴 수 없을 거야."

  닌자로서 완벽해 보이는 카카시도 알고 보면 꽤나 욕구에 충실하구나. 임무를 수행하는 내내 믿고 따랐던 대장에게는 어울리지 않지만… 푸훗, 그런 모습에 실망은커녕 이제야 조금은 사람답고 귀엽게 느껴진다. 아까부터 좀처럼 이쪽을 쳐다보지 않는다 했더니, 피곤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었구나. 어휴, 늑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며 속으로 야유를 보내면서도 부드러운 미소가 입가에서 떠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나도 그닥 다를 게 없다. 뜨거워진 뺨과 두근거리는 가슴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혹시 카카시도 그때의 기억을 회상하고 있는 걸까.

  조용히 일어나 카카시의 옆으로 자리를 옮긴다. 더할나위 없이 바짝 붙어서 팔짱을 끼며, 조금 교활하지만 일부러 가슴이 닿도록 했다. 정말 그런 것이라면, 기왕 이렇게 된 것 좀 더 선명하게, 카카시가 나와 같은 기억을 떠올렸으면, 같은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다.

  "저기, 방금 내 말 못 들었어?"

  "들었어."

  팔에 약간 힘을 주자 가슴의 포근한 느낌이 전해져서, 움찔, 카카시가 반대쪽으로 고개를 홱 돌린다. 참으려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만 미래의 호카게라 불리는 뛰어난 닌자에게도 괴로운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지금 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 지금 난 너의 손이 스치기만 해도…"

  "괜찮아."

  "아니, 농담이 아니라… 부탁이니까 지금은 장난치지 말아줘."

  "괜찮다니까."

  천천히, 카카시의 뺨을 감싸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게 한다. 잠시 서로의 눈을 응시한다. 동요하는 눈동자가 망설이고 있지만 그 뒤에는 분명 뚜렷하게 욕망이 숨겨져 있다. 모닥불을 쬐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좀 더 따뜻함을 느끼고 싶다.

  두 사람의 마음이 같음을 느끼는 순간 조심스레 마스크를 내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이 포개지고 머잖아 뜨겁게 혀를 얽는다. 허리를 감아오는 팔에 힘이 들어가서 두려움과 쾌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리고 보다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점점, 어린 시절의 자신과 동화되어 간다.

  쏴아아아───.

  '젠장, 나뭇잎 녀석들, 우리를 뭘로 보고 이런 꼬맹이 녀석을 보낸 거야?'

  '꼬맹이를 괴롭히는 취미는 없지만, 이 정도는 해 주지 않으면 경고가 되지 않겠지.'

  '언제나, 언제나, 약소국이라 무시를 하는군. 우리들을 우습게 본 것을 후회하게 해 주자고.'

  '망할 히루젠, 네가 그렇게 아끼는 주민, 부하, 꼬맹이가 어떤 짓을 당하며 죽어갔는지 똑똑히 봐라.'

  비가 혹독하게 내리던 날, 혼자서 임무를 떠났던 나는 그곳에서 죽음을 직감했다. 몇 번째인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죽음이란 닌자이면서 어리고 약했던 내게 수도 없이 위협을 가했다. 반복되는 위협 속에 지쳐버린 나는 살고 싶었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걸 포기한 채 편하게 쉬고 싶었다.

  피곤하다. 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 움직일 수 없다. 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 남자들이 내게 얼마나 더 아픈 고통을 주려는 걸까. 차라리 지금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는 편이 나을까. 그렇게 해도 시간이 꽤 걸리겠지.

  금방이라도 의식을 잃을 것 같은 상황에서 나는 제법 많은 생각을 했다. 목적은 다름 아닌 죽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 나를 도와주러 오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오비토, 린,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다른 편에는 익숙하지만 미운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도, …라면, 만약 그 녀석이 여기 있다면, 분명 나를 구해줄 수 있을 텐데. 안심하고 잠들어도 괜찮을 텐데.

  낯설고 차가운 손이 순결한 몸을 멋대로 만지고 더럽혀도 내게는 저항할 힘이 없었다. 오히려 조금 편안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강력한 최음제를 삼켜버리는 바람에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하늘, 땅, 나무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시야가 뒤죽박죽으로 뒤엉켜 있었다. 위태로이 떨리는 몸을 움직여 저항해 봐도 나를 향한 거침없는 손길은 막을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혀를 깨무는 것조차, 생각을 이어나가는 것조차, 더는 무리였다.

