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근한 뒤 복원작업을 돕다가 돌아오면 녹초가 된다. 그렇지만 저녁마다 카카시와 합심해 집을 정리했다.
솔직히 나 혼자일 때는 대충 넘긴 부분도 있었고, 아예 생각조차 못했던 부분도 있었다. 조금씩,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다. 청결은 기본. 그 위에 따스함을 더한 보금자리다. "청소는 끝났고, 책장 정리를 해 볼까!" "좀 쉬지… 안 힘들어? 내일 계속 하자." "너야말로 힘들어 보이는데 환자답게 TV나 보고 있어. 듣자하니 오늘 송전탑 수리가 끝난다는 모양이야. 애들이 신나서 떠들어대더라. 한동안 아카데미에도 못 나갔으니까 지루해 혼났겠지." 책들이 와르르 무너지며 반가운 물건 하나가 튀어나왔다. 3년 전까지 일기장으로 썼던, 얼룩진 다이어리. 그리운 마음에 펼쳤다가 걸레도 내팽개쳤다. (…) 26살의 여름이었다. 늦은밤까지 술자리가 이어졌다. 일찍이 얼굴이 붉어진 동료들은 숨 막힐 듯 뜨거운 여름의 열기에 연신 땀을 닦았다. 빈 그릇이 나가고, 또 새로운 음식이 들어오고, 그러면서 가지각색 술병들이 구석에 쌓여 갔다. 다른 녀석들은 커다란 맥주 잔을 수차례 비우고도 시원찮은 듯했지만 나는 증류주만 조금 마셨다. 딱히 주량을 넘지도 않았는데 그날은 정신적으로 지쳐 있었기 때문인지 금세 취기가 올라왔다. ", 어디 가?" "집에. 들어가서 잘래." "아직 잠들긴 일러, 이제 시작이라고. 끝까지 마시자!" "나는 너희들만큼 술이 강하지 않아. 이따가 집에 데려다 줄 거 아니면 붙잡지 마. (휘청)아고고… 봐, 취했잖아. 아까도 말했듯이 지금 내 마음은 술로 위로받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고백했다가 차였다는 둥, 선배에게 돈을 뜯겼다는 둥, 네녀석들의 그런 시답잖은 고민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끅. 회비는 두고 갈게. 꿀꺽하기만 해 봐라. 우이씨. 동서남북 누가 앉았는지 다 외웠어!" "시답잖다니, 너무하네. 아아, 알겠다. 추모식 때 또 펑펑 울었지? 너, 그… 뭐였더라. 하도 오래 돼서 이름도 기억 안 나. 확실히 너와 비길 수는 없지만 내 연심을 무시하지 말라고! 차인 사람을 두 번 울리는 거야! 나느으은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렸단 말이야!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그치, 카카시? 마시자!" "나도 취했는데……." 카카시는 10대 후반까지 암부에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 앞에서도 좀처럼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20대에 접어들었을 때부터 조금씩 회식자리 같은 곳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처럼 증류주만 약간 마시고 취했다는 말에 처음 알게 됐다. 아, 만만찮게 약한 녀석이구나.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했던 저녁이 막바지에 접어들 때 즈음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밤길을 걸었다. 쓰르르쓰르르. 매미 울음소리가 하도 우렁차서 또 하나의 발소리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같이 돌아갈까?" 갑자기 하얀 머리가 옆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실연남에게 붙잡혀 밤새 하소연을 들어야 할 운명이었을 터인데. 어떻게 빠져나왔지? 나도 모르게 멍하니 쳐다봤다. 뒷쪽의 건물로부터 새어나오는 빛을 등지고 선 그가 나른하게 웃었다. "옆집으로 이사오셨죠…?" "이사한 게 언젠데! 둔하구나! 하지만, 뭐, 그렇겠네… 다른 이웃들과는 전부 인사했는데, 어째선지 선생하고는 만날 수 없었어. 찾아갈 때마다 비어 있는 것 같더라구. 일부러 피하나 싶었다니까." 불편한 상황을 피할 수 있다면 당연히 피한다.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나가거나, 늦게 들어가거나. 