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 거기 러브러브 바이올런스 바로 밑에 꽂혀 있으니 보도록 해. 난 잠깐 여기서 수리검 좀 닦고 있을게."
"앨범 같은 중요한 것을 어째서 러브러브 시리즈보다 밑에 두는 겁니까! 정말이지!" 요즘따라 유독 하타케 상닌에게 소리치는 일이 잦아졌다고 생각하며 하얀색 표지의 두꺼운 앨범을 펼쳐본다. 이제는 기억속에 존재할 뿐인 사람들, 사쿠모 씨부터 시작해 정겨운 사람들의 얼굴이 여럿 보인다. 그 안에 나와 우리 가족들도 있다. 페이지를 몇 장인가 넘기자 하타케 상닌의 어린 시절 모습이 이어진다. 정말 갓난 아기 때만 빼고 계속 마스크를 썼구나. 대단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의 마스크 사랑에 새삼 놀라움을 느끼며 페이지를 넘긴다. 아카데미 입학, 졸업, 아… 미나토 선생님이다. 오비토, 린도. 아무리 뭐래도 이 정도로 빨리 가슴이 북받쳐오를 줄은 몰랐는데, 그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안 돼, 안 돼. 고개를 저으며 서둘러 페이지를 넘긴다. 하타케 상닌의 앞에서 만큼은 결코 그 세 사람 때문에 울어선 안 된다. 그의 상처에 비하면 분명 내 상처는 작은 것일 테니까. "어라… 저기, 하타케 상닌?" "응?" "제가 지금 상당히 흥미로운 사진을 한 장 발견했습니다만, 뭡니까, 이 사진은?" 하타케 상닌에게 보여지도록 앨범을 뒤집은 뒤 어느 사진 한 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3, 2, 1……." "어째서 갑자기 카운트에 들어가는 거야? 잘 기억이 안 나, 잠깐만." 내가 가리키고 있는 사진 속에는 어린 린과 어린 하타케 군의 모습이 담겨 있다. 린이 하타케 상닌을 끌어안고 있는 오묘한 분위기의 사진이다. 그냥 끌어안고 있는 것 뿐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겠지만 오묘한 이유가 그 배경에 있다. 어두운 장소, 하타케 상닌이 벽에 기대어 있고 그 품에 린이… (뚝) 뭐지, 방금 그 소리는? 내 안에서 뭔가 끊어졌다. 설마 질투? 에이, 그럴 리가. "아, 기억 났ㄷ…" "됐습니다, 딱히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으응?;;" 앨범을 다시 무릎 위로 돌려놓고는 페이지를 넘긴다. 아직 제대로 보지 않은 사진이 남아 있지만 왠지 빨리 넘겨 버리고 싶다. 스윽-. 어느덧 내 옆으로 다가온 하타케 상닌이 살며시 상체를 숙여 내 안색을 살핀다. 아무래도 좋지만 지금 자신의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선생." "뭡니까, 수리검이나 계속 닦으세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실은 그때…"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했잖아요. 당신도 굳이 제게 해명할 필요는 없어요." "그때… 웁!" 갑자기 내게 입이 막아진 통에 그가 인상을 찌푸린다. 신경이 쓰이지만 어쩔 수 없다. 만약 그의 말을 끝까지 듣는다면, 혹시라도 안도감을 느낀다면, 자신의 감정이 질투였다는 것을 거의 확증하게 되어 버린다. 질투라니, 그와 내 사이에 질투라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아, 오비토 군이다." 무의식 중 눈에 띈 사진 한 장으로 일순간 얼굴에 웃음이 벗진다. 오비토가 나무에 기대어 자는 모습. 수련을 하다가 지쳤던 걸까? 누가 업어가도 모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귀여워… 꺼내서 좀 더 자세히 봐도 돼요?" 대답 따윈 필요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듯 내 손이 멋대로 움직여 앨범 안에서 사진을 꺼낸다. 손끝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면 그 시절의 오비토를 직접 만지고 있는 것 같아 작은 행복감이 느껴진다. "오비토 군… 오비토 군……." 쓰담쓰담-.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릴 정도로 무아지경에 빠져 있는데 아까부터 그것을 방해하는 듯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 무시하려 해보지만 점점 강해져서 그럴 수가 없다. 덥석, 문득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하타케 상닌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가만히 응시하는데 그가 내게 말한다. "무얼 혀 짧은 소리로 중얼거리고 있는 거야? 네가 아직도 그때와 같다고 생각해? 노.처.녀." (뚝) 아아, 이제 확실하게 알 것 같다. 이것은 내 안에서 이성이 끊기는 소리다. "하타케 상닌, 죽고 싶으세요?" "아뇨… 살고 싶긴 합니다만……." 이제 와서 그런 겁먹은 표정 지어봤자 소용없어. 행여 불똥이 튀진 않을까 오비토의 사진을 멀리 피신시켜 놓은 뒤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가증스런 남자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챈다. 상사고 뭐고 지금 나에게는 눈에 뵈는 것이 없다. "노처녀? 내가 노처녀면 당신은 노총각이야. 우리가 같은 나이라는 거 잊었어?" "잊지는 않았지만…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솔로탈출 할 수 있어… 당신은 다르잖아……." "오비토 군이 지켜보고 있다고 해서 내가 난폭하게 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야. 당신 개에 대해서 좀 알지? 전력으로 덤벼드는 개에게 물려봤어? 내가 오늘 이 구역의 진짜 미친 개가 누군지 보여줄게." "죄, 죄송합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 오오라와 같은 살기를 내뿜으며 마지막으로 경고의 눈빛을 날린 뒤 귀여운 오비토군을 찾아 몸의 방향을 돌린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나의 영원한 낭군 님을 정중히 영접하려는데, 또 다시 방해가 들어온다. 꼬옥-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대로 내 등에 머리를 기대는 감촉도 느껴진다. 뭐지, 뭐하자는 거지. 설마 당신도 질투하는 거야? 그런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없잖아. "정말 강한 개는 자신이 믿지 않는 사람에게 절대로 등을 보이거나 하지 않아. 