  그 순간 어째서인지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내 이름은 . 17살. 남친 있음. 당연한 거지만 아직 처녀. 임무 수행 중에 바보같이 방심을 해서 적에게 붙잡힘. 이유를 전혀 모르겠지만 이제 곧 순결을 잃을 듯함. 그리고, 그리고… 안 오는 건가. 올 수 있을 리가 없겠지. 끝까지 얄미운 녀석.

  나는 자신이 생각보다 쉽게 목숨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네가 그럼 그렇지. 처음부터 이 정도밖에 안 되었던 거지. 닌자가 될 그릇이 못 됐던 거야. 그리고 모든 걸 체념하며 눈을 감았다. 어차피 죽을 건데, 저항해 봤자, 괜히 아프기만 하겠지. 빨리 죽었으면 좋겠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오비토 보고 싶다. 내 처음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었어. 오비토, 가이, 아니면─.

  ─────.

  의식이 희미하게나마 돌아왔을 때, 나는 멀지 않은 곳에서, 아니 바로 근처에서, 죽음의 소리를 들었다. 푸슉, 푸슉, 쏴아아 하고. 살갗이 베이고 잘리며 쏟아지는 비처럼 피가 마구 솟구쳐서 내 등과 머리까지 뜨겁게 적셨다. 그러다 갑자기 무거운 정적이 맴돌았고, 누군가 내게 다가왔다. 나를 안아올릴 때, 손이 스칠 때, 믿을 수 없을 만큼 몸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때까지 한 번도 내본 적 없었던 야릇한 음성이 입밖으로 새어나갔다. 머리에 후드를 뒤집어 쓰고 얼굴에는 동물의 탈을 쓴 암부가 나를 안은 채 나무 위로 뛰어 올라 근처의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동굴의 딱딱한 바닥에 등이 닿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저녁이었다. 의식을 잃기 전보다 더 뜨겁게 달아올라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익숙한 동굴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기 있으면 동료들이 날 찾아와 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니 안도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대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최음제를 먹은 정도로 죽지는 않지만 그것은 난생 처음 겪는 괴로움이었다. 무언가 강력하게 내 몸속에서 꿈틀대며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뱃속에 징그러운 것들이 득실대는 것처럼 울렁거리고, 간지럽고, 뭐라도 넣어서 전부 꺼내버리고 싶었다. 아아, 그래, 뭔가 내 안으로 들어 왔으면 좋겠어. 빨리, 빨리─.

  '하아… 하아…'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무언가 손톱 같은 것의 감촉이 느껴졌다. 비에 젖은 검은색 장갑이 내 뺨을 감싸고 있었다. 손가락 다섯 마디의 끝은 모두 날카롭고 예리했다. 어둠속에 발톱을 감추고 적을 노리는 그림자, 나뭇잎에서 그것을 상징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암부…?'

  '그래, 동료야.'

  주변이 완전히 조용해질 때까지는 여기 있어야 해. 낯선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암부는 냇가에서 받아온 듯한 차가운 물을 내게 마시게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아까 녀석들이 너에게 약을 먹였지. 그건 단순한 최음제가 아니야. 먹으면 천천히 중독되어서 다음 날 죽게 돼. 마치 자연사한 것처럼. 화류가에나 돌아다니는 더러운 것을 적에게 쓰다니, 저급한 놈들… 다행히 그중에 하나가 해독제를 가지고 있어서 너에게 먹였어. 멋대로 입맞춰서 미안. 달리 방법이 없었으니까 이해해.'

  암부는 무섭다. 그들과 얘기를 나눠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차가운 암살자의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었다. 때로는 동료도 가차없이 살해하는 냉혈인간. 나는 그런 암부의 품에 안겨 있었다. 위화감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뭐 이런 상냥한 암부가 다 있어. 남친보다 더 다정하잖아. 덕분에 그 와중에 때아닌 당혹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차분한 말투나 분위기에서는 분명하게 냉정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두렵지 않다거나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냇가에 가서 차가운 물 받아올게.'

