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분주히 일어나 반나절 동안 방정리를 했다. 그냥 쓸고 닦는 것 정도가 아니라, 이사를 방불케 하는 엄청난 일이다.

 먼저 커다란 블라인드를 떼어내고, 인형과 타올 등의 비교적 작은 것들을 정리했다.

 시작한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그 동안 내가 소중히 간직해왔던 오비토와 관련된 물건들.

 줄곧 내 안에 살아 있는 듯했던 그였기에, 과거의 나는 이런 자신의 마음이 아마도 끝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는 내게서 점점 멀어져갔다. 그래서 딱히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놓아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추억의 한편으로 사라지게 된다. 더는 예전과 같이 누군가 보고 싶어서 혼자 눈물을 흘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엄청난 물건들을 벽장 안에 넣은 뒤 문을 닫으며 속으로 생각한다.

 다시 만나게 될 날까지, 안녕.

 (…)

 힘들어서 허리가 휠 지경이지만 그런대로 수월하게 정리를 마친 것 같다. 옆집에서 날아오는 살림요정 덕분에 최근에는 그나마 집이 깨끗한 편이었다.

 그러고보니 곧 저녁을 먹을 시간이구나. 오늘은 힘들어서 그냥 밖에 나가 사 먹을까 하는 강한 유혹이 물씬 들지만 모처럼의 휴일이니 무언가 만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조금 있으면 그가 돌아올 것이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나를 살뜰이 간호해줬던 그에게 작게나마 무언가 보답을 해야 한다.

 그래봤자 평소에 그가 내어오는 요리에 비하면 맛없겠지만(지난번에 절실히 깨달았다) 어쨌든 그도 피곤할 테니 돌아오면 오늘은 푹 쉬도록 해주자.

 주방으로 나와 냉장고를 열어 보니 얼마 전 하타케 상닌이 장을 봐온 덕분에 재료가 넉넉하다. 지금처럼 그와 거의 동거하다시피 하기 전에는 텅 비어 있는 날이 훨씬 많았는데,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아주 호화스러워졌다.

 정리는 또 어찌나 척척 잘 해놓는지. 이번에 사온 것들도 원래 있던 것들과 함께 날짜 별로 나누어져 있다. 나 혼자였음 절대로 볼 수 없는 광경이랄까 매번 보면서도 새삼 또 한번 경외심을 느낀다.

 어디 팔을 걷어붙이고 시작해볼까. 일단 그 사람이 싫어하는 단 것들은 멀찍이 치워두었다. 그리고 이거랑 이걸, 요래요래, 그리고, 또, 아… 뭐가 이리 복잡해!

 재료들을 줄줄이 꺼내놓긴 했는데 뭐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어느 재료에 어떤 영양소가 있고, 그래서 무슨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가 하는 이론적인 것들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 주방에서 조리를 하는 일에는 익숙치 않다.

 하지만 이럴 때는 하타케 상닌이 조리법을 정리해둔 책을 보면 된다. 싱크대 서랍을 열어, 제법 두꺼운 책을 꺼내 든다. 이것만 있으면 노 프라블럼, 아무리 요리의 초보자라 해도 맛있고 건강한 한끼 식사를 만들 수 있다!

 모처럼 요리를 하면서 그 사람이 사다 놓은 재료에, 그 사람이 써둔 레시피로 만든다는 것이 양심에 쪼끔 찔리긴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이것이 최선이다. 어쨌든 둘이서 맛있게 먹을 수 있으면 그만이지.

 (…)

 TV 드라마에 집중하고 있다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번뜩 정신을 차렸다. 다른 이웃들은 대부분 복도에서부터 인기척을 내는데 하타케 상닌만은 그렇지 않다. 늘 그렇듯 조용하다가 갑자기 문이 덜컥 열린다. 그래서 깜짝 놀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다녀왔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냄ㅅ…랄까, 집이 왜 이래?"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그가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어 주변을 둘러본다. 이 님의 집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이 전부 그 자리에서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방 정리를 했습니다."

 "선생이 방 정리를? 그 동안 정리하다가 이곳저곳의 오비토(?)가 망가질지도 모른다면서 핑계를 대고 안 했잖아."

 "기뻐하십시오, 더는 그 핑계를 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안으로 들어오며 식탁 위에 차려진 저녁 식사를 보고 아주 조금 눈이 커지는가 싶더니, 그가 문이 활짝 열려 있는 내 방을 보고는 정말 놀란 표정을 짓는다.

 "선생, 이사 가?"

 "아니요."

 "근데 방이 왜 이렇게 갑자기 썰렁해졌어?"

 "왜인지 하타케 상닌이라면 아시리라 믿습니다."

 "……."

 조끼를 벗고는 두리번두리번 방안을 둘러보며 서성이던 그가 창문 앞에서 흠칫 하고 뒷걸음질을 친다. 무엇보다 가장 불만이 많았던, 내릴 때마다 오비토의 얼굴이 대문짝 만하게 나오던 블라인드가 더는 보이지 않는다. 놀라우면서도 당황스러운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평정을 되찾으며 입가에 미소를 띤다. 자기를 위해 내가 엄청난 변화를 결심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혼자 하는데 힘들지 않았어?"

 "정리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만 요리까지 하려니 과연 피곤하더군요."

 푸훗, 작게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가 내게 다가와 두 손으로 나의 뺨을 감싼다. 그리고 장난스레 톡톡 두드리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안 하던 일을 하려니까 그렇지."

