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게 개인 날.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도 하늘을 올려다 보면 단지 그 푸르름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덧붙여 햇살도 따스하고── 어쩜 이렇게 이사하기 좋은 날을 골랐는지,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연애를 하고 있으면서도 새삼스레 감탄했다.
이제 나의 하루하루는 모든 것이 카카시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만 같다. 아니, 실제로도 분명 그럴 것이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이사 같은 건 생각도 못했는데, 지금 자신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유유히 짐을 옮기고 있다. 새로운 집에 첫발을 딛는 순간 여러 생각을 했다. 앞으로의 계획, 걱정과 기대, 희망─.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니까 이 설렘을 충분히 즐겨 두고 싶다. 두근두근 심장의 고동으로 그 어느 때 보다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낀다. "이게 마지막인가요?" "응, 하지만 지금부터가 진짜 일이지." 짐이 든 상자를 모두 안으로 들여 놓았으니 이제 물건들을 차차 정리해야 한다. 분명 큰일이긴 하지만 상자에 넣을 때부터 워낙 깔끔하게 분류해 둔 터라 크게 손을 덜었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집 살림요정 덕분이다. 새로운 집에는 마당이 있다. 크지는 않지만 두 사람이 쓰기 충분하고 작은 화단도 가꿀 수 있다. 어렸을 적 이후로는 단독주택에 살아본 적이 없어서 그동안 마당 딸린 집에 묘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한 나의 작은 바람까지도 카카시는 섬세하게 헤아려 주었다. 이사하면서 골치아픈 일들을 혼자 깨끗이 처리해 줘서 어찌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의 듬직함에 기대는 것도 앞으로는 조금씩 줄여나가야겠지. 하지만 오늘은 좀 더 응석이 부리고 싶다. "카카시." "응?" 마당 정리를 대충 끝내자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여자인지라 오늘과 같은 날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유치하지만 딱히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단 한 번뿐인 순간이기에 놓치고 싶지 않다. "안아줘." 수줍게 두 팔을 벌리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는 듯 카카시가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오늘 그는 편한 사복차림에 평소처럼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다. 지금은 이렇게 성장해 버렸지만 어쩐지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헤실헤실 웃고 있으니 그가 내게 성큼성큼 다가와 나를 안아 올린다. "조금 무거워진 것 같은데?" "근육이 붙어서 그런 거예요." 절대 살이 찐 것이 아님을 어필하며 그에게 안겨 집안으로 들어왔다. 꼭 그렇게 짓궂은 말을 해야 하나. 괜히 신경쓰이게. 속으로 투덜거리며 새로 장만한 소파에 내려지는 순간, 몸을 일으키려는 카카시의 목을 끌어안았다. "놔 줘." "싫어요?" "밖에 문 열어 놓고 왔어."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모처럼 좋은 분위기가 되었으니까 가기 전에 뽀뽀 정도는 해줘요. 눈빛으로 애원하며 은근히 매달린다. 그 정도로는 부족할까 싶어서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입술도 살짝 내밀어 주었다. "아이고… 하하하. 예전이었다면 이렇게 못했을 텐데. 그새 대담해졌구나." "당신에게 좋은 일 아닌가요?" "그야 물론이지. 예전부터 너는 밝은 성격에 비해 자존감이 낮은 편이어서 걱정이었어. 이제 안심이야." 상냥한 손길로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가 나른하게 웃는다. 말뿐만이 아니라 정말 뿌듯하고 흐뭇하다는 기분이 내게로 전해진다. 그래서 가슴이 두근거린달까─ 분위기 탓인지 마치 처음과도 같은 기분이다. 