  나는 일어나려는 암부의 옷자락을 꽉 붙잡고 놓지 않았다. 붉게 얼룩진 하얀 후드에서 비릿한 피냄새가 풍겼다. 고양인지 여우인지 모를 동물의 탈도 왠지 살벌했다. 그렇지만 눈물이 뿌옇게 시야를 가릴 정도로 내 상황은 절박했다.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몸이 다 녹아내려 사라질 것만 같았다.

  '얼마나 괴로운지 알아. 약물 대처 훈련 때 나도 먹어 봤거든. 그렇게 지독하게 훈련받았던 나도 힘들었는데 넌 어떻겠어. 지금부터 네가 내뱉는 말들은 뭐가 되었든지 간에 전부 너의 진심이 아니야. 그냥 더러운 것이 네 몸을 차지해서 너를 멋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때가 되면 빠져나갈 테니까 안심하고. 알겠지?'

  거참 누구 남자인지 억수로 부럽네! 가이 이 자식, 너도 좀 배워라! 정말 뭐야 이 자상함! 뭐냐고 이 달달함은! 이런 성격으로도 사람을 벨 수 있는 거냐! 아니, 뭐, 역시 조금은 무서운 것 같기도 한데… 아아… 뭐가 어쨌든 한계였다. 뺨을 쓰다듬는 작은 손길에도 발끝에서부터 짜릿한 것이 확 올라왔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의 전부가 달달한 독극물에 중독되어 미쳐버린 것처럼 모든 감각이 마비되고, 왜곡되고, 한 마디로 정신이 아찔했다. 문득 눈 앞의 암부도 혹시 환상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렇다면 상관없지 않나, 안겨도 되지 않나, 내 안의 '더러운 것'이 제멋대로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이제… 아무래도 좋아… 안아줘… 제발…….'

  '…….'

  암부는 조금 전에 들고 나가려던 물통을 옆에 내려두고 나를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그의 어깨에 기대자 피 냄새가 더욱 짙게, 코를 찔렀다. 그렇지만 딱히 싫지 않았고, 오히려 피에 대한 공포가 무의식중에 깨어나면서 묘한 쾌감을 불러 일으켰다. 평소 두려움에 의해 억눌려져 있던 것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서 제 세상을 만난 듯 날뛰고 있었다. 잠깐이면 돼. 금방 편안해져. 오히려 기분 좋을 거야. 악마가 내게 속삭였다.

  반면에 나를 안아준 암부는 천사 같았지만 오히려 그 다정함이 괴로워서 얄미웠다. 여자가 이렇게까지 유혹하면 지금쯤 이성을 잃고 넘어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쩐지 누구랑 비슷한 게, 마구 때려주고 싶었다. 아니, 때렸다. 왜 안 넘어오냐는 듯이 앙탈 아닌 앙탈을 부리며 가슴팍을 퍽퍽 때렸다. 그러자 잠시 말이 없던 암부가 내 손을 가볍게 저지하며 입을 열었다.

  '저기… 이런 말… 듣기 거북하겠지만… 혼자 하는 법을 알고 있으면… 조금은 편해질 수…'

  '몰라… 혼자 하는 법 몰라…….'

  나는 거의 통곡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긴데 그때는 정말 심각하게, 이대로 죽는구나, 녹아서 없어지는구나, 진작에 야한 것 좀 알아둘걸, 아직 미성년자이지만 어른들 몰래 볼걸, 하다못해 산부인과 의학 책이라도 들여다볼걸,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다. 거기서 유일하게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암부가 도망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놓지 않았던 것은 내 삶을 통틀어 최고의 진상짓이었다. 왜 나를 안아주지 않는 거지. 내가 못생겼나. 그새 살이 쪘나. 흐어어엉.

  '나를… 남자친구라고 생각할 수 있겠어?'

  뚝. 신기하게 울음을 멈춘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필사적으로 남자친구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바가지 머리, 송충이 눈썹, 초록색, 초록색… 초록… 아, 뭐야 이건, 초록색 괴물이냐. 어째서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 거냐며 자신을 책망하고 다시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삼키고 있노라면, 드디어 결심한 듯 암부가 살벌하게 생긴 검은 장갑을 조용히 벗었다. 이윽고 따뜻한 손이 머리를 감싸오며 나를 그의 어깨로 이끌었다. 후드가 달린 하얀 옷에 얼굴을 묻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친구… 생각했지?'

