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말해."

 "뭘 말입니까?"

 "어제 했던 말, 여기서 다시 한 번 말하라고."

 어제도 그러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계속 반복되고 있다. 하타케 상닌이 갑자기 퐁- 하고 나타나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상황이.

 "여기서는 무리입니다."

 "사람들이 없는 곳이면 되겠어? 자, 가자."

 "지금 근무 중인 거 안 보이십니까."

 가지 않겠다고 버티자 그가 두 손을 꼭 쥐고서 나를 노려본다.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다. 이런 곳에서 대뜸 여자의 팔을 붙잡고 어딘가로 끌고가는 것 자체가 지나가는 이들의 눈에는 이상해보일 것이기 때문에.

 "말해."

 "싫습니다."

 도대체 그가 내게 무엇을 말하라고 하는 것인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발단은 어제 그의 품에 안기면서 내가 그에게 했던 한 마디 말 때문이다.

 "좋아해요……."

 "어, 어째서 그런 말을 지금… 이런 순간에 하는 거야?"

 "지금이니까 하는 거예요."

 "……."

 그때는 둘 다 그다지 여유가 없어서 그냥 그렇게 넘어갔지만, 열기가 식은 뒤부터 그의 불평이 시작됐다. 오늘은 어째 어제보더 더 끈질기다. 쉬는 날인 줄 알았더니 날이 저물고나서 나타나지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임무에 나간 모양이다.

 "그럼 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네, 수고했어요. 씨."

 평소보다 일이 늦게 끝나, 피곤한 몸으로 서둘러 퇴근 수속을 밟고 집으로 향한다. 닌자의 습관인지 뭔지 이렇게 캄캄한 길을 걷고 있으면 괜스레 신경이 곤두서고 몸에 긴장감이 맴돈다. 마치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덥석-.

 "?!"

 홱-. 갑자기 어둠 속에서 손이 뻗어나와 나를 잡아당기는가 하면, 내 입을 틀어막고 목에 수리검을 들이댄다.

 "소리 내면 죽인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고, 손이 뻗어나온 어둠 속으로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며 끌려간다. 언제부터 나를 지켜보고 있던 걸까. 목적이 뭔진 몰라도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 완벽하게 기척을 숨기는 것은 보통이 아니다. 아마도 상급 닌자, 실력으로는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늦은 밤이라고 해도 길 한복판에서 납치라니. 거기서 붙잡혀 꼼짝없이 끌려온 나도 나지만, 이 사람이 하는 짓도 대담하기 그지 없다. 워낙 빠르기도 했지만 길이 어두워서 자신이 어디로 끌려왔는지 모르겠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집인 듯한데, 주변에서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그 만큼 외진 곳일 가능성이 크다. 이래서야 소리를 내서 도움을 청할 수도 없다.

 "당신은 누구죠?"

 "알 필요 없다."

 두 손은 포박된 상태. 그가 내게 천천히 다가오고, 나는 아직 자유로운 다리로 뒷걸음질을 친다. 나보다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말이지 빈틈이 없다. 여기서 서툴게 발차기 따위를 했다간 도리어 붙잡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속으로 고민하는 사이 그가 나를 붙잡고, 벽으로 밀치고, 저항할 새도 없이 내게 빠르게 밀착해온다.

 핥짝-. 그가 내 목을 핥는다. 그의 손이 옷 속을 침범해 들어온다. 나를 범하고 있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다. 얼른 도망치지 않으면. 무섭지만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가뜩이나 딱딱하게 굳어 버린 몸에 힘으로 제압을 당하니 더 이상 사고가 진전되지 않는다.

 "시… 싫… 그만둬……."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뿐이냐?"

 그럴 리가 없다. 나도 한 사람의 닌자이고, 그 동안 가이처럼 열심히라고는 할 수 없어도 남들이 하는 만큼은 노력해왔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쉽게 포기하는 일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침착하게 고민하면 무언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윽… 하…하아……."

 아니, 이미 늦었다. 그가 내 안으로 들어와 나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범해온다. 여기까지 와서 내게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자신의 감각을 스스로 차단해보아도 그의 숨소리가, 목소리가 들린다. 그의 손길이 느껴진다. 마치 악몽 같은 이 상황이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나를 압박해온다.

 "벌써 포기했나? 도움이라도 청해보지 그래."

 도움을, 누구에게? 고장난 필름처럼 머릿속의 생각이 뚝뚝 끊긴다. 그래도 사고는 끝에 다다르고,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 둘씩 떠오른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의지하는 사람-

 "좋아하는 녀석의 이름이라도 불러라."

 "아……."

 단지 입을 여는 것이 왜 이리도 힘든 건지.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좀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필사적으로 두려움을 억누르고 불러본다. 내가 의지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지금 당장 보고 싶은 사람, 그의 이름을-

 오비토…?

