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린은 오랫동안 기억을 잃은 채 살아왔다. 이따금씩 가슴이 답답하거나 먹먹한 기분이 들 때 자신의 과거에 이유가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어떠한 계기가 생기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나는 린과 재회한 이후로 그녀가 기억을 되찾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술법을 연구하고 있다. 금술 연구를 그만둬야 했던 탓에 좀처럼 힘이 나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의욕만땅이다. 호카게 집무실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나뭇잎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오랜 책들을 관리하는 고서 보관서가 있다. 특수한 목적이 있어야만 출입 가능하기 때문에 가령 연구를 위한 것이라면 호카게이신 츠나데 님께 미리 허락을 구해야 한다. 내 삶을 통틀어 츠나데 님께서는 누구보다 엄격한 스승이시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면 은근히 제자의 어리광에 약하시다. 뜬금없이 기억상실에 대한 연구를 하겠다는 말을 꺼내서 황당한 표정을 지으셨지만 친구를 위해서라고 말씀드리니 이해해 주셨다. '처음부터 너는 동료를 위한 의료닌자가 되고 싶다고 했었지. 그런 의지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제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중후한 목소리로 말씀하실 때 우연히 창가에서 눈부신 햇살이 내려앉았다. 간만에 호카게의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져서 멋있었다. 고서 보관서에서 두루마리를 한아름 안고 나왔다. 짐이 많아질 것 같아 린이 같이 들어주기로 했다. 만나서 연구소로 함께 돌아갈 것이다. 린은 재야의원이고 학자로서 정신과 분야를 오랫동안 연구하기도 했다. 지난 며칠간 그녀가 보여준 새로운 지식에 여러번 놀랐다. 오랜만에 맑은 공기와 풀내음을 음미하면서 나뭇잎 마을을 만끽하고 싶다더니, 그녀는 아까 나와 헤어졌던 곳 근처의 계단에 앉아 있었다. 언덕을 오르는 계단이라 경사가 상당하지만 마을의 전경을 볼 수 있는 뷰포인트다. 그런데 웬 햇병아리 녀석들이 얼씬거리며 린에게 집적대고 있다. "예쁜아, 이름이 뭐야?" "우리랑 놀자, 예쁜아." "나는 이미 아줌마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라니까, 글쎄." "에이, 거짓말-." "말도 안 돼, 이렇게 귀여운데-." 어른으로서는 가소로울 따름이지만 기사도 정신에 화르륵 불이 붙어서 다다다 달려가며 소리쳤다. "나의 공주에게 무슨 수작이냐 이 놈드으으으을!" "으악, 아줌마는 뭐야!" 녀석들을 쫓아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두 팔로 끌어안고 있던 두루마리가 바닥으로 떨어져서 그중 하나를 밟아 버렸다. 미끌-. 몸의 중심이 뒤로 기울어짐과 동시에 하늘이 시야를 스치고 지나갔다. 끈이 풀어진 두루마리가 슬라이딩하는 나와 함께 날아올랐다. 찰나의 순간 펼쳐진 두루마리에 먹물로 쓰인 글자와 그림을 보고 영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 (…) 점원 : 손님, 이건 어떠세요? 요즘 여자아이들에게 특히 인기랍니다. 카카시 : 으음, 괜찮긴 한데… 우리 공주님은 얼굴만으로 이미 완성이랄까, 굳이 화려하게 꾸밀 필요가 없거든요. 옷은 평범한 어른처럼 얌전한 스타일이었으면 좋겠어요. 말뼈다귀 같은 놈들이 함부로 수작부리지 못하게요. 점원 : 아직 젊어 보이시는데, 벌써부터 딸바보가 되셨네요. 후후후. 카카시 : 딸은 아닙니다만, 대충 그런 느낌으로 아끼는 사람입니다. 그녀도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이었는데… 그다지 잘해 주지 못해서, 지금부터라도 뭐든지 해주고 싶어서요. 아, 이거랑 이것도 주세요. 점원 : 네, 감사합니다. 띠링─. 카카시 : 흐음… 이렇게 무절제한 소비는 오랜만인걸. 여자아이들의 패션 세계가 생각보다 굉장했어. 카카시 : (두 여자가 바쁘니 일단 내 취향대로 골랐는데 보고 웃지는 않을지 모르겠네. 설마하니 내가 리본이나 프릴 따위에 심쿵할 줄은. 하지만 괜찮아. 오비토였다면 나보다 더했겠지.) 카카시 : 그리고 또 뭐가 필요하댔더라… 린이 적어 준 노트를 주머니에 넣어 놨었는데… 나이를 먹으니 기억력이… 나 원…;; 린 : 카카시, 여기 있었구나! 카카시 : 오, 마침 잘 만났다. 