  암부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나서 내 다리를 조금 벌렸다. 그야말로 애인을 대하는 것처럼, 아니, 그것은 애인의 손길보다 더 상냥했다. 솔직히 가이의 손이 닿을 때는 힘조절이 잘 되지 않아서 아플 때가 많았는데, 그에 비해 애인도 뭣도 아닌 암부의 손은 한없이 부드럽고, 섬세하고, 무엇보다 나에 대한 배려가 느껴졌다.

  '앗… 느낌이 이상해…….'

  '응, 그건, 하품 같은 생리적 반응이야. 딱히 부끄러운 게 아니니까 참지 말고 밖으로 내버려.'

  하품과는 전혀 달라. 뭔가 찌릿찌릿 자꾸 올라와서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단 말야. 그렇게 따질 겨를도 없이 절정이 왔다.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이성과의 특별한 접촉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강력했다. 물론 이전에도 손을 잡거나 안거나 한 적은 있었지만, 그렇게 큰 자극은 말 그대로 처음이라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었다.

  '어때? 좀 나아졌어?'

  나는 전신에 잔류하고 있는 쾌감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나아지긴커녕, 그 정도로 날 얌전히 만들 수 있겠냐는 듯 내 안의 더러운 것이 코웃음을 쳤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지독했지만 쾌감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나니 오히려 더 참을 수가 없었다. 한 번의 절정으로 그때까지 갈 곳 몰라 헤매이던 괴로움의 목적지가 뚜렷하게 정해진 셈이었다. 아무리 방향을 돌리려 해도 내 몸은 오로지 쾌감, 쾌감만을 쫓고 있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무언가 이상한 것이 닿고 있는 듯한… 이전과는 사뭇 다른, 무언가 훨씬 두렵고 아찔한 것이었다. 산부인과 쪽은 잘 몰라도 인체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는 17살 의료닌자에게 그것은 크게 어렵지 않은 문제였다.

  '아, 이건… 이것도 하품 같은 거야…….'

  암부는 무섭다. 그렇지만 다정한 암부도 있다.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 어린 상태로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모든 게 약 때문이라며 암부는 나를 위로하듯 자신을 위로했다.

  '이거 때문에 겁먹을 거 없어. 나는 나쁜 녀석이 아니니까…'

  아니, 지금 다시 생각하면 겁이 났을 법도 한데. 당시의 내게 어디서 그런 대담함이 나왔던 것인지, 나는 고양인지 여우인지 모를 동물 탈에 입을 맞추었다. 어느 때 보다 가까워지는 순간 암부의 몸이 움찔 떨리는 것 같았다. 당황하는 모습에 그나마 남아 있던 살벌함도 사라지고, 두려워 망설이던 몸도 더는 거리낌이 없었다.

  '실은 나도 나쁜 녀석이야… 그러니까 그런… 귀여운 짓 하면 안 돼…….'

  나쁜 녀석이었다면 그런 상태가 되기 전에 먼저 덮치지 않았을까. 애당초 내가 진짜 나쁜 녀석들에게 당할 뻔했을 때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뭇잎의 암부가 동료를 구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어쨌든 나를 구해준 사람이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얄미운 게, 생명의 은인인데 어쩐지 원수 같기도 하고, 그런 부분이 황당하면서도 은근히 재밌게 느껴졌다.

  '애인이 아니지만… 나… 당신이라면 괜찮아…….'

  어쩌면 그것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거짓말이었는지도, 애인이 아닌 사람에게 안기고 싶어하는 자신에 대한 변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것이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애당초 가이에 대한 마음은 함께 있으면 즐겁다는 아주 순수한 것이었고, 남자에게 '성'적으로 가슴이 뛰기 시작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암부지만 낯설지 않고, 편안하지만 긴장이 되고, 무언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거부하기 힘든 이끌림이 느껴졌다. 어른이 된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쾌감보다 훨씬 두려운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내 가슴에 짙은 여운을 남기고 있으니까.

  '당신… 이름이 뭐야…?'

  '알려줄 수 없어… 그리고 난 너를 안을 수 없어… 너는 약의 효과가 사라지면 오늘의 일을 후회하고, 잊으려고 하겠지만… 나는 못해… 왜냐면…'

  나는 그의 대답을 좀 더 기다리다 참지 못하고 스스로 움직였다. 기력이 다 빠진 상태로도 계속 쾌감을 원하는 자신에게 새삼 경악하며, 그래도 견딜 수가 없어서, 몸의 방향을 돌려 정면으로 마주했다. 정면이라기보다는 두 팔로 암부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에게 자신을 완전히 맡겼다.

