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랜만에 장을 보러 나왔다. 별 것 아니지만 어젯밤 다소 충격적인 일이 있었달까, 야근을 하고 녹초가 되어 집에 도착했을 때 나를 맞이해준 것이 다름 아닌 텅 빈 냉장고였다. 어제는 결국 냉수나 거나하게 들이키고 씁쓸하게 잠들었지만 오늘만은 지친 몸에 확실한 보상을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것저것 제법 많은 재료를 샀다. 될 수 있는 한 신선하고 좋은 것으로 고르려고 장보기에 몰두해 있다가 하마터면 아끼는 제자들을 몇 번인가 그냥 지나쳐갈 뻔하기도 했다. 이제 집에 가서 두 팔 걷어붙이고 힘 좀 써볼까. 보나마나 양이 많아질 테니 나루토를 불러서 같이 먹어야겠다. 아니, 아니, 야마토와 7반은 지금 임무를 떠나서 마을에 없지 참. 녀석, 지라이야 님과의 수행으로 몇 년 씩이나 떠나 있었으면서 돌아온 뒤로도 집을 비워두는 시간이 더 많다. 이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서도 쓸쓸한 기분이 든다. 그럼……. 어라…? 방금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딱히 그런 사람은 없다. 다들 물건을 고르거나 각자의 길을 가고 있을 뿐. 내 착각이었나. 배가 고파서 예민해져 있나. 자신에게 충분한 영양보충이 얼마나 중요한지, 맛있는 음식을 통한 힐링 타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다. 딱히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스트레스가 쌓여서 임무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 곤란하지 않은가. (…) 장보기를 마친 뒤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가는 길. 어제의 야근 덕분에 오늘은 접수대 업무가 비어서 일찍 퇴근했는데도 어느덧 하늘이 살짝 붉은 빛을 띠고 있다. 거리에서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나뭇잎 마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울창한 숲에서는 벌써부터 부엉이의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지금은 워낙 평화롭다보니 새들도 밤낮 걱정없이 지내는가보다. 오비토와 린이 살아 있었다면 이 평화 속에서 함께 웃고 떠들며 지낼 수 있었을 텐데. 바람이 지나간 곳에서 그들의 빈자리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어린 시절, 당시에는 비단 나뭇잎 마을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다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런 시대가 천천히 걷히면서 옛날의 평화가 다시 찾아오고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지금은 친구들을 잃은 것보다 그들과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다만 슬플 뿐이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텐데, 어린 시절의 나는 무얼 그리 화를 냈던 걸까──. 물론 당시에는 하타케 상닌에 대해 잘 몰랐고, 린이 죽었을 때도 그것이 그녀 본인의 선택이었다고는 미처 생각치 못했다. 한때는 하타케 군이 내게서 소중한 두 사람을… 아니, 내 전부를 빼앗아간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너무 억지를 부렸던 것 같기도 하고, 이기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딱히 나만 힘든 게 아닌데. 오히려 그는 더 힘들었을 텐데. '당신 따윈… 당신 따윈 죽어 버려!' '아직 살아 있었구나. 너무 똑똑해서 죽지 않는 거야?' 문득 두통이 일어 손을 이마로 가져간다. 아니, 아픈 것은 머리가 아닌 마음인가. 그건 그렇고 한 번은 내 친구가 하타케 군에게 고백을 했다가 차였던 일이 있었는데, 그 일로 그를 미워하기도 했었다. 어린 시절의 나 님 정말 가지가지했구나. 자기 친구의 마음만 중요하게 생각했던 걸까. 어쩌면 그냥 이성에게 인기가 많은 그에게 질투를 했던 건지도 모른다. 바람둥이였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그가 언제나 홀로 도도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하타케 군도 당시엔 내게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친절하지 않았다기보다는 관심이 없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랬듯이. 우연히 마주치면 그는 단지 인형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어쩌다 그의 시선이 내게 향하더라도 그 눈빛은 너무 차가워서 날카롭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도저히 나를 좋아한다고는 생각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하기사, 상대방에게 죽어버리라는 말까지 듣고 계속 좋아한다는 것도 이상하긴 하다. 