 아아, 갑자기 시야가 환해지면서 반짝거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하얀 머리카락과 조화를 이루는 검회색 눈동자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다. 새삼스런 생각이지만 정말 미남이다.

 그 동안 의료반의 후배라든지 다른 여자들이 하타케 상닌과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을 해오면 속이 끓었는데 그 마음만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려도 외모가 감춰지지 않을 만큼 잘생겼지 않은가. 게다가 마을의 영예.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은 맘이 들 법도 하다. 그래서인지 이 남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곁으로 돌아오는 것이, 이제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기쁘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린다.

 "배고프시죠? 일단 식사부터 해요."

 "응, 이것 하나만 하고."

 주방으로 가려는 나를 그가 붙잡아 돌아세운다. 마스크에 감춰 있던 붉은 입술이 내 입술을 덮쳐온다. 따뜻하다. 가슴이 쿵 하고 뛰면서 얼굴이 달아오르고 머릿속이 꿈처럼 뿌옇게 물든다.

 "……."

 천천히 입술이 떨어진다. 그가 단단한 두 팔로 나를 끌어안는다. 조금 거친 느낌으로 안아서 일순간 그와 나의 몸이 밀착된다. 평소보다 체온이 높아 포근한 기분이 든다.

 "이것으로 특별히 얘기하지 않아도 알겠지?"

 "잘 모르겠는데요."

 무심한 목소리로 능청스레 대답한다. 그러자 하타케 상닌이 천천히 내게서 떨어지더니 뚱한 표정으로 은근히 나를 노려본다. 어찌 보면 진작 이루어졌어야 할 일인데 내가 생각해도 조금 짓궂은 것 같다. 그래도 잘 하면 그의 귀여운 모습을 볼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에 입을 다물고는 속으로 웃음을 참는다.

 "고맙단 말은 안 할 거야."

 그가 단호하게 말하고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려 버린다. 기대와는 다르지만 이것은 이것대로 나름 귀엽다.

 "이제 만족해요?"

 "응?"

 "나를 온전히 당신의 것으로 만들었잖아요."

 "아……."

 하타케 상닌의 얼굴에 짧은 순간 서로 다른 감정이 교차되어 비친다. 내 말을 듣고 낯빛을 붉히며 기뻐하는가 싶더니 얼마 가지 못해 어두워졌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복잡한 심정이 나타나는 것 같다.

 "아직 온전히라고는 할 수 없지."

 뜻밖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럼 대체 지금 이상으로 뭘 해야 하는 거지. 나는 이미 내 전부를 그에게 주었다고 생각한다. 몸도, 마음도, 그리고 어쩌면 미래까지도. 모든 것이 그가 원하던 대로 되었다.

 "하타케 상닌의 욕심은 어디까지인 겁니까?"

 "나도 몰라. 그래서 가끔은 나 스스로도 무서워."

 "더 원하시는 게 있으면 지금 얘기하십시오."

 "……."

 그가 잠시 침묵한다. 그리고는 나른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린다.

 "일단 식사부터 하자. 모처럼 네가 만들었는데 다 식어버리잖아."

 대화를 끝내고 주방으로 향하는 모습에 왠지 가슴이 초조해진다. 머지 않아 나도 걸음을 옮겨 그와 식탁 앞에 마주앉는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것인지, 뭐가 어찌 되든 복잡한 생각은 그만하고 싶다. 노력할 수 있는 부분은 노력하되 나머지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자. 어차피 그렇게 되기 마련이니까.

 "선생, 요리가 능숙해졌네."

 "그렇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친절하게 정리해둔 책을 보지 않았다면 아마도 만들지 못했겠지.

 "선생이 나를 위해 노력해줘서 기뻐."

 "저에게는 아직 노력할 것이 많습니다. 하타케 상닌께서는 좋으시겠습니다, 더는 절 위해 하실 일이 없어서."

 좀 더 정확하게는 할 필요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봐도 이 관계에서는 내가 을이지 않은가. 설령 그가 내게 상처를 준다고 해도 이제는 면역이 생겨서 웬만한 일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

 고개를 숙인 채 식사를 계속 하다가 문득 하타케 상닌의 손이 멈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방금 전의 내 말을 듣고 묘하게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다.

 "."

 목이 메이는 듯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그가 나를 부른다.

 "예."

 나도 잠시 식사를 멈추고 그와 마주본다.

 "예전이었다면 난 너에게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을 거야."

 "?"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그가 말을 잇는다.

 "나 말이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게을러져. 너와 있으면 따뜻하고, 편안하고… 그래서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해."

 "무슨 말씀을 하시는…"

 "언젠가 완전히 통제를 잃어 버릴 것 같아."

 그의 목소리가 약간 떨린다. 그 작은 떨림의 의미는 나의 머리가 아닌 가슴이 알고 있다. 그만큼 오래 시간 함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속으로 생각을 고르는 동안 침묵이 흐른다. 문득 하타케 상닌이 내게 손을 뻗는다. 그의 손끝이 내게 닿는다. 턱에서부터 뺨으로, 귀로, 천천히 움직여, 흘러내린 머리카락 살며시 쓸어넘긴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마치 데자뷰를 보는 것처럼, 시야에 비치는 그의 모습이 기억속 한 장면과 겹친다. 그리 멀지 않은, 몇 년 전 쯤의 일이다. 그리고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내게 말한다.

 "내가 그걸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내 뺨을 살며시 어루만진다. 이 순간 내 기억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다. 지금 그의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 마침내 나를 손에 넣었다는 승리감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런 나를 이용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가슴이 먼저 깨달을 정도의 익숙하면서도 따뜻한 감정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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