그러다 딱 마주친 게 하필이면 마을을 위해 싸우다 순직하신 분들의 추모식 날이었다. 얼굴이 눈물로 범벅된 채, 당황한 나머지 손수건까지 빌려 썼다. "일부러 피한 것 맞습니다." 이유 같은 건 덧붙이지 않았다. 어차피 뻔했으니까. 처음에는 불편해서. 추모식 이후부터는 쪽팔려서. 게다가 나는 지쳐 있었다. 갈라진 목소리로 떠들어대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담백하게 인정했다. "……." 나란히 걷던 중 한 명의 발소리가 뚝 끊겼다. 두어 걸음 앞에서 멈추어 뒤를 돌아보았다. 어렸을 때처럼, 차라리 혼자 내버려 두길 기대하면서. 그러나 카카시는 여전히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불쾌한걸." 피차일반이잖아. -라는 표정을 지으면 납득하겠지. 늘 그렇듯 무시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확신이 깨진 것은 카카시의 차가운 시선을 나도 모르게 피해 버린 순간이었다. "하하하, 놀랐어? 예상했던 반응과 달라서?" 딱히 비웃음을 예상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거기서 조금은 안심했는지도 모른다. 다시 눈을 마주쳤을 때 카카시가 웃고 있어서. 두 사람은 자연스레 다시 보폭을 맞추어 걸었다. "어렸을 때는 감정표현에 서툴렀지. 보다시피 지금은 달라. 암부에서 나온 지 한참 됐으니까 감출 필요 없잖아. 일부러 피했다는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화낸다구." "그렇네요… 죄송합니다." 무얼 사과하는 거야. 잘생긴 외모에, 웃는 얼굴 따위에 속으면 안 돼. 철썩철썩. 자신의 뺨을 때린 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이었는데 뒤따라온 두통은 진짜였다. 간신히 버텨냈을 때, 내 몸은 이미 앞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괜찮아, ?" 내가 잘못 들었나. 방금 재수뿡이 나를 이름으로 불렀던 것 같은데. 아, 모르겠다. 의식이 잠시 끊겼다. 손끝에 딱딱하고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나처럼 삐딱하게 기울어진 서클렛. "오늘은 마시지 않는 편이 좋다고… 말해 주고 싶었는데……." 이 재수뿡이 뭐라는 거지. 곧바로 두번째 공격 신호가 머릿속에서 대앵대앵 울려댔다.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고민할 여력 따윈 없었다. 추모식이 끝난 뒤 매일 뜬 눈으로 밤을 지샜던 주제에 무모하게 술을 마신 탓이었다. 같은 방향? 뭐, 좋다 이거야. 어둑한 길 위에서 익숙한 실루엣의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나는 침대에 뛰어들 생각만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막상 집에 도착하자,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현관문에 쿵 부딪혀 쓴맛을 보고 나서야 집이라는 걸 알았다. 아프긴 무지 아픈데, 하얀 머리털이 내 얼굴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엉덩이 근처에서 이상한 손길을 느꼈다. 술에 취해 흐리멍텅한 상태에서도 사고는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정신이 들어? 저기, 열ㅅ…" 퍽!!!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내 삶을 통틀어 가장 강력하고 깔끔한 스트레이트 펀치였다. 카카시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이 사라짐과 동시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새빨간 피 한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젠장할, 오늘은 상사 코피 터뜨린 날이다. 후덜덜. 카카시는 얼음이 되어 버린 나를 보고 폭소를 터뜨렸다. '성추행범으로 몰린 것도 모자라 억울하게 맞기까지 했습니다.' -라는 남자의 광기인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냥 무서웠다. "들어가기 싫었어?" 