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샤워 후 방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레포트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초안을 완성해서 수정하는 작업이 남았다. 핵심만 남겨 두고 불필요한 부분은 지우는 첨삭과정, 오류 정정 등.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지만 적어도 츠나데 님께 꾸중을 듣지 않을 정도의 레포트를 제출할 수 있다. 언제나 만드는 것보다 고치는 데 시간이 더 많이 든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카카시는 침대에 걸터앉아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내 머리카락을 어깨에 두르고 있던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말랐을 때 부스스해지지 않도록 가지런하게 정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정한 손길에 레포트를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그럴수록 두 눈을 부릅뜨고 글자를 씹어먹을 듯 노려보았다. 그러나 머잖아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향긋한 비누냄새에 긴장이 저절로 풀렸다. 잠깐만 쉬었다 할까. 망설이면서도 눈이 스르르 감겼다. "츠나데 님께서 과제를 내 주신 거야?" "네, 이번에는 의학계 위인들 중에서 각자 한 명을 정해 연구하는 거예요. 저는 최근에 몰두하고 있는 책의 저자로 정했어요." "어디 보자, 센쥬 토비라마… 2대 호카게 님이시잖아. 여러 방면에 박식하셨다는 건 알았지만 의학에도 정통하셨는 줄은 몰랐네. 저서까지 남기신 거야?" "한 두 권이 아니라 엄청 많이 남기셨어요. 워낙 업적이 많으셔서 보통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해 잘 모르더라구요. 저희한테는 너무 당연하달까… 토비라마 님께서는 하시라마 님, 츠나데 님과 더불어 의학계의 대부 중 한 명이세요." 나는 얼마전부터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는 토비라마 님의 사진을 카카시에게 보여 주었다. 자기 사진이 아니어서 조금 아쉬워하는 것 같았지만 누군가에게 동경심을 품고 있는 내 모습이 한편으로는 보기 좋은 모양이었다. 부디 이번 과제는 칭찬받게 해주세요. 간절히 기도하며 사진을 원래 자리에 돌려 놓았다. 사진이라 해도 불의 나라 역사관에서 가져온 카탈로그를 오려낸 것뿐이지만 어쨌든 소중한 물건이었다. 욕심 같아서는 츠나데 님 저택에 있는 사진을 한 장 가져오고 싶었다. 특정 인물을 연구할 때는 그 사람의 학문뿐 아니라 인간적인 면까지 반드시 함께 연구해야 한다고, 가능하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배웠다. 내 연구 대상은 이미 돌아가신 분이라 직접 만나 뵐 수 없으니까, 하다못해 사진이라도 가지고 다니면서 옆에 계신다고 상상하고 싶었다. 그밖에 이유가 있다면… 잘생겼으니까. 미남은 언제 봐도 흐뭇하지 않은가. 흠흠. "당신은 토비라마 님에 대해서 특별히 더 아는 거 없어요? 어렸을 때부터 책 많이 읽었잖아요. 내가 모를 만한 사실이 있으면 얘기해 줘요. 가족사에 대한 정보는 쉽게 찾을 수 있는데, 개인사에 대한 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더라고요." "글쎄, 기억나는 게 하나 있긴 해. 토비라마 님께서는 하늘로부터 많은 재능을 받으신… 어찌 보면 질투날 정도의 천운아시잖아? 근데 딱 한 가지, 여자복은 별로 없으셨던 것 같아." "왜요?" "혼인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과 사이가 멀어지셨거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이후로 한 번도 찾지 않으셨대."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요. 토비라마 님의 직계 자손은 어째서 없는 걸까 하구요. 만약 사실이라면 씁쓸한 얘기네요. 오로지 마을만 생각하면서 일만으로 청춘을 다 보내신 거잖아요. 누구보다 능력 있고… 게다가 잘생기셨는데…(발그레)" "나랑 같이 산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남자 얘기만 나오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구만. 이제는 조상님이고 뭐고 가리지 않는 거지?" 엎드려 누워 있던 나는 등에 한기를 느끼며 조용히 레포트의 페이지를 넘겼다. 갑자기 뒤통수에 손이 닿아서 움찔 했다. 카카시가 조심스레 내 머리카락을 옆으로 치우고 겉으로 드러난 한쪽 귀에 키스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가벼운 마찰을 일으킨 뒤 천천히 멀어졌다. "원한다면 집중할 수 있도록 혼자 있게 해줄게." "아, 아니에요… 책에서 정보를 더 찾아봐야 할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저기… 오랜만에… 같이 읽고 싶어요……." "같이는… 정말 오랜만이네.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인가. 지금의 당신에게 모르는 한자가 많은 것도 아닐 텐데, 갑자기 왜?" "왜냐니… 그때가 그리워서죠……." 오늘은 과제를 위한 휴가를 얻었다. 말하자면 '사가독서'의 날인 셈이다. 스승님께서 공부하라고 특별히 허락해 주셨는데 보기 좋게 딴생각을 해버린 나는 못난 제자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조금은 응석이 부리고 싶었다. 최근에는 계속 바빴던 탓에 그다지 시간을 보내지 못했으니까. "공부하고 있는 네게 손을 댔다… 츠나데 님께서 아셨다간 그날로 아작날지도… 하지만 뭐,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우리 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어? 그치?" 정말 믿고 있는 건지 믿고 싶은 건지. 그의 나른한 웃음이 좋지만 가끔은 정작 중요한 부분을 가려 버린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쨌든 침대 맡에 나란히 기대어 앉아 두꺼운 책을 펼쳐 들었다. 새록새록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설레기도 했다. 그때와는 많은 것들이 달라졌으니까.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습관처럼 만지고, 키스하고… 문득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나 멀리 돌아와 버린 탓에. 누가 더 오래 기다렸는지, 그래서 누가 더 사랑하는지, 마치 겨루기라도 하듯 자신의 마음을 서로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은 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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