  '왜냐면… 난… 널…….'

  그렇게라도 말했다면 좋았을 텐데. 용기 없는 우리 암부 씨는 괴로운 듯 말끝을 흐렸다가 조용히 나를 마주안았다. 피 묻은 옷만 보면 냉정한 암살자 그대로였지만 속은 나와 다름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 약하고, 수줍음이 많은, 귀여운 남자였다.

  '말 안 해도 돼… 내가 꼭 알아낼 거야… 당신 이름… 그리고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뭔지…….'

  '…….'

  잘못 들었던 것일까. 아니, 분명히 그는 말했다.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해'라고. 귓가에서 짧은 한 마디가 들려옴과 동시에 나는 암부에게 매달린 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마치 나처럼 약에 취해버린 듯 그의 손이 거침없이 나를 범해왔다. 옷을 풀어헤치고, 만지고, 동물 탈 때문에 키스는 할 수 없었지만 그밖에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자신의 입으로 어떤 소리가 새어나가는지도 몰랐다. 정신 없이 끌려간 탓에 지금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여러 가지 의미로 내게는 첫경험이었으니까.

  '나… 당신이… 처음…….'

  '나도 네가 처음이야… 시작은 훨씬 먼저 했지만…….'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안심하는 것도 잠시, 나는 머잖아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진땀을 흘렸다. 약 때문에 이미 달아올라 있었으니 무리없이 이어질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전혀 뜸을 들이지 않고 들어와서 마음의 준비를 할 틈이 없었다. 아픔은 말할 것도 없고 갑자기 하나가 되어서 몸서리치게 두려웠지만 어쩐지 기쁘고,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슬픔의 그것과는 의미가 달랐다. 줄곧 그리웠던, 필요했던, 처음부터 나의 것이었던 무언가를 비로소 되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하아… 하아…….'

  거칠어진 숨결, 기분 좋은 듯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 자신의 쾌감과는 상관없이 기뻤다. 그가 나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면 감사함마저 느껴져서 눈물이 더욱 뜨거워졌다. 애인이 아니라든지,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라든지, 그런 것은 생각보다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절정을 느낀 뒤 서로에게 기대어 쉴 때 다시 한 번 느꼈다. 내게 마치 애인처럼 다정했던 암부, 그는 관계중 몇 번이나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아아, 그의 상냥한 부름에 깨달았다. 언제나 머리로는 외면하면서 가슴으로는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사람.

  '미안… … 역시 나는… 너를… 포기할 수가…….'

  당신이 먼저 시작했다고 멋대로 결정짓지 마. 어쩌면 우리는 같은 순간 시작했는지도 몰라. 그동안 줄곧 부정해왔지만 실은 나도, 처음에, 옆집에 이사온 애가 정말 마음에 들었거든. 그리고 조금 후에,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남자 천사를 보고 첫눈에 반했거든. 아니, 누구라도 반하겠지 그런 얼굴은. 근데 왜 가리고 다녀 바보야. 지금은 어쩔 수 없다지만 앞으로는 조금 대담해져 봐. 그래야 나도 지금까지의 일은 전부 잊어버리고 너한테─.

  '아… 아아…!'

  '윽…….'

  사람의 처음을 그렇게 가져가 놓고 말이야.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 솔직히 좀 기대했는데. 당신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소처럼 도도한 표정을 하고 슥 지나가 버렸지. 그건 뭐였어? 뭐였냐고? 솔직하게 '실은 그거 저였습니다'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때처럼 다정한 말투로 얘기해줄 수는 있잖아. 그럼 나도, 그렇게 오랫동안, 괜히 고집부리지 않고 솔직하게 당신한테 안길 수 있었잖아.

  '뱃속이 뜨거워… 있잖아… 이것도 하품 같은 거야…?'

  '아니… 솔직히 그건 내가 저지른 거야…….'

  잠깐, 컷. 여기까지 회상 종료. 이런데 내가 어떻게 이 양반을 얄밉게 보지 않을 수 있겠냐고요! 아우우 지금 생각해도 열받네. 정말 사랑하지만 한 대 콱 쥐어박고 싶다. 딱 거기까지만 떠올렸으면 괜찮았을 텐데, 암울한 뒷이야기까지 줄줄이 기억나는 바람에.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예전에 만났던 나쁜 녀석 생각이요."