어쩌면 싫었을지도 모르지만 중요하지 않고 내가 박살낸 게 하필이면 하타케 카카시였고 재수뿡이지만 엄연히 내 상사였고 드물게 벗고 있던 마스크까지 빨갛게 물들여 버렸고 내일부터 얼굴이라도 마주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빌어먹을, 하나도 모르겠다. "말로 하지. 때리고 그래." 그날 달의 얼굴은 유난히 파랬다. 딱히 처음 보는 것도 아닌 카카시의 머리카락이 은은한 빛으로 물들어 시선을 빼앗겼다. 신기하게도 여러 가지 변수들이 하나의 플래그로 이어져 있었다. "죄송… 읍! 으음!" 노멀한 일상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액션씬이 나왔다. 코미디인가 멜로인가 갸우뚱했더니 성인 영화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요약하자면 그랬다. 잘생긴 옆집 남자 출연. 복도에서부터 19금. "외박하게 놔둘 수는 없지." 짤그랑. 카카시가 내 엉덩이에 달려 있던 포켓에서 열쇠를 꺼내 보이며 나른하게 웃었다. 원래 나른한 인간이지만 평상시 그것과는 달랐고, 흥분되어 달뜬 목소리가 영락없는 주정꾼이었다. "너를 침대에 데려다 놓을 거야." 어째서 순순히 따랐는가. 다음날부터 새롭게 인생을 고찰해 보는 계기가 되었지만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1) 피곤했다 2) 술에 취했다 3) 4년 동안 애인이 없었다 4) 의외로 키스가 싫지 않았다. 덜컥-. "아이쿠. 다른 방인가?" "하아… 하아…….(끄덕)" "미안, 난 이쪽을 침실로… 음음……." "으음… ㅂ핫…! 하아… 하아… 하……." 내 몸이 침대 위로 수직낙하했다.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다. 살살 좀 내려 놓을 것이지. 구시렁대다가도, 얼굴을 보니 할말이 없어졌다. 내 생각을 읽은 카시시가 개의치 말라는 듯 피를 슥 닦았다. "가만히 있어 봐요." 나는 그의 뺨으로 손을 가져가 과감히 챠크라를 흘려 보냈다. 음주 후 누군가를 치료하는 건 의사 자격 박탈의 사유가 되기에 충분하지만. "…아프죠?" "이제 괜찮아." 문제는 다음이었다. 둘 다 입을 다물어 버려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문득, 두 사람의 팔이 교차했다. 카카시가 남자치고는 미려한 손가락으로 내 뺨을 쓸어내렸다. "다행이에요… 왼쪽 눈에 맞기라도 했으면……." "그러게, 내 몸에서 두번째로 자랑스런 부분인데." "오비토 군에게 당장 사과하세욧!!!" "하하하하." 카카시는 능청스레 딴청을 피웠다. 나를 향해 있던 시선과 얼굴을 만지던 손이 멀어졌다. 희한하달까, 이상했다. 술 때문에 기분이 들떠 웃음이 나오면서도 어째선지 가슴이 뭉클했다. 그는 무덤덤하게 서클렛을 벗었다. 사륜안과 흉터가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를 보고 있네요." "맞아." 카카시의 나른한 미소에 잠시 시야가 밝아졌다고 느꼈던 게 딱히 술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미남이 웃었을 뿐. 조금씩 현실이 보이고 있었다. 두려웠다. 머리가 점점 맑아지는 것이. 내일이 되면 붉은 눈동자만을 기억할 테니까. 술이 깨고 나면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를 것 같았다. "어떡할까나. 이렇게 되면 레벨이 꽤 높아지는데. 이 녀석이 내 챠크라를 야금야금 갉아먹거든. 그치만 서클렛은 확실히 거추장스럽고, 당신이 어떤 반응을 보여 줄지도 기대되네. 해 보지 뭐." "저는… 딱히……." "괜찮아, 거뜬히 버티니까." "경험이 많은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어디까지 말하게 할 셈이야. 그냥 넘어가." 나는 두꺼운 조끼를 벗은 다음 셔츠와 고군분투하다 카카시의 도움으로 두 팔을 빼냈다. 카카시가 쓴웃음을 지은 것은 그때였다. 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달까, 이미 한방울 또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으이그……." 