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부터 몸이 무겁고 마음도 뒤숭숭해서, 하루 정도는 작정하고 쉬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어제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 이불 속에 갇혀서 홀로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일명 '승급시험 휴가'라는 것을 얻어 출근하지 않고 있지만 줄곧 단련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타케 상닌이 뜻밖의 일로 바빠져서 가이에게 체술 위주로 훈련을 받은 터라 신체적인 고단함이 특히 컸다. 단 하루 쉬었을 뿐인데, 그새 몸이 조금 굳은 것 같다. 이러면 안 되지 하고 생각하며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아니, 나서긴 했는데─. 콩─. 의도치 않게 시즈네의 이마에 우리 집 현관문을 강력하게 대쉬했다. 집 앞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녀가 노크를 하고자 마음먹은 순간에 하필이면 문을 열고 나간 것이었다. "시, 시즈네. 괜찮아?" "으으……." 그녀와 나는 아카데미 동기로 어렸을 때는 꽤나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의료반에 입성하며 한때 린과 함께 셋이서 열심히 의학서적을 들여다 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즈네가 츠나데 님의 밑으로 들어가서 마을을 떠나게 되고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지금 호카게 집무실에서 츠나데 님의 보좌를 맡고 있다. "우리 집엔 어쩐 일이야?" "츠나데 님께서 너를 찾으셔." 무슨 일이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승급시험 준비로 휴가중이라는 것은 츠나데 님께서도 분명 알고 계실 터인데, 시즈네까지 직접 보내신 것을 보면 그만큼 급한 일이겠구나 싶었다.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한 채, 나는 시즈네를 따라서 츠나데 님의 집무실로 향했다. 츠나데 님께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계셨다. 무거운 분위기에 압도된 나는 약간 긴장된 발걸음으로 나아가 그녀의 앞에 섰다. 그리고 어떠한 설명도 없었다. 의료 닌자란 무엇이냐. …하는 것으로 시작해, 점점 난이도가 어려워지는 의학 문제들이 차례로 나에게 주어졌다. 아직 2차 승급시험은 시작도 안 됐건만 마치 시험대에 선 기분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묻지." 이제 끝인가 하고 생각하던 찰나, 츠나데 님께서는 내게 하셨던 수많은 질문 중에 가장 첫번 째 것을 어째서인가 다시 물으셨다. 의료 닌자란 무엇이냐. 그 답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 츠나데 님께서는 형식적인 대답이 아닌 '나의 생각'을 묻고 계셨다. 내가 어떤 자세로 이 일에 임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시려는 것이었다. "제게는 의료 닌자로서의 닌도가 있습니다… 남들에 비해 그다지 거창하지는 않지만 소중한 것입니다… 누군가는 의료인의 목적을 '부상의 치료'에 둘 것이고… 누군가는 '목숨을 살리는 것'에 두겠지요… 저는 그들과 조금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지?" "의학을 만든 것은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사람의 마음이 움직여야 합니다… 기술은 언제나 그 다음입니다… '치료' 이전에 '예방'… 그보다 전에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에게 의료 닌자란……." 머릿속으로 정리할 틈이 없어서 장황하게 늘어놓은 꼴이 되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내가 오래 전부터 가슴에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의 대답 만큼은,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힘 있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전했다. "닌자 세계에 살아가면서 점점 무감각해져 마치 인형처럼 감정이 메말라 버린 동료들을 위해,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의지가 되어주는 존재입니다!" 어쩌면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아이 같은 생각일 수도 있다. 의료계의 전설이라 할 수 있는 '신'의 앞에서 나의 닌도는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자신이 세운 그것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분위기에 압도될지언정 끝까지 꼿꼿한 자세로 버텼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녀가, '신'께서 나의 진심을 알아주셨다. "아주 좋아." "네?" "합격!" 