아무래도 옷 같은 건 네가 직접 고르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지금이라면 아직 이것도 교환할 수 있으니까… 린 : 지금 옷이 중요한 게 아니야, 큰일났어. 가… … 헉… 헉……. 카카시 : …가 왜? (…) "카카시, 왔구나." "시즈네, 는?" "아아, 그녀라면 걱정 ㅁ…" "내 와이프 어딨어? 빨리 말해." "아야얏… 네 와이프 무사히 잘 있으니까 진정해. 저쪽 방으로 들어가면 돼." 시즈네가 바깥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듯하더니 머잖아 그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이곳의 수많은 연구 자료들처럼 나와는 상관없을 거라는 생각에 간이침대에 걸터앉아 사탕을 먹는 데 몰두했다. "." 이건 린의 목소리잖아. 나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곧장 그녀에게 달려갔다.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이런 낯선 곳에 나만 두고 가면 어떡해? 오랜만에 만났는데, 힝… 아까부터 자기가 시즈네라고 우기는 아줌마한테 붙잡혀서 나가지도 못하고 계속 기다렸어. 돌아와서 다행이다. 헤헤헷-." 린의 손을 붙잡고 흔들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지만 어째선지 그녀는 근심이 있어 보였다. 어쨌거나 죽은 줄 알았던 친구와 꿈처럼 다시 만나서 감격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같이 들어온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즈네, 어떻게 된 거야?" "중급닌자 시험 때 받았던 두루마리 기억나? 고서 보관서의 두루마리에는 그것처럼 펼침과 동시에 술법이 발동되도록 기록되어 있는 것들이 많아. 겉보기에는 전혀 알 수 없으니 위험하지. 그만두는 편이 좋다고 말렸는데도 린의 기억을 되찾아 주고 싶다면서… 그러다 사고가 났어. 하지만 진짜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일시적인 술법에 걸린 것뿐이야. 보관서에 해제술이 적힌 두루마리도 같이 보관되어 있겠지. 내가 찾아볼 테니까 그동안 너희가 잘 데리고 있어." "그래, 미안하지만 부탁할게." 린과 하고 싶은 일이 잔뜩 있었는데. 좀처럼 반응이 없어서 뺨을 부풀렸다. 그때, 남자의 커다란 손이 어깨 위로 올라왔다. 그는 자세를 낮춰서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 내가 누군지 알겠어?" '사쿠모 아저씨…?' -라고 잠시 생각했지만 사쿠모 아저씨라면 벌써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장례식을 내 눈으로 지켜봤고, 기일날에도 묘비 앞에 서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린처럼 기적처럼 살아돌아온 게 아니라면, 아저씨일 리 없었다. 게다가 아저씨의 얼굴은 이렇게 여자 같이 생기지 않았다. 닮긴 했지만 훨씬 남자답고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분이셨다. 어찌 보면 내가 처음으로 반한 남자기 때문에, 내 기억은 틀림없다. "모르겠어요… 린은 누군지 알아?" "카카시잖아……." "하타케 군…? 이 아저씨가…?" "(침울)" 아저씨로 보여서 아저씨라고 했을 뿐인데 상처받은 것처럼 힘없이 어깨를 축 떨어뜨리더니, 울상이 되어서는 갑자기 두 팔을 벌리며 내게 다가왔다. "꺄아…! 싫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나자 그만두긴 했지만… 왠지 불쌍해 보인다. 곤란해하고 있으니 린이 쓴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있잖아, . 아까도 말했지만 너는 기억을 잃은 상태야. 카카시는… 너의… 애인이구……." "내가 하타케 군… 아니, 이 아저씨랑…?" 혼란에 빠져 머리를 부여잡았다. 기억을 잃었다는 얘기는 분명히 들었다. 하지만 나는 당연히 시즈네와 린이 나를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이었단 말인가. 지금까지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뚱딴지 같은 미래였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괴로워하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그도 그럴 것이… 내 애인은… 애인은…!" 다다다다다─. ", 혼자 가면 안 돼!" 마치 환술 같은 이상한 공간에 갇혀 버린 기분이었다. 등골이 오싹해져서 앞뒤 생각지 않고 연구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다 뒤를 돌아보고는 아까보다 더 기겁했다. "꺄아아!!! 