달달한 침묵속에 서로를 응시한다. 조용히 마스크를 내리는 카카시. 온다, 온다. 두근거림이 절정에 달함과 동시에 눈을 감는다. 그리고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우즈마키 나루토 방문이라니깐~!" 어우 야. 속으로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려 보니 못 본 새 더 훤칠해진 나루토가 신발을 벗어던지며 들어온다. 그 뒤를 이어 사쿠라, 사이, 이노, 시카마루, 쵸지, 키바, 시노, 히나타까지… 현관에서부터 그야말로 제자 대군단이 우르르 밀려온다. 천만다행으로 소파 등받이에 가려져 낯뜨거운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크윽, 한 10초만 늦게 오지 애들아아. "실례합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서들 와." 저 나름대로 준비한 선물을 테이블과 바닥에 내려놓은 뒤 각자 주위를 둘러보며 한 마디 씩 주고받는다. '좋다~', '넓다~', '새집이라 깨끗하네~' 등등. 꼼꼼한 내 남자의 안목으로 고른 집인 만큼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전적으로 믿고 있었기에 그가 집을 고를 때 나는 일말의 참견도 하지 않았다. 계약하기 직전 한 번 슥 둘러보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 (…) 아이들에게 선물받은 여러 종류의 다과를 차와 함께 내어가서 한동안 다같이 웃고 떠들었다. 주방에서 손수 디저트를 만들고 있는 카카시에게 가 보니 본인은 먹지 못하는 달콤한 경단을 동글동글 예쁘게도 만들었다. 저런 손으로 평소에는 닌자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누가 믿을까. 뒷모습이 새댁처럼 고와서 조심스레 다가가 엉덩이를 탁탁 두드려 주었다. "배고프지?" 다정하게 묻고는 카카시가 경단 하나를 내 앞으로 내민다. 냉큼 받아 먹으니 으음,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런데 입가에 살짝 묻었는지 문득 그의 손이 뺨을 감싸온다. 아니, 그게 아니다. 아까 못했던 뽀뽀를──. "카카시 선생님~! 아직 멀었어요~? 다들 기다리고 있다니깐~!" 나루토 이 자식,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네. 하지만 다행이다. 이번에야말로 낯뜨거운 모습을 제대로 보일 뻔했는데, 이쪽은 보지도 않고 다시 거실로 쌩 하니 가 버렸다. 허무함에 고개가 푹 숙여진다. 머리맡에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웃음소리. 그러더니, 갑자기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떨어진다. "피곤하겠지만… 오늘은 기쁜 날이잖아. 그냥 안 재울 테니까 걱정 마." 숨소리처럼 작게 속삭인 뒤 후후후 웃으며 그가 내게서 멀어진다. 그리고는 여전히 웃음기 어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가져가라는 듯 경단이 든 접시를 내민다. 그렇잖아도 설레던 가슴이 한 대 얻어맞은 것마냥 멍- 해졌다. 정말 여러 가지 의미로 짓궂다니까. 그릇을 건네받으며 괜스레 앙탈부리듯 그의 팔을 툭 때린다. 그리고 거실로 돌아가니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 중 몇몇이 기뻐하며 환호성을 지른다. 아마도 녀석들은 카카시의 숨겨진 요리솜씨를 알고 있는 거겠지. (…) 그동안의 경험으로 아이들이 가진 수많은 장점들을 잘 알고 있지만 오늘은 정말 큰 감동을 받았다. 구경하러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이 녀석들, 크흑, 티타임이 끝난 뒤, 누가 말하지 않아도 각자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나 이사의 마무리를 도왔다. 무거운 가구를 옮기는 등 힘이 필요한 일은 남자아이들이, 나에겐 없는 꼼꼼함과 세심함으로 물건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일은 여자아이들이 맡았다. 모두 잘했지만 그중에서 사이와 이노는 미적 센스까지 겸비하고 있어서 어수선했던 새집을 예쁘고 안락하게 만들어 주었다. 서로 의견이 부딪혀 투닥거리기도 하며─ 그 모습이 어째선지 굉장히 다정해 보여서, '혹시…?' 하는 생각도 했다. 뭐라 해도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웃음이 지어진다. "아이들 덕분에 이사가 순식간에 끝났네요." "그러게. 