츠나데 님의 손가락 끝이 허공을 가로질러 나를 딱 가리키는 순간, 영문도 모르면서 나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합격'… 그래, 일단은 '합격'이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넋이 나가버린 내 옆으로, 당사자인 나보다 시즈네가 더 기쁜 듯이 날뛰었다. 그리고 츠나데 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내게 성큼성큼 걸어오시더니, 두 팔을 벌려 나를 확 끌어안으셨다. 살며시 어깨를 감싸는 그녀의 손길이 마치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 '이제 걱정하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우습지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시즈네! 준비해둔 그것을 가져와라!" "예!" 잠깐, 뭘 준비해둔 거지. 어리둥절한 나를 뒤로한 채 시즈네는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가 가져온 것은 적어도 나의 앉은 키 정도는 되어 보이는, 탑처럼 쌓여진 엄청난 높이의 책이었다. "이, 이게 무엇입니까?" "앞으로 네가 공부해야 하는 서적들이다!" "네?" 나는 정말 눈이 튀어나가는 줄 알았다. 이따금씩 공부를 위해서, 상급닌자 시험 준비를 위해서 책을 보긴 했지만, 그것은 내가 보았던 그런 책들과는 척 봐도 수준이 달랐다. "그리고 기뻐해라! 우리는 이 서적들을 모조리 소각할 것이다!" "네?!" 두 사람이 나를 두고 장난치는 것인가. 아니, 나는 실제로 내 눈앞에서 시즈네가 그 책들을 '타는 쓰레기' 모아두는 상자에, 그야말로 집어 쳐 넣는 광경을 보았다. "이걸 언제 다 읽어! 지금 당장 실전에 돌입해도 아슬아슬한 판에 말이다!" "츠, 츠나데 님, 저기… 시즈네, 저기… 누가 상황 설명을 좀……." 왠지 모르게 감격에 젖어 계시는 츠나데 님 대신 옆에서 기쁜 듯이 웃고 있던 시즈네가 내게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어? 오늘부로 넌 츠나데 님의 제자가 된 거야." "에…?" 대체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거지. 넋이 나간 채 좀처럼 돌아오지 못하는 내게, 츠나데 님의 가늘지만 무엇보다 강한 팔이 다시 확 하고 어깨동무를 해왔다. "기뻐해라, ! 너의 스승은 수십 권의 책을 읽을 필요 없이, 그 안에 있는 지식을 단기간에 네게 전수해줄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지닌 자다!" "우와아! 오랜만에 멋있습니다! 츠나데 님!" "하~ 하하하핫~!" "……." (…)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내가 츠나데 님의 제자가 되다니. 모범생인 사쿠라는 그렇다쳐도 딱히 특출나지도 않은 나를 뭐가 예뻐서 받아주시기로 한 것인지, 나름대로 고민해봤지만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날 이후 그야말로 '수십 권의 책을 대신할 만큼의' 스파르타 식 훈련이 이어져서 생각할 여유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상급닌자 시험까지 주어진 시간은 보름. 영주의 방문으로 마을이 떠들썩해지고 5대 호카게이신 츠나데 님께서 바쁘게 정무를 보셔야 하는 몇 일 동안은 그녀를 대신해 시즈네가 나의 훈련을 도왔다. 시즈네는 츠나데 님의 제자로서 현재 '독' 분야에서 제일가는 의료 닌자다. 사람을 살려야 하는 의료인에게 독이 필요한 것은 아이러니한 사실이지만, 의료 닌자는 '전투' 임무에 투입되어 자신의 몸을 스스로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신체능력이 좋다면 크게 상관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따금씩 독을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시즈네, 이 독, 살짝이라도 스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 순간을 기점으로 이틀이 지나면 전신으로 퍼져나가서 사망하게 되지." 후덜덜. 행여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질까 조마조마하며, 나는 그녀로부터 다양한 독 제조법을 익혔다. 물론 그와 동시에 해독제의 제조법 또한 익혔다. '망가뜨리는 기술'이 있다면 '고치는 기술'도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어찌보면 의학도 그런 맥락에서 출발한 것이다. 아침에는 가이와 체술 훈련, 그리고 저녁에는 시즈네의 연구실에서 약물 제조를 연습하며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냈다. 연구실은 시즈네가 사는 집의 지하에 있는데, 사방이 높은 선반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선반 위는 온갖 독과 해독제가 들어 있는 병들로 가득했다. "그러고보니 오늘 영주가 마을을 떠난다지?" "……." 정적속에서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채 약물을 제조하고 있던 나는 시즈네의 그 말을 듣고 멈칫 했다. 그야 잊고 있었던 것은… 잊을 수가 없는 일이지만, 그 동안 가슴으로 외면하고 있던 것들, 생각하기 싫은 것들이 다시금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됐어…?" "응?" "영주의 딸… 결혼한다고 했었잖아……." "아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영주가 어떻게든 밀어붙인 모양이야." 