따라오지 마, 아저씨!!!" 까딱하면 붙잡힐 뻔했지만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카카시, 는?" "놓쳤어… 역시 발이 빠르다니까. 그래도 어디로 도망쳤는지 짐작이 가.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충분하니까 연구소에서 기다리고 있어." "아니, 같이 가게 해줘. 나 때문에 이렇게 된걸." (…) 내 애인은 가이다. 그래서 무섭다고 느낀 순간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던 거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술법에 걸려 있다는 것만은 사실인지도 모른다. 가이를 만나러 그의 집에 갔더니 낯선 사람이 문을 열고 나와서 깜짝 놀랐다. 마을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서 지금 살고 있다는 집에 찾아 왔다. 똑똑똑─. "가이-." 머잖아 문이 열리며 익숙한 초록색 타이즈가 나타났다. ", 그런 모습으로 무슨 일이냐?" 이쪽은 본래의 모습으로 있는 것뿐인데. 오히려 내가 묻고 싶었다. "누… 누구세…" "왜 그러냐? 나다, 가이." "아니야… 가이는 이런 아저씨가… 으으… 뭐가 뭔지 모르겠어……." 결국에는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흐애애애애애앵…!!!" "우오오오옷!!! 울지 마라!!!" "내가 아는 가이는 어딨는 거야!!! 가이이이!!!" "어, 어어, 으으음…;; 그러니까, 알았다! 이러면 되는 거지?;;;" 퐁─. 연기가 걷힌 뒤 나는 눈물을 뚝 그쳤다. 초록색 타이즈를 입은 남자, 어디까지나 처음 보는 아저씨였던 그가 어느새 아이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내가 아는 가이. 익숙한 얼굴을 보자마자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가이…! 정말 가이야…?" "그렇다니까! 자, 너의 송충이 눈썹." "가이이이이……." 눈썹을 만져보고 안심한 나는 가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부비적거렸다. 그러자 그가 거친 손으로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오랜만에 이렇게 보니까 귀여운데!" 다다다다다─. 누군가의 다급한 발소리. 복도쪽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 가이의 등 뒤로 숨었다. 아까 연구소에서 나를 붙잡으려 했던 남자가 여기까지 쫓아왔다. 가이를 두 팔로 끌어안자 그의 팔이 반사적으로 나를 지키려는 듯이 감싸왔다. 여전히 무섭긴 했지만 애인과 딱 붙어 있으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가이… 뭐 하는 짓이냐… 헉… 헉……." "아, 이건 말이야…;; 가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너, 장기임무를 받았다고 하지 않았어? 어째서 마을에 있는 거야? 하필이면 이럴 때…" "언제나처럼 나의 열혈 청춘 스피릿으로 단숨에 해치웠지! 그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지금은 설명할 여유가 없어. , 이리 와." "싫어, 가이랑 있을 거야! 내 애인은 가이인걸!" "애인이라… 대충 알겠군." "그럼 빨리 이쪽으로 보내." "보내라고 해도 말이야…" "싫어어어어어!!!" 가이의 손이 등에 닿았을 때 당연히 나는 감싸안는 쪽이라고 생각했다. 믿을 수 없었다. 가이가 나를 밀어내다니. 그럴수록 꽉 붙잡고 매달려서 떨어지지 않았다. 가이도 하는 수 없었는지 난처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말했다. "도 많이 혼란스러운 것 같으니 너무 몰아붙이지 마라. 기억을 잃었지만 일단 무사하니까 됐잖아." "됐긴 뭐가 돼?" "카카시." 린이 남자를 붙잡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단짝인 그녀가 그렇게 부른다면 나로서도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하타케 군인가. 남자에게서 그의 얼굴이 분명히 보이긴 했다. 하지만 믿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같이 온 여자애는…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구였더라?" "으음… 마이트 가이 군이지? 나는 린이야." "그래, 맞다, 린… 잠ㄲ, 린?! 17년 전에 죽은 그 노하라 린?! 내가 지금 유령을 보고 있는 것인가?!" "미안, 나중에 설명할게. 보다시피 우리가 곤란에 처해 있는 상황이라서. 