다음에는 먼저 초대를 해야겠어." -라는 것은 아이들에게 보답을 하기 위해서지만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지난 번에 팀을 초대했을 때처럼 진수성찬이 차려지겠지. 솔직히 처음에는 자극적인 것에 길들여진 내게 카카시의 요리는 싱겁고 밋밋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 맛에 완전히 길들여져서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내일도 어쩌면, 무언가 특별한 것을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들 스케줄이 제각각이라 조금 미루어졌지만, 동료와 친구들이 방문하기로 되어 있으니 말이다. 이틀 연속으로 무리하면 과연 카카시라도 힘에 부칠 테니, 될 수 있는 한 나도 주방에서 돕기로 하자. "먼저 씻고 나오세요. 전 다음에…" "굳이 그럴 필요 있어? 같이 들어가자." 뜻밖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해져 있다가,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깨어났다. 서로의 벗은 몸 같은 건 훤히 알고 있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라 새삼 부끄럽고 긴장이 된다. 그러고 보니 전에 살던 집은 욕실이 작아서 샤워 부스에 들어가면 자리가 꽉 차는 느낌이었는데, 새로운 집의 욕실은 그보다 훨씬 넓다. 두 사람이 같이 들어가도 아마 넉넉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카카시가, 혹시, 일부러 욕실이 넓은 집을── 거기까지 생각하니 겉잡을 수 없이 뜨거워져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야 사양할 이유가 없지. 그런데 새삼 걱정이 되기도 한다. 밤의 침대 위에서는 어둡고 경황이 없어서 괜찮았다 쳐도 '그것'과 관계없이 벗은 몸을 보였다가 그동안 몰랐던 치부가 드러난다거나 하면 어쩐다. 혹시라도 내가 모르는 사이 어딘가에 이상한 점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아니면 어느 한 곳이 너무 수북하다든지…(?) 아아, 이제 와서 그런 이유로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제 앞으로의 시간을 계속 함께하게 될 테니까 무조건 감추기만 해서도 안 될 일이다. 나도 진지한 연애는 오랜만이라서 아직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얼마나 보이고 얼마나 감춰야 하는 걸까. 남자의 마음이란 게 어떤 순간에는 훤히 들여다 보이다가도, 또 어떤 순간에는 저 멀리 아득한 곳까지 떨어져 있어서 좀처럼 알 수가 없다. "가, 같이 산다고 해도… 서로… 그. 거리감이랄까… 신비감이랄까… 어느 정도는 유지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뒤통수 긁적긁적. 이윽고 카카시가 낮게 한숨을 내쉰다. 잠시 뜸을 들이며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제 상관없다는 듯 냉정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며 말한다. "바보야, 아직도 모르겠어? 너 스토킹한 지 20년도 넘었는데 이제 와서 나한테 뭘 감추고… 아, 물론 네가 씻는 걸 훔쳐봤다든지 그런 건 절대 아니지만… 어쨌든 난 이미 너의 99%를 알고 있어. 그리고 아직 모르는 1%가 아주 신경쓰여. 신비감이고 나발이고 너는 내 몸의 일부 같은 거야. 소름끼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이젠… 그냥 받아들이도록 해." "……."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카카시의 충격적인 발언에 잠시 혼란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의 말대로 나로서는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스토커든 뭐든 이미 사랑하게 되었는데 어찌 하리. 나를 향한 카카시의 사랑은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깊다. 자칫하면 집착으로 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어린 시절부터 쌓여 왔던 그의 욕구를 채워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감추려고 하면 오히려 더 파고들겠지. 