 어째서지. 매일 보고, 매일 생각하는 네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아. 너의 웃음이나 너의 목소리가 기억으로부터 사라진 듯 해. 언제부터 이렇게 멀어진 거지? 모르겠어. 어쩌면 난 더 이상 너를-

 "…케 상닌."

 "?"

 "ㅋ…카시… 도와줘……."

 "……."

 어떻게 된 거지. 눈앞이 캄캄하다. 기절이라도 한 걸까? 아니, 다르다. 희미하지만 빛이 보인다. 주홍빛의 가로등 아래 눈에 익은 사물들이 보인다. 여긴 내가 집으로 돌아갈 때 언제나 지나가는 길이다.

 "."

 "……."

 ", 이제 괜찮아."

 "오비토 군…?"

 "아니잖아, 날 똑바로 봐."

 술에 취한 듯 머리가 어지럽고 기분이 몽롱하다. 누군가 내 앞에 서 있다. 나를 바라보고 있다. 민소매의 옷. 암부? 고개를 들자 암부의 상징과도 같은 동물탈을 이마 위로 올려 드러난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카카시…?"

 "아… 네, 카카시입니다-."

 이젠 내게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그가 새삼스레 얼굴을 붉힌다. 이런 곳에서 뭘하는 거지?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아까는 분명 낯선 남자에게 붙잡혀서 험한 일을-

 "정말이지, 내 이름을 그렇게 간절하게 불러놓고는 어째서 마지막에 오비토로 착각하는 거야?"

 "……."

 내가 남자에게 붙잡혀 끌려갔던 골목길. 아, 이제 알 것 같다. 난 처음부터 줄곧 여기에 있었고, 빈 집에 끌려가거나 거기서 이런 저런 일을 당했던 것은 전부-

 눈물로 흐릿했던 시야가 선명해지며 불빛 아래 하타케 상닌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인다. 정말, 이 사람은. 이름을 불린 정도로 무얼 새삼스레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지. 상황 파악이 되는 순간 가죽을 확 뒤집어 버리고 싶었건만 이래서야 차마 때릴 수도 없지 않은가.

 그래,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오늘은 나도 피곤하니 일단은 그냥 넘어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방향을 돌려 골목을 빠져나가려는데, 하타케 상닌이 뒤에서 내 팔을 덥석 붙잡는다.

 "그냥 가는 거야?"

 "그럼 더 이상 뭘 해야 합니까."

 "이렇게 어두운 밤에 가로등 아래 서 있으면 왠지 야릇한 기분이 들잖아-. 모처럼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으니 키스 정도는-…"

 그렇게 말하며 그가 마스크를 내리고 내게 다가온다. 서로의 마음? 웃기지 마. 냉소가 절로 지어진다.

 쭈욱-. 마스크를 위로 끌어당기자 그의 머리가 뒤로 젖혀진다. 이윽고 마스크를 놓으니, 아야야 하는 신음소리에 이어 착-! 하는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뭐, 뭐하는 거야아……."

 "당신이야말로 뭐하는 겁니까?"

 서로의 마음은 개뿔, 당신은 나한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잖아. 환술을 걸어서 일방적으로 내 마음을 들춰냈을 뿐이잖아. 몸을 섞거나 위험에 처하거나 그런 상황에 처해서야 비로소 진심을 낼 수 있는 내 기분이 어떤지 생각이나 해봤어?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삭히자니 도리어 화가 치밀어오른다. 이름을 불릴 때 마다 기쁜 듯이 웃는 이 사람을 보는 것이 좋았는데, 지금은 그 웃음이 가식적으로 느껴진다. 그에게 멋대로 놀아난 것이 분해서 마음이 비뚤어져 버렸다.

 "선생, 화났어…?"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소리 없는 움직임. 게다가 빠르다. 깨닫고 보면 그가 나를 끌어안고 있다. 힘은 또 얼마나 센지. 정말 여러가지로 분하다.

 "미안, 어떻게든 한 번 더 듣고 싶었어. 진심이었는지, 그냥 분위기에 휩쓸려 한 말인지, 확인하고 싶었어."

 "나는요?"

 "?"

 "그럼 나는요!"

 홱 하니 몸의 방향을 돌려, 두 손으로 그를 거칠게 밀어내며 소리친다. 그가 조금 당황한 듯한 눈빛이다.

 아아,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이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새삼스런 일인데.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이래서야, 당신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싶다, 지금 이 이상을 원한다 대놓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 사람은 왜 여유롭게 웃을 수 있는 거지.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이 복잡한 거지. 분하다. 분해서 견딜 수가 없다.


<제작> Copyright ⓒ 공갈이 All Rights Reserved.
<소스> Copyright ⓒ 카라하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