좀 도와줄 수 없을까?" "무, 물론이다.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군. 카카시 너도 우리처럼 아이로 보이는 편이 좋지 않겠냐? 그러면 위화감이 덜할 것 같은데." "아아… 그렇겠네." 남자는 한 손으로 인을 맺고 하타케 군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 어때? 봐, 이제 아저씨 아니야." 가이의 말대로 위화감이 사라졌다.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무섭지 않았다. "알아, 네가 기억하는 나와는 많이 다르지. 말투라든지, 분위기라든지… 그럴 수밖에 없어. 그때와 달리 우리는 러브러브하고 있으니까. 너랑 나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야." 변신까지가 좋았는데. 내게 가까이 다가오려고 하기에 다시 외면해 버렸다. "나는 가이한테 시집가기로 했어! 너 같은 재수뿡이랑 결혼할까보냐!" "…" "나 너 싫어! 완전 싫어!" "……." 이번에는 정말 큰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아무리 싫어도 내가 너무 심하게 말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도 없고 하다 못해 사과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 너, 나랑 결혼까지 결심했었구나. 몰랐어…" "가이이이이이이!!! 분위기 파악 못하고 무얼 감동 받고 앉았냐!!! 허튼 수작 부리면 가만 안 둔다!!!" "그래, 알았으니까 진정해라. 여기 계속 서 있어봤자 아무 소용 없을 것 같은데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게 어떠냐. 나가서 바람 좀 쐬면 도 기분전환이 될 거야. 천천히 설득해 보자고." 가이가 나를 안아 올려 집을 나서고, 나는 어깨너머로 복도에 남은 두 명을 바라보았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조금만 참아, 카카시." 린이 우리도 어서 가자며 의기소침해 있는 카카시를 달랬다. 카카시의 시선은 나를 똑바로 향해 있었다. 문득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가 소리 없이 중얼거린 것은 내 이름인 듯했다. 그리고─ "여보……." 부드러운 음색으로 그가 속삭였을 때, 아무리 믿기 어려운 얘기일지라도 가벼운 농담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해졌다. 무언가 내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간 것 같았다. 아아, 나는 기억을 잃었다. 어쩌면 어른이 되어서 카카시에 대한 감정이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 기억이 없는 내가 이런 감정을 느낄 리 없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알 수 없는 불안과 떨림이 느껴진다. 세상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이의 손을 놓쳐 버린 것 같다. 게다가 지금 그 사람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아까는 어쩐지 마음이 무거웠는데, 넓은 공원에 나가자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아무도 더는 생소한 얘기를 하지 않아서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가이의 무릎에 앉아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으니 조금은 얘기를 들어볼 마음이 생겼다. ", 너는 이제 카카시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싫어, 가이랑 있을 거야. 하타케 군은 다른 여자애들이랑 놀면 되잖아." "다른 여자애들이라니, 카카시도 이제 나이가 있어서 그렇게 인기남은 아니야. 네가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없는데, 너까지 혼자 내버려 두면 가엾지 않냐." "……." 가족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아프다. 하타케 군도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두 분 다 돌아가셨다. 인기가 많아서 딱히 외톨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동병상련인 것이다. 가이의 말을 듣고, 아까부터 저쪽 벤치에 앉아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카카시를 돌아보았다. 