당신, 나를 믿어?" "딱히 믿지 않습니다만 지금은 당신보다 오비토군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맘에 든다면 줄게, 대신 지금부터는 날 상대해." "상대하라니, 무슨……." 거짓말이지. 조금 전의 겁먹은 듯한 표정은 다 연기었던 거야? 갑자기 이 흐름은 좀 아니잖아. 속으로 중얼거리며 저항을 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의 한 쪽 팔이 내 머리를 감싸고 나머지 팔이 내 허리를 감싸고 있다. 어째서 갑자기 키스 같은 걸 하는 거지. 조금 전의 거친 움직임 때문에 오비토군의 사진이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내게 준다니 기쁘지만 그보다 지금은… 숨이 막힌다. "음…! 음…음…!" 서로의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갑자기 차가운 공기가 목을 비집고 들어온다. 믿을 수가 없다. 이렇게 억지로 키스를 당하면서도 거부감이 전혀 들지 않는다니. 오늘의 나는 어딘가 이상하다. "…하는 건가요?" "이 다음, 해도 되는 거야?" "왼쪽 눈 보여주신다면 해도 좋아요." "왜… 내가 질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저쪽에서도 해줬으면 좋겠어?" 이 사람, 지금 자신이 질투를 하고 있다고 말하는 건가. 그렇게 담박하게 인정을 해버리면 오히려 현실감이 없다. "오비토 군은 질투 같은 거 하지 않아요. 당신이 하고 있는 것도 질투가 아니고요. 두 사람 다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쯤은 알고 있어요. 바보 취급하지 말아주세요."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질투는 할 수 있잖아. 뭐가 어쨌든 당신은 지금 내게 안기고 있어. 오비토 역시 20년 가까이 자기를 짝사랑해온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안기는 모습을 보면 조금은 신경쓰이지 않겠어?" "……." "질투 정도는 솔직하게 하자. 서로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기분이잖아. 난 아까 질투하는 당신을 보고 그렇게 느꼈는데, 당신은 아니야?" 아, 그런가. 내가 생각하는 질투의 의미와 이 사람이 생각하는 질투의 의미는 다르다. 틀린 것은 내쪽. 나는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다. 사실 질투 따윈 대수롭지 않은 감정인데. "저도 나쁘지 않았어요." "그럼 된 거야." "아……." 뭐지,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다. 속이 울렁거리는 게 멀미가 나는 것 같다. "죄송합니다, 하타케 상닌." "?" "오늘은 무리일 것 같아요. 갑자기 몸 상태가 안 좋아져서." "…어떻게 안 좋은 건데?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닙니다,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신 때문은 아닙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진, 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비토의 사진을 주워 품 안에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난다. 무언가 옷깃을 붙잡아 뒤를 돌아보니, 하타케 상닌이 나를 올려다 보고 있다. 왠지 쓸쓸한 표정이다. "당신이 싫다면 하지 않을게." "네?" "질투하지 않을게." "그게 무슨……." "전에 말했지? 당신이 이 눈 너머로 보고 있는 것이 무섭다고. 당신은 속으로 웃었을지도 모르지만 정말이야. 최근 밤중에 거울을 보면 이 눈 속에서 오비토의 모습이 보여서 쉽게 잠들 수가 없어." 그래서 요즘 내게 좀처럼 왼쪽 눈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던 건가. 나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었던 건가. 어째서 말하지 않았던 거지. 좀 더 일찍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무서워. 그런데 당신은 언제나 오비토 오비토 하고 아무렇지 않게 녀석의 얘기를 하고, 내게 자꾸만 녀석을 떠올리게 해. 그래서 싫었어. 겉으로 표현하면 좀 나아질까 해서 그랬던 거야." "……." 눈에 보이지 않으니 생각하지도 않았던 거다. 이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얼마나 능숙한지 알고 있으면서도, 심지어 그때 솔직하게 무섭다는 말을 들었으면서도, 언제나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하타케 상닌." "?" "솔직히 전 지금 우리의 관계를 딱히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왜 제가 계속 당신을 찾아오고, 당신의 곁에 있으려고 하는 줄 아세요?" "……." "제가 당신의 눈 너머로 보고 있는 건 분명 오비토 군이예요. 하지만 그 안에는 오비토 군만 있는 게 아니예요." "그럼……." "맞아요, 그 안에는 당신도 있어요. 하타케 카카시, 당신도요." " 선생… 난……." "알고 있어요. 당신은 지금 이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길 바라죠. 걱정 말아요, 저도 이 이상은 바라지 않으니까." "……." "전 아마도 죽을 때까지 오비토 군을 사랑할 거예요. 그러다보면 언젠가 당신은 사라지겠죠. 그 눈 너머에서도, 제 곁에서도." 내 감정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사람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것이다. 어느 쪽도 힘들 뿐이라면 차라리 이쯤에서 그만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제와서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이대로 끝나면 분명 더 아플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잘해봐요, 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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