어두운 방이기도 하거니와 눈물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재수뿡이든 뭐든 어렸을 때부터 인기 하난 좋았으니까. 당연히 경험도 많을 테니까. "확실하게 정해 줘서 고마워." 쪽-. 뺨에 닿더니 입술로 다가왔다. 자기 입으로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선언해 놓고 애인처럼 키스하는 건 어디서 나온 뻔뻔함이었을까. 어쩌면 그에게 들켰을지도 모르지만, 최대한 은밀하게 마른침을 삼키고 시트를 꽉 그러쥐었다. "저기… 가지고 있죠?"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그, 그래서 없이 하겠다구요?" "미안한데 어째서 나는 항상 준비가 되어 있을 거라 생각해?" 애인 없이 지내는 동안, 한번도 잠자리를 가진 적 없었다. 딱히 애인이 아니면 안 된다든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카카시와 그런 일도 할 수 있었던 거다. 다만, 사랑하지 않는 누군가에게 그럴 마음이 생길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여자들한테 인기 많잖아요." "…관두자. 어쨌든 내 손에 있었어야 자연스러운 물건임은 맞으니까." 나는 누구와 달리 인기가 많지 않다. 보건교사로서 보호의 중요성을 반나절도 넘게 주절댈 수 있지만, 결정적으로 '나'에게는 딱히 필요없는 물건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아!" 4년 만인데다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기분 좋았지만 방심해 버린 만큼 빠르게 밀어닥쳤다. 쾌감은 쾌감대로, 아픔은 아픔대로. 연애를 할 때는 몸도 마음도 준비가 되어 있어서 때가 되면 저절로 열린다는 느낌이었다. 의외로 기억이 나쁜 쪽은 몸이었다. 4년 동안 잊고 살았던 일을 하려니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카카시가 왼쪽 눈을 가리며 괴로운 듯 신음했다. "당신은 왜 아파하는데요…?" "그게, 사륜안 때문이야. 내가 특정 인물에게 '나쁜짓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만으로 가끔 이래. 오랜만이니까 그냥 좀 거칠게 시작하고 싶었을 뿐인데 정말이지 가차없네. 누가 우치하 아니랄까봐." 킁. 코를 삼키며 쌤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웬만하면 카카시 쪽은 보지 않으려 애썼다. 얼굴을 보면 이름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갑작스런 변덕으로 하게 되었을 뿐인데, 이름을 불러 봤자─. "내일도 문 두드릴 거야." "에…?" "나와서 인사해. 알았지?" "네… 아… 으…아아아앗!" 다음날 아침에는 이상야릇한 꿈을 꾼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물론, 숙취 탓도 있었겠지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아서 잠들어 있는 그를 놔두고 집에서 나와 버렸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26살, 여름. 외로웠던 날, 어쩌면, '누구라도 좋으니까 데이트신청 해 줘!'라고 한번쯤은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술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집으로 돌아가서 잘 생각밖에 없었다. 재수없는 자식. 갑자기 친근한 이웃의 얼굴을 하고는 불쑥 나타났다. 왜 하필이면 또 옆집이람? 이번에는 최악의 술주정을 부려 놓고 다시 인사하러 오겠단다. 나를 얼마나 우습게 알고 있으면. 그런 약속, 지금쯤이면 잊어버렸겠지. 나타난다 해도 어제의 일은 실수였다고 말할 게 분명해. 어지간히 착각으로부터 깨어나시지. 누굴 17살의 순진한 여자애로 보는 거야. 나도 그렇게 구질구질한 여자 아니거든. 서로에게 실수한 셈치고 끝내면 되겠네. 어쨌든 얼굴만은 봐 줄만 하고, 그런대로 좋았으니까. 술이 웬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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