그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기쁜 듯이 나른하게 웃었다. 아저씨일 때는 무서워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익숙한 얼굴을 보면 역시 잘생겼다. 여자애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그를 싫어하는 나까지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얼굴이 뜨거워졌다. 행여 들킬세라 서둘러 고개를 정면으로 되돌렸다. "아이스크림 다 먹으면 갈게." "그래, 잘 생각했다." 시즈네가 두루마리를 찾아내 방법을 연구한다 치면 아무리 빨라도 내일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얌전히 카카시와 집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모두가 나를 놀리는 건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남아 있었는데, 거실의 작은 액자에 끼워진 사진을 보니 그마저도 흔들렸다. 이건 꿈이야. 꿈이 틀림없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카카시잖아. 다른 여자애들한테는 왕자님처럼 보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희대의 재수뿡이라고. 그러나 사진에는 전혀 다른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카카시가 뒤에서 나를 안고 직접 카메라를 앞으로 뻗어 찍은 사진인 듯했다.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내가 꿈꾸었던 연인의 모습이었다. ", 밥 먹자." "나… 나는… 별로 먹기 싫다 뭐." "배고프잖아." "아까… 아이스크림 먹었구…" "의 배가 아이스크림 정도로 채워질 리 없지. 고집 그만 부리고 와서 앉아. 나는 오늘 네 걱정 충분히 했어." "하타케 군… 네가 왜 내 걱정을 하는데…?" "사랑하니까." "으, 으왓… 기분 나쁜 소리 하지 마! 리, 린이 돌아왔다구 해서… 전부 괜찮은 게 아니니까! 나랑 화해하고 싶으면… 가서 오비토 군도 데려와!" "할 수만 있다면 데려오고 싶어. 어쩌겠어, 나 혼자 남아 버린걸. 너도 이런 나를 내버려둘 수 없어서 따라온 거잖아. 내가 안쓰럽지? 그렇다면 얼른 이리 와." "……." 둘이 마주앉아서 밥을 먹는다니. 생각만 해도 어색해서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카카시가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는 상황에 침묵까지 찾아오니 그건 그것대로 견디기 힘들었다. 하는 수 없이 식탁 앞에 앉았다. "…린은 어째서 나만 두고 가버린 걸까." "신혼집에 있는 게 미안해서지." 줄곧 시선이 바닥을 향하고 있었던 나는 작게 한탄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뜻밖의 진수성찬에 화들짝 놀랐다. 가짓수가 많다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만 기가 막히게 올려져 있었다. 입안에 침이 고여서 저도 모르게 꿀꺽 삼킨 뒤에는 망설임없이 먹기 시작했다. "시즈네가 반드시 기억을 되살려 줄 테니까 걱정 마. 나도 츠나데 님께 양해를 구하고 휴가를 얻었어. 내일 다시 연구소에…" "후우(응)?" "…원한다면 한 그릇 더 줄게." "ㄴ, 아 후어케 마이…(꿀꺽) 안 먹거든!" "괜찮으니까 많이 먹어. 무럭무럭 자라서 나한테 빨리 시집 와야지." "케헥! 케헥! 내가 너한테 시집을 왜 가…! 안 갈 거야…!" "밥 다 먹으면 씻고 바로 자. 내 옆에서." "시… 싫… 나 가이한테 돌아갈래…!!!" "으응, 안 돼." 카카시도 꽤나 단호했지만 그럴수록 더 울고불고 떼를 써서 결국에는 나 혼자 침대를 차지했다. 자고 나면 꿈에서 깨어날까. 눈을 감았는데 배에서 꼬르륵 하고 또 말썽이다. 카카시의 말대로 내숭 떨지 말고 더 먹어둘걸 그랬다. 허전한 느낌에 잠이 오지 않는다. 카카시는 소파에서 자고 있다. 까치발을 들고 몰래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었다. 저녁 식사 때 남은 것들이 보였지만 데워서 먹을 여유까지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른 것을 찾다가 슈크림 빵을 발견했다. 우와, 이것도 내가 좋아하는 거! 소리 없이 기뻐하면서 와구와구 먹어치웠다. 그렇게 냉장고 불빛에 의지해 배를 채우고 있을 때, 문득 등골이 쌔해졌다. "역시." "케헥케헥!" "어이구… 천천히 먹지. 많이 먹는다고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닌데." 