  왜 그렇게 나를 미워했냐고 물었지. 입장 바꿔 생각해 봐 인간아. 그때 나는 내가 당신한테 완전히 놀아났다고 생각했어. 내게 진심인 줄 알았는데, 당신의 행동이 아니라고 하니까, 여전히 멀리,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으니까,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 두 사람은 거기까지였다고,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제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단 말야.

  "혹시… 너… 알고 있었어…?"

  "말했잖아요, 당신 이름 꼭 알아낼 거라고. 하타케 카카시."

  솔직히 그때 카카시가 무의식중에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끝까지 몰랐을 것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가깝지 않았으니까, 더욱이 이상한 약에 중독되어 있었으니까, 동물 탈로 얼굴이 가려진 채 말투와 억양까지 교묘하게 바뀐 그를 알아보기란 어려웠다. 아마 카카시도 같은 생각이었겠지. 지금이라면 알 수 있다. 내가 사실을 알게 되면 더 미움받을 것 같으니까, 겁이 나니까, 말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못했던 거다.

  "그때 못했던 말은 '왜냐면 난 널 좋아하니까'였겠지요."

  지금의 나처럼 예전의 나도 알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돌이켜보면 나도 이 사람 못지 않게 겁쟁이였다. 언제나 냉정하고, 도도하고, 어쨌든 굉장한 사람이니까, 내게 뭐라 말해도 속으로는 '한심하네' 혹은 '멍청이'라고 나를 비웃을 거라 생각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마음이 점점 검게 물들어서 '나를 가지고 놀았구나'까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럼… 그동안 네가 나를 미워했던 이유가……."

  카카시가 손을 이마로 가져가며 실소를 터뜨린다. 그의 허탈한 웃음에 나까지 기운이 빠지는 것 같다. 미움받기 싫어서 숨겼던 건데, 도리어 그것 때문에 제대로 미움 받았으니. 카카시의 억울함도 나보다 더했음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전부 이해가 되네… 그래놓고 다시 손대기 시작했을 때는 내가 얼마나 쓰레기처럼 보였을까… 상사니까 더 그렇게 느껴졌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도는가 보다. 소매로 닦으며 킁- 하고 처량한 소리를 내더니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그는 그대로 마음 고생했을 것을 생각하니 가엾고,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서로의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지금의 내게는 카카시의 어떤 모습도 귀엽고 사랑스럽다. 모두에게 마을의 영예라 불리는 완벽한 남자가 내 앞에서만은 이따금씩 겁쟁이가 되고, 헛똑똑이가 되질 않는가. 거기에 솔직함까지 더해져서 지금은 더 좋은 것 같다.

  "카카시."

  "……."

  "카스테라."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부끄럽단 말야……."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볼을 살짝 꼬집으니 싫은 듯 찡그리면서도 얼굴을 붉힌다. 달달한 과자 같은 나의 연인. 지금 내 눈에는 부정할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겠지. 어느새 다시 올리고 있었던 마스크를 내려 그에게 입을 맞춘다. 그때와 같은 일은 차마 할 수 없지만 그때 못했던 일은,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부드러운 키스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

  "엘리트 닌자도 여자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 보네요. 후후후."

  "엘리트가 아니라 호카게 님이라도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럼 당신이 호카게가 됐다 치고, 만약 내가 '자기야~ 나 특급승진 시켜줘~♡' 하고 부탁하면 어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받아줄 거예요?"

  "좋아하니까 마음이 약해지긴 하겠지만 안 받아줄 거야. 봉급이 부족하면 차라리 나한테 삥을 뜯고, 말단이라고 괴롭히는 놈들 있으면 일러바쳐. 그때는 내가 나서서 확실하게 혼내줄게."

  과연 내 남자다운 대답이다. 멋대로 정한 것이긴 하지만 카카시라면 호카게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은 농담처럼 얘기해도 언젠가는, 지금과 같이 둘이서 마음 편히 웃고 떠들 수만은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조금 두렵고, 불안하고, 그렇지만 기대가 되기도 한다. 지금보다 10배 20배 더 멋있어지면 어떡하지. 나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야 되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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