그 분의 딸이 상대방 남자에게 아주 단단히 빠졌나 봐. ─하는 시즈네의 말에,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누구 남자 아니랄까봐, 인기 하난 참 끝내준다니까. 어렸을 때는 그래도 전부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들이었는데… 지금은 차마… 뭐라 말을 이을 수가 없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오늘은 그만 돌아가서 쉬어." "아니, 조금만 더 하고 싶은데. 그러면 방해가 될까?" "방해될 것은 없지만 네가 무리하다가 쓰러지면 츠나데 님께 면목이 없잖아." "……." 집에 가기 싫다. 가면 싫어도 느낄 수밖에 없으니까. 그 사람의 흔적으로 가득한 방, 그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베개, 그리고 무엇보다 며칠 동안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벽 너머의 또 다른 집. 거기서 오는 허무함과 쓸쓸함. 하지만 시즈네의 말대로, 모처럼 츠나데 님의 밑에서 배울 수 있게 되었는데 행여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녀에게 면목이 없다. 자기 관리도 안 되는 무능한 제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집으로 돌아가서 내일을 위해 충분히 쉬어 두어야 할 것이다. (…) 맨정신으로 눈을 감고 있자니 괜스레 싫은 생각만 자꾸 들어서 술의 힘을 조금 빌릴 셈이었다. 기분이 몽롱하고 편안해지면 푹 잠들 수 있겠지. 그러나 술 한 모금에 도리어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마도 어떠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던 힘이 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나 취하든 잠들고 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절제 없이 술을 마셨다. 문득 차가운 밤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깨닫고보니 어느새 복도로 나와 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아, 기억났다. 술에 취해 막 잠들려는 순간에 벽 너머로 기척이 느껴져서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나왔다. 며칠 만에 집에 돌아온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거의 무의식중에 움직인 것 같다. 노크를 하고 싶은데 손이 파르르 떨리며 좀처럼 말을 듣질 않는다.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다. 의식이 짧게 끊겼다 돌아왔다를 반복한다.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몸이 앞으로 기운다. 어, 어어, 나 쓰러진다. 뭐지, 뭔가 굉장히 편안하다.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고 따뜻하다. 내 침대인가. 아 그렇구나. 내일을 위해서 슬슬 자지 않으면 안 되겠지. . , .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다. 상당히 귀에 익은 목소리다. 벌써 아침인가. 좀 더 자고 싶은데. 어째선지 팔이 아프다. 붙잡힌 것인가. 누구에게? 왜 이렇게 힘이 들어가 있는 거지. 그러고보니 조금 전에 이름을 부를 때도 약간, 뭐랄까, 화를 내는 것 같았다. ", 정신차려. 어떤 자식이랑 이렇게 될 때까지 마셨어?" "음… 으음……." "요즘 가이랑 오전 훈련 끝나면 매일 어딘가로 간다면서.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으음… 음음… 음…." 굉장히 익숙했던 것이 남자의 날카로운 말투에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졸려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하지만 모르는 남자의 품에 안겨서 잠들면 안 된다. 이래 봬도 나는 임자가 있는 몸이라고. "!" "으음… 놔… 이거… 놓으란 말야……." 꽈악,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 나를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어째서.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붙잡힌 손목이 아프고 무섭다. 가지 않으려고 버티자 단단한 팔이 뒤에서 나를 휘감는다. "싫어… 싫어어…!" 치한이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이 치한 놈이 나를 끌고가서 파렴치한 짓을 하려고 한다. 정신차리자 . 넌 지조 있는 여자야. 아무에게나 몸을 허락하면 안 돼. 빼앗기는 건 더더욱 안 돼. "싫어, 싫어…! 카카시…! 도와줘…!" 문득 힘이 사라지는가 하면 어이가 없다는 듯한 실소가 들려온다. 버티다 버티다 다시 휘청 하고 몸이 기운다. 쓰러지려는 나를 그가 붙잡아서 안아 올린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며 현관문을 닫는다. 