카카시가 물을 따라 줘서 꿀꺽꿀꺽 마시고는 겨우 삼켰다. "이제 배부르니까 들어가서 잘래." 먹고 나니 피곤해져서 하아 숨을 내쉬고는 일어났다. 그런데 카카시가 들어가려는 나를 붙잡았다. "잠깐-. 네가 고집 부리는 바람에 소파에서 자게 됐으니까, 대신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뽀뽀해줘. 안 그럼 같이 잘 거야." "……." "싫어? 그럼 들어가서 잘까. 날도 추운데 거실에서 자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기… 기다려…!" 카카시는 방으로 가려다가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고개를 모로 돌리자 그런 내 시선을 따라가듯 움직이며 내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갑자기 차가운 손이 뺨에 닿아서 움찔 했더니, 그가 조용히 손을 거두며 말했다. "상당히 경계가 심하구나. 뭐, 14살이면 그렇겠네. 애인끼리 안에서 뭘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까." 카카시의 의도가 뭔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의 말이 다음과 같이 들렸다. 나는 네 애인이다. 너를 이미 몇 번이나 안았다. 새삼스레 경계할 필요 없으니 같이 자자. "모, 몰라… 그렇게 쳐다보지 마… 정말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으으… 으으으… 흐애애애애애애앵-!!!" "어어, 어이구야, 미안, 미안.;;; 그냥 장난친 거니까 울지 마. 아저씨라 이런 게 습관이 돼서… 네가 나쁘다는 게 아냐. 괜찮아.;;;" "변태 아저씨는 싫어!!! 가이한테 갈래!!!" 이만큼 커다란 소리로 떼를 쓰면 카카시도 하는 수 없이 그만둘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히려 역효과였다. 아까보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고집부리면 다 네 맘대로 될 것 같아? 그만하고 이리 와." 지금까지 내가 무서워한다는 이유로 일부러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착한 아저씨라고 생각했다. 애당초 공주님 안기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는 내 허리를 한쪽 팔로 휙 감아 번쩍 들어 올렸다. "싫어!!! 잠은 남편하고만 자는 거야!!! 나는 너랑 결혼 안 해!!!" "싫다고 해봤자야.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너랑 할 거거든. 한 번만 더 누구한테 가겠다는 소리를 했다간 혼날 줄 알아." 철썩! 엉덩이까지 맞았다. 완전히 내 예상을 뒤집어 놓았다. 카카시는 나를 방으로 데려가서 침대에 던졌다. 발버둥치다가 그에게 두 팔을 붙잡히는 순간 덜컥 겁을 먹고 멈추었다. "기억이 없어도 느껴지는 게 있을 거 아냐. 이렇게까지 너를 잘 파악하고 있는 남자가 나 말고 또 있어?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안 나와. 왜냐면 나는 20년 넘게 너를 지켜봤거든. 겨우 4년 만나다 헤어진 가이? 그 누구도 감히 너랑 결혼하겠다고 나서지 못할걸." "가이랑 내가 헤어졌어…?" "아아, 벌써 12년 전 일이네. 친구 애인을 건드린 나도 쓰레기지만 내 감정 빤히 알고 있으면서, 내 눈앞에서, 당당히 노닥거렸던 너희도 친구로서 할 짓은 아니었지. 이제 와서는 아무 의미도 없지만 그것 때문에 가이가 너를 찬 거 아닐까? 미안해서 어쩌지?" "……." "뭐, 그건 아닐 거야. 깨끗하게 끝나서 여전히 친구로 지내고 있으니까." 충격에 멍하니 넋을 놓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이 지나간 뒤 카카시가 팔을 놔주었다. '미안'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오는가 하면 상냥한 손길로 내 뺨을 쓰다듬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가만히 있으니 그가 다가와서 나를 살며시 품에 안았다. 하얀 머리카락이 부드러웠다. 따뜻한 입술도. "미안해… 근데 나… 실은… 그때 엄청 질투났어……." 하타케 군이다. 비로소 납득하고는 그를 마주안았다.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이어져 있었다. 마음에는 전해지고 있었지만 어렸던 나는 애정이 뭔지, 사랑이 뭔지 몰랐다. 그것은 언제나 아픔으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내가 가진 감정은 미움이 아니라 아픔이었다. 조금씩 느껴진다. 