지금 나를 향한 눈빛을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 아직… 결혼 안 했어요……." "한 거나 마찬가지지. 내가 네 마지막이니까."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너무 확신하듯이 말하기에 한 번 쯤은 따져 물을까 했는데 무심코 입을 다물었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굳이 말하자면 본능적인 감이라고 할까. 섣불리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면 안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만에 하나 마음이 식는다 해도 지금 분위기로는 벗어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를 20년 넘게 스토킹한 사람에게 뭘 어찌 대항할 수 있을까.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나의 그 모든 치부를 알면서도 카카시가 나를 사랑해 주었다는 점이다. 이 남자는 웬만해선 나를 떠나지 않겠구나, 버리지 않겠구나, 그렇게 믿을 수 있다. 내 마음도 거의 확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카카시." "?" "과거의 나는 너를 외면했을지 몰라도, 현재의 나는 그렇지 않아. 온종일 네 생각을 하고 있어. 그러니까 1% 따위에 집착하지 마. 겨우 1%라고 해도… 너한테 부끄러운 모습 보이기 싫어. 할 수만 있다면 공주님처럼 보이고 싶은걸. 그게 여자의 마음이야." "……." 너도 이런 날 받아들여 줄 거지? 소리없이 중얼거리며 왠지 모르게 아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든지 어울리지 않는다든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니까, 이렇게나 가까이 있으니까, 서로의 감춰진 부분에 대해서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생각해 보면 식지 않는 호기심도 사랑의 일부다. 상대방에게 계속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닌가. 언젠가 남은 1%도 들켜 버리고 말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내 남자의 앞에서 공주님 흉내를 내고 싶다. 지금처럼. "안아줘." "달려와서 매달려 봐." 조신한 숙녀에게 그런 행동은 어울리지 않지만, 뭐, 세상 어딘가에는 왈가닥 공주도 있겠지. 솔직히 나한테는 그쪽이 더 잘 어울린다. 조금의 사양도 없이 카카시를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점프! 아이처럼 매달리자 단단한 팔이 내 몸을 받치고 감싸안는다. 신혼 분위기 물씬 나는구나. 으히힛. 카카시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바보처럼 헤실거리는 표정을 감추었다. 그러나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욕실로 걸음을 옮기면서 귀엽다는 듯 내게 뺨을 부비적거렸다. 사랑받고 있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아서 지금 나는 굉장히 행복하다. 그래, 까짓거, 20여년 동안 나 스토킹했던 건 없던 일로 해줄게. 어쨌든 좋은 결과로 끝났으니까 됐어. 이제부터는 나도 당신을 조금씩 탐구하기 시작할 거야. 당신이 '요령 있게 감추고 있는' 단점이란 것도 언젠가 반드시 알아낼 테니까 긴장해. 자칭 미래의 남편 씨. (…) 새 시트의 냄새. 어쩐지 그것만으로도 두근거리는 듯하지만 지금 다른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다. 줄곧 바빴기 때문에 이렇게 여유롭게 잠자리를 갖는 건 오랜만이다. 달빛이 어두운 방을 은은하게 비추고 내 남자의 하얀 머리카락을 푸른빛으로 물들인다. 부드럽게 쓸어넘기며 신음을 흘리자 상냥한 입맞춤이 보다 짙은 키스로 변한다. 뜨거운 혀가 얽히며 짜릿한 쾌감이 혈류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낮동안 이런 욕망을 숨기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부끄러우면서도 기쁘다. 비로소 그와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줄곧 원하고, 기다렸던 것이다. "고마워, 일생일대의 소원을 들어줘서." "기분이 어때요…?" 내 안으로 들어오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걸지 마요. 