이젠 도망칠 수 없다. "내려줘…! 너 누구야…!" "누구인 것 같은데?" "치한…!" 나를 어딘가에 내려놓은 뒤 그가 방을 나간다. 침대인가. 굉장히 푹신푹신하다. 이대로 잠들면 위험한데 더는 참을 수가 없다. 편하고, 포근하고, 무엇보다… 아까 맡았던 익숙한 냄새… 왠지 가슴이 울컥하더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윽… 으흑… 흑흑……." 어느덧 다시 내게로 돌아온 남자가 내 몸을 일으켜 앉게 한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에다 불이 모두 꺼져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가 한손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손에 쥐고서 반대쪽은 내 턱을 붙잡는다. 이윽고 차디찬 것이 입안으로 들어온다. 얼음물이다. "음… 음음……." 차가운 물이 피와 섞여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열이 가라앉으며 흐릿했던 시야가 조금 선명해졌다.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하얀 머리카락. 눈 코 입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입술 근처에 점이 있다는 건 용케 알았다. 손가락으로 그것을 딱 가리킨다. "어, 치한 아저씨도 요기 점이 있네! 매력점! 하하핫!" 꺄르르 웃다가 기운이 빠져서 몸을 축 늘어뜨리자 머리맡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남자가 지저분하게 엉켜 있는 내 머리카락을 익숙하게 쓸어넘겨 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붙잡았다. "아저씨… 저기……." 졸음 폭풍이 밀려온다. 입은 계속 말하고 있는데 머리는 이미 반 이상 잠들었다. "저기… 부탁이… 있어요……." 잠시 침묵이 맴도는가 싶더니, 남자의 대답이 나지막이 들려온다. "뭔데?" 무뚝뚝한 말투지만 지금은 별로 무섭지 않다. "카카시 좀… 불러줘요……." "불러주면 뭐 해줄 건데?" "음……." 서서히 감각이 둔해지며 어둠의 저편으로 넘어가는 도중, 무언가 잠든 나의 의식을 두드려 깨웠다. 뭔지 잘 모르겠지만 몸이 뜨겁다. 그리고 발끝에서부터 이상한 감각이 올라와 배가 간질간질 하고 저릿하다. 마치 이것은─. "아…!" 키스였는데. 갑자기 하반신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진다. 또 다시 의식이 끊겼던 건지, 내 머릿속에서는 키스에서부터의 중간과정이 완전히 생략되었다. 그만큼 충격이 커서 넋을 놓고 있으니 남자가 내 다리를 휘어잡고 멋대로 제 허리를 움직인다. 한동안 하지 않았기에 지금 아랫쪽은 처녀와도 같은 상태가 되어 있다. 억지로 처녀막을 찢고 들어온 듯해서 아프다. "아아…!" 뜨거운 눈물이 여러 갈래로 나눠져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순결을 잃었던 날도 이렇게 아팠었는데. 내가 아파하든 말든 남자는 개의치 않고 쾌감을 쫓는다. 정말이지 제멋대로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얄미운 존재인데 어째서 몇 번이고 사랑하게 되는 걸까. 저항 같은 건 생각도 못했는데 어쩌다 보니 다리를 닫았다. 그게 거슬렸는지, 남자가 내 무릎을 꽉 움켜쥔다. 그리고 이쪽에서는 더 이상 멋대로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 아까도 느꼈던 것이지만, 이 남자, 어째선지 내게 단단히 화가 나 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거칠게 다루고 아프게 하는지 모르겠다. "괴로워?" 남자의 목소리가 어느덧 조금 거칠어진 숨과 섞여 들려온다. "하지만 이게 맞잖아. 네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온 거잖아." 내게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가 상체를 숙여 내게 다가온다. 날카로운 이빨을 세워 목을 깨문다. 체감하는 아픔으로는 살점이 뜯겨져 나가는 줄 알았는데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 단지 그 자리로 눈물이 흘러내릴 뿐이다. "너도 나한테 돌아오고 싶었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아프게만 하지 않으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에 아이처럼 흐느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제 뜻대로 되는 것이 퍽이나 즐거운 듯 그가 피식 웃는다. "너는 어떤 자식이랑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난 기분이 참 뭐 같았어. 얼굴만 보고 다가왔다가 겁먹고 도망치는 꼴이 가관이더군. 그 따위 헤픈 생각으로 대체 뭘 얻으려 했던 거지?" 남자의 손이 나의 머리카락을 헤치고 들어온다. 그리고 은근히 움켜쥐어서 또 다른 아픔으로 내게 다가온다. 뜨거운 숨결이 귀에 닿으며 겁먹은 나를 살살 달래는 듯하면서도 강하게 옭아맨다. "내 전부가 여기, 너에게 있어."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가 내게 속삭인다. "그러니까 다른 여자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어." 