떨림, 두근거림, 그리고 또…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이것은 분명 '행복'이다. "카카시……." (…) 린 : 마을의 영예는 휴가를 내도 바쁘구나. 아무리 암부에 급한 일이 생겼다지만 새벽부터 나가서 고생 많았겠다. 그래도 걱정했던 것에 비하면 일찍 돌아왔네. 카카시 : 간만에 대장의 파워라는 걸 과감히 써 버렸지… 시즈네가 말했던 시간에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터벅터벅─. 카카시 : 이거, 린의 서류니까 받아둬. 오늘로 완전히 마을에 복귀한 셈이야. 보통 같으면 복잡한 절차를 밟아야 해서 시간이 훨씬 오래 걸렸을 텐데, 가 손을 잘 써 뒀어. 호카게 제자의 파워라는 거지. 린 : 고마워, 한테도 나중에 제대로 감사를 표해야겠다. 카카시 : 나한테 한 번 했으면 됐어. 린도 복귀하자마자 당혹스러운 일을 겪었잖아. 정말이지 어제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니까. 린 : 그런 것치고는 카카시도 꽤 분발한 것 같던데. 카카시 : 응? 린 : 아까 를 연구실로 데려갔는데 어제는 분명히 없었던 자국이 목에 생겼지 뭐야. 나 참, 시즈네 보기 민망해서. 후후후. 그래도 카카시는 굉장하구나- 하고 생각했어. 여러 가지 의미로. 카카시 : 변함없이 예리하네… 그보다 서두르자.;; 우리 벌써 기억 돌아왔겠다.;;; 린 : 그래도 찔리는 건 있나 보구나. 괜찮아, 의 행복이 중요한 거지. 아침에는 완전히 요조숙녀가 되어 있던걸. 카카시가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카카시 : 너도 상당히 넉살스러워졌어… 너무 그렇게 놀리지 말아줘… 네, 도착입니다. 들어가시죠, 공주님. 린 : 어머, 친절해라-. 터벅터벅─. 시즈네 : 너희 왔구나. 카카시 : 어제부터 고생하게 해서 미안. 린 : 의 기억을 되살리는 건 어떻게 됐어? 시즈네 : 그게 말야…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했어. 가 도중에 겁을 먹고 도망가 버렸거든. 일단 20살 정도의 기억까지는 확실하게 돌아왔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린 : 어떡하지? 카카시, 짐작 가는 곳 없어? 카카시 : …딱 한 곳 있지. (…) 쾅쾅쾅─. 야마토 : 네-. 어서 오세요, 선배-. 덜컥─. 린 : 어멋…;; 설마 이번에도 그런 거야…?;;; 카카시 : 아아, 그런 거야… 보다시피. 야마토 : 생각보다 늦으셨네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카카시 : 역시 내 예상을 빗나가는 법이 없다니까. 전남친 품에 아주 폭 안겨 있네, 우리 와이프. 하하핫-. 야마토 : 저도 이런 모습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뭐에 겁을 먹었는지 좀처럼 떨어지려고 하질 않네요. 카카시 : , 좋은 말로 할 때 이리 와. : 나는 내 애인이랑 있을 거야! 당신 따위 상대하고 있을까보냐! 꼴도 보기 싫어! 재수뿡! 최악! 카카시 : (부들부들) 린 : 카카시, 시간을 좀 주는 게… 카카시 : 어제와는 상황이 달라. 계속 고집을 부리겠다면 어쩔 수 없지. : 꺄아!!! 야마토 : 선배, 알겠으니까 일단 표정을 고쳐 주세요. 가 무서워하잖아요.;; 잠ㄲ, 그렇게 억지로… 팔 끊어지겠어요.;;; : 꺄아아!!! 살려줘어어!!! 카카시 : 안 잡아 먹으니까 걱정 마! : 거짓말!!! 밤 되면 아프게 할 거면서!!! 야마토 : 아니, 잠깐만요. 선배, 그런 짓을 했습니까?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는 아이나 다름없다구요! 선배라면 를 아껴줄 거라 믿었는데… 실망이에요! 카카시 : 어, 어쨌든 내 와이프니까 데려가겠어! 야마토 : 데려가서 또 무슨 짓을 하시려고요? 카카시 : 네가 알 거 없잖아! 야마토 : 안 돼요! 짐승! 투닥투닥─. 린 : 친구가 많다는 건 좋구나, 카카시. 카카시 : 가만히 있지 말고 린도 와서 거들어! 린 : 보아하니 전남친 쪽이 좀 더 상식이 있는 사람 같은데, 아까 말했다시피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의 행복이야. 카카시 : 친구로서 부탁하는 거니까 내 신부 좀 되찾아 오게 도와주라! , 이제 때가 됐어. 결혼하자!!! : 또 결혼하쟤!!! 어째서 내가 재수뿡 카카시와 부부가 되어야 하는 거야!!! 싫어어어어!!! 린 : 괜찮아,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의 행복한 일상은 아주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는걸. 후후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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