그렇지만 대답이 듣고 싶어서 신음을 삼키며 물었다. 천천히, 가장 안쪽에 닿는다. 그리고 약간 고조되어 있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온다. "허무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지나간 소원은 이제 됐어." "하여간… 욕심쟁이라니까… 그럼… 또 뭐가……." "뭐가 소원이냐고? 이제부턴 없어. 소원이라는 건 정확히 말해 '이루지 못하는 상태의 바람'이잖아? 지금은 뭘 바라도 딱히 못 이룰 이유가 없는 것 같아. 서로 사랑하고, 언제나 함께 있는데 그밖에 뭐가 걸림돌이 되겠어. 하고 싶은 건 그 자리에서 바로 할래. 네가 싫어해도 할 거고, 화내도 할 거야." "다, 당신… 그게 무슨… 아…!" "네 말이 맞아. 단점은 모르는 채로 있는 게 좋지. 분하다면 이게 나의 단점이라고 생각해. 전부 받아주기로 약속했잖아. 나랑 같이 사는 걸 허락한 시점에서 그렇게 결정된 거야." "아아…!" 분한 것을 겉으로 드러낼 틈도 없이 갑자기 거친 움직임이 시작되어서 신음이라기 보단 아픔을 호소했다. '기쁜 날이니까' 평소 보다 상냥하고 부드러운 것을 기대했는데, 내가 느끼는 아픔은 뒷전이고 다만 자신의 쾌감을 쫓고 있다. '소원 들어준 건 고마운데 지금부터 각오해^^'라는 거냐. 이런 교활한 자식. 완전히 속았어. 억울함에 눈물이 찔끔 새어나올 지경이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밀어내고 싶지 않다. 그래, 어디 마음대로 해 봐. 다 받아줄게. 가끔 하는 반항은 앙탈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내가 엄청 양보해주는 거야. 그러니까 평소처럼 상냥하게 해줘. 어린 시절부터 당신도 만만찮게 억울함이 쌓였겠지. 모르는 건 아닌데, 잘 아는데, 보복이라도 하는 것처럼 너무 거칠게 다루지 마. 일부러 더 아픈 체위로 바꾸지 마. 나쁜 자식아. 다 받아준다잖아. 적당히 해. "아… 아아…!" "좋아하는 여자의 마지막 보단 처음으로 남고 싶은 게 사실 남자의 마음이야. 왜냐면 지켜보기 너무 괴롭잖아. 지난 일은 생각만 해도 열받고. 좀 더 일찍 나와 사랑에 빠져 줬으면 좋았을 텐데.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아무리 다정한 모습만 보이려 해도… 그게 잘 안 돼." 몸 안쪽에서 쾌감이 번져 나가며 강하게 움츠러든다. 조금 전까지 아픔을 호소한 기억밖에 없는데 희한하게도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빨리 절정이 왔다. 좀처럼 쾌감이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남아서 짓궂게 나를 괴롭힌다. "완벽한 왕자님이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베개에 반쯤 묻고 있다가 눈을 떠 연인을 바라본다. 그의 손을 살며시 붙잡는다. 나를 응시하며 짓는 미소가 얄밉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아아, 나도 여자지만 여자의 마음은 정말 복잡미묘한 것 같다.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사랑한다니. 오히려 더 뜨겁게 달아올라서 심장이 위험하다. 두근두근. 그래, 뭐, 세상에는 약간 사디스트 기질이 엿보이는 왕자님도 충분히 있을 수 있지. 그래도 내 왕자님이니까 싫지 않다. 얼핏 심술을 부리고 있는 듯하지만 결국엔 '너의 과거까지 전부 가지고 싶어'라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잖은가. 으응, 그랬구나 우리 카스테라. 근데 정말 적당히 하자.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쉬게 해줘. "대신 완벽한 남편이 되어줄게. 그거라면 너도 믿을 수 있지?" "물론이죠……." 지금까지 누렸던 호사가 있는데 감히 어떻게 부정할까. 만약 우리가 결혼까지 하게 된다면 카카시는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아ㄴ… 남편이 될 것이다. 우리 아이는 분명 착하고 예의바르게 자라겠지.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부터 새로운 호칭을 연습해두자. 사랑해, 여보." 나도 사랑해. 세상에 둘도 없는 완벽한 '당신'. |
<제작> Copyright ⓒ 공갈이 All Rights Reserved. <소스> Copyright ⓒ 카라하 All Rights Reserv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