살벌하면서도 달콤한 속삭임이다. 넋이 나가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로도 그것만은 분명하게 알겠다.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을 말해주듯이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고, 몸은 더 뜨겁게 달아올라 녹아내릴 것만 같다. "다른 자식에게 넘겨줄 생각도, 전혀." 이미 충분히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내게 바짝 밀착해온다. 그리고 나를 자신의 품안에 완전히 가둬 버린다. 몸짓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집요함이 느껴진다. 그의 심장도 나만큼이나 빠르게 뛰고 있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끌어안는 것 같다. 왜 머리카락을 움켜쥐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 보니 내 머리카락 한올까지 놓치지 않을 셈인가 보다. "내가 조금 심하게 굴어도, 이기적이어도, 더는 나를 미워할 수 없겠지?" "아… 으… 흑……." "이제 이런 나까지 전부 받아들여. 익숙해져. 무슨 말인지 알겠어?" "으… 흑흑……." 뜨거운 열기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비집고 들어온다. 내게서 멀어지는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다. 그가 내 팔을 거칠게 잡아당겨 반강제로 엎드리게 한다. 그리고 다시 밀착해오더니 조금 전과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나를 멋대로 흔들고, 날카로운 이빨로 깨물고, 아파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를 붙잡아 짓누른다. "하아… 하아… 하……." 지금 내 기분을 말로 설명하자면 짐승에게 살이 다 뜯기고 가죽만 덜렁 남은 것 같다. 그야말로 너덜너덜. 술주정 두 번 부렸다간 뼈도 못 추리겠네. 온몸이 부서질 듯 아프다. 그래도 덕분에 술은 완전히 깼다. 내 오늘 당한 일들을 그대로 기억해놨다가 언젠가 복수해줄 것이다. 그의 말대로 사랑하기 때문에 차마 미워할 수는 없겠지만. 이제 만족 하냐, 나쁜 자식아. 물어도 대답은 들을 수 없다. 내게 평소에는 잘 하지 않던 팔베개를 기꺼이 해주고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피곤했는지 코고는 소리까지 작게 들린다. 자세한 얘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오늘은 그에게도 여러가지로 골치 아픈 하루였던 것 같다. '잠도 다 깼고… 날이 밝을 때까지 공부나 할까…….'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몸을 일으키는 찰나, ", 이리 와." 시트와 몸이 마찰하는 소리에 깨신 하타케 선생님. (…) "저, 공부하려고요." "일단 자고 일어나서 해." "안 졸려요." "선생님 말 들어야지." "……." 여부가 있겠습니까. 얌전히 그의 팔을 베고 눕는다. 나른한 웃음 뒤에 감춰져 있던 무서운 집착을 한 번 맛보고 나니 두 번 다시 이와 같은 수모를 겪고 싶지 않은 내 몸이 먼저 그를 거부하는 것을 거부한다. 아카데미에 다니던 시절에도 그랬지만 역시 선생님께 반항하면 괜히 나만 힘들어진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변하지 않는 법칙, 조강지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언젠가 자신에게 그대로 다 돌아오게 되어 있다. 이번에는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지만. 듣자하니 영주와 그의 딸 문제로 바쁜 동안에, 내가 츠나데 님께 다른 남자를 소개 받아 만나고 있었다고 오해를 했던 모양이다. 내가 시즈네나 사쿠라처럼 그녀 밑에서 배우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말이다.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자는 얼굴에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하타케 군이 있어서 마치 천사 같다. 당시의 순수했던 마음도 그대로 이어졌으면 좋았을 텐데. 본의 아니게 내가 그의 마음속에 악마를 만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누군지 알면서, 뭐가 걱정이예요. 천사에게 어울리는 백색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넘기고 이마 위에 살며시 입을 맞춘다. 그가 눈을 뜨더니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다시 키스를 해온다. 내게 사랑을 말하지는 않지만 그만큼 뜨거운 것이 입술을 통해 가슴으로 전해져온다. "내가 영주의 딸을 마음에 들어할 거라 생각했어?" "조금은요." "다시는 나를 의심하지 마. 난 할 수 있어도 넌 안 돼."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넌 감히 그럴 수 없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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