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생, 마음은 이해하지만 아무리 뭐래도 위령비 앞에 주저앉아서 혼자 우울한 이별시를 읊고 있을 필요는 없잖아. 조금 무서워보이는데 그만두지 않을래?”
“시끄러워요. 중요한 의식을 방해하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중요한 의식이라니 뭐야, 점점 더 무서워지니까 정말 그만둬. 츠나데님께서 부르시니까 얼른 가자고.” “싫어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계시잖아요.” “오비토의 기일이지.” “네, 그러니까 절 그냥 내버려두세요. 오늘 하루는 오비토 군과 계속 같이 있을 거라고요.” “그래, 선생은 지금까지 오비토의 기일 마다 늘 휴가를 냈었지. 하지만 지금 우리는 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야. 다들 무리해서 임무에 나가 있으니 우리도 거들어야지, 응?” “싫어요! 오늘을 그냥 지나가 버리면 남은 한 해 동안 계속 안 좋은 일만 생길 거라고요!” “오비토는 그렇게 쪠쩨한 녀석이 아니야, 한 번 쯤은 그냥 넘어가도 화내지 않을 거라고.” “싫어! 싫어어!” 나를 위령비로부터 떼어내려던 손길이 문득 멀어진다. 포기한 건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내 번쩍 하고 하타케 상닌이 나를 들쳐엎더니 마을 쪽으로 향한다. 사실 지금 나뭇잎 마을의 실정은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럴 힘도 없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고집을 부릴 생각은 딱히 없었다. 다만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고 싶을 뿐이다. 아침부터 임무에 나가서 얼굴도 비치지 않는 하타케 상닌이 조금 얄밉기도 했다. 하지만 오비토라면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냐며 오히려 내쪽에 잔소리를 하겠지. 알고 있기에 더욱 가슴이 저려온다. “오비토 군! 오비토 군! 싫어, 떨어지기 싫어!” “조상님들이 전부 듣고 계셔. 조용히 하지 못해?” 내려줄 생각은 하지 않고 그가 철없는 아이를 훈계하듯 내 엉덩이를 찰싹 때린다. 은근히 아프다. “오비토 군! 지금 봤어? 하타케 군이 날 괴롭히고 있어! 오늘만이 아니야! 언제나 그래! 혼내 줘! 혼내 줘!” “시끄러워, 얌전히 있어. 한 대 더 맞을래?” “말하는 거 봐! 납치에 폭력에 협박에 완전 깡패야! 오비토 군, 듣고 있어? 오비토 구우운!” “아무리 소리쳐도 오비토는 도와주지 않아. 포기해.” 확실히 이대로는 포기하는 수 밖에 없다. 차마 내 두 발로는 떠날 수 없었는데 어찌보면 잘 된 일이다. 하지만 뭐랄까… 여태껏 당한 게 있기 때문인지 오비토의 기일날 위령비를 향해 소리치고 있는 이 상황이 묘하게 짜릿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 인간이 내게 저질러온 악행을 전부 다 오비토에게 일러바쳐주는 건 어떨까. 아니, 그러면 너무 불쌍하니까 조금 놀려주는 것으로 참아주도록 하자. “싫다… 어째서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상냥한 오비토 군이 아니라 이런 냉정하고 재미없고 재수없기까지 한 천재 상사 씨인 거지… 이런 인간이라도 좋다는 여자는 수두룩한데 왜 하필 나인 거야…….” “이유를 알고 싶어?” 그가 나를 들처엎은 채 내게 묻는다. 저도 모르게 네 하고 대답하는 순간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진다. 혹시 ‘좋아하니까’라는 말이라도 하려는 걸까. 그런 말은 들어봤자 곤란할 뿐인데, 내 뜻과는 상관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문득 걸음을 멈춘 그가 뒤돌아서 위령비를 향한다. 그와 동시에 내쪽은 머리가 마을쪽으로 향해진다. “오비토!” 그가 어느덧 조금 멀어진 위령비를 향해 외치고는 그곳까지 잘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솔직히 난 그녀 외에 날 두고 네가 더 좋다고 하는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정말 뭔 생각인 거지. 황당하달까 어처구니가 없달까 행여 오비토가 듣고 상처받진 않을지 걱정되고, 이 인간이 얄미워서 등짝을 한대 짝 때려주고 싶다. “대체 내가 너보다 못한 게 뭐란 말이냐. 예전에 내가 좀 싸가지없었다는 건 인정한다. 그건 그렇다치더라도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에 와서까지 내가 너에게 밀릴 이유는 없지 않냐.” “이봐요!” “너에게 양보하는 것은 린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거기서 우리 착한 린과 노닥거리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그 이상은 바라지 마라. 이제 그만 그녀의 마음을 떠나. 왜 아직까지도 꿈에 나타나는 거지? 내게 이겼다는 것을 그렇게 자랑하고 싶은 거냐? 비겁하다!” “저기요?!” “난 기억하고 있다! 네놈이 시시한 쪽찌 같은 것을 들고 와서는 내 앞에서 쑥스러워하던 그 낯짝을! 손에 들고 있던 물을 너에게 확 끼얹어 버리고 싶더군! 좋아하는 여자의 필체를 알아볼 수 있는 건 너만이 아니란 말이다! 이 눈치없는 놈! 재수없는 놈!” “…….”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얼굴이 뜨겁다 못해 화끈거린다. 예전에 잠깐 얘기했었던 그 쪽찌에 대한 일화… 내 것이었단 말인가! 무얼 아닌 척 본인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고 있는 거지. 게다가 좋아하는 여자의 필체라니… 이 인간, 오늘 여기서 날 죽일 셈인가보다. “린! 거기서 듣고 있지? 뭘 하는 거야? 오비토가 날 괴롭히고 있다고! 녀석이 지금 우리의 ‘사이좋게♡’ 룰을 깨고 있어! 잔소리를 하든 꿀밤을 먹이든 어떻게 좀 해줘! 이건 이제 내 거라는 걸 (궁디팡팡) 알게 해줘! 꿈에든 현실에든 다시 나타나서 집적거리면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하타케 상닌.” “응?” “그만 가죠, 츠나데님이 기다리시겠어요.” “이제 포기한 거야?(웃음)” “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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