설령 좋아한다고 해도 그 마음이 온전치는 못했겠지. 이제보니 지금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그를 탓할 것만은 아니다. 내 과거의 언행이 그에게 조금이나마 영향을 미쳤다면 내게도 잘못이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아──." 좋아, 결정! 오늘은 화해의 의미로, 무진장 뒷북이지만 어쨌든, 하타케 상닌과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하자. 언제나 침묵 속에서 손과 입만 움직일 뿐이니 새삼 정답게는 무리려나. 아니, 아니. 예전이라면 무리였겠지만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나의 만렙 풍둔 주둥아리술이 있는데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기회가 생기면 다시 한 번 과거의 일을 사과하는 것도 좋겠지. 그리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무르익으면… 아아아아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미쳤어, 미쳤어.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길을 가다 뜬금없이 야한 생각이라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누가 보진 않았겠지? 두리번 두리번. "안녕, 선생." 봤다─! 심지어 당사자가 봤다─! 뭐 이런 기가 막힌 우연이… 대체 어디 있다가 나타난 거야, 이 사람은. 기척 없이 다니는 것이 일상생활화 되어 있어서 정말이지 여러 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거워 보이는데 들어줄까?" "아, 아닙니다. 이 정도는……." "이웃끼리 그 정도는 도울 수 있잖아, 어차피 같은 방향이니까. 자, 이리 줘." "……." 그가 내 한쪽 손에 들려 있던 짐을 가져간다. 그리고 집으로 향하는 길을 앞서 걷는다. 그와 두어걸음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서 걷고 있노라면 묘하게 허탈하면서도 쓸쓸한 기분이 든다. 바깥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요즘엔 그래도 제법 연인처럼 지냈으니까, 새삼 위화감을… 아니, 그것을 넘어서 살짝 충격을… 하아……. "선생." "네?" "아까 장보고 있을 때 나도 같은 장소에 있었는데 눈치 못챘지?" "저, 전혀 몰랐습니다." 눈치 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기엔 문제가 많지 않았는가. 첫째로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고, 둘째로 나는 기척을 알아차리는 게 늦고, 셋째로 이 사람은 기척이란 걸 아예 내지 않는 사람이다. "선생은 스토킹을 당해도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끝날 것 같은 느낌이란 말이지-." "아, 아무리 저라도 그 정도는 아닙니다…!" 이래 봬도 닌자인데 스토킹 같은 걸 당하고 있을까보냐. 이 사람 정도로 기척을 숨기는 데 능숙한 사람이 스토커라면 또 모를까. "최근에 길을 가다가 이상한 기척을 느낀 적 있어?" "없습니다만……." "역시 모르잖아." "?" "내 암부 후배들이 선생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궁금해하고 있어. 그래서 몇 명은 몰래 관찰을 하기도 했었나 봐." "에……." 소오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 거지. 내가 혼자일 때? 아니면 지금처럼 길을 갈 때? 어떡하지, 이상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좋겠는데. 애당초 내가 궁금하면 그냥 평범하게 말을 건네면 되잖아. 왜 멀리서 관찰하는 거야. 암부들에겐 그런 게 그냥 일상적인 일인가. 그러고보니 야마토와 사귀고 있을 때도 그랬지. 분명 말한 적이 없는데 이미 알고 있다든지, 심지어 해결까지 해놓았다든지. 야마토는 애인이었으니까 그래도 괜찮았지만 얼굴도 모르는 암부들이 나를 관찰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진다. "암부는 당신처럼 무서운 사람들 뿐이군요." "꼭 그렇지만은 않아. 녀석들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그랬을 뿐이잖아. 하지만 진짜 스토커는……." 그가 문득 걸음을 멈추는가 하면 천천히 이쪽을 향해 돌아선다. 등 뒤의 노을빛으로 인해 그의 앞에는 그림자가 드리운다. "평상시 네가 결코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고 싶어해." 파르르,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올라왔다. "생각해봐, 만약 그 스토커가 선생으로부터 미움받고 있다면 더 집착하게 되지 않겠어?" "그, 그만두십시오…!" "뭘?" "뭐냐니, 제게 겁을 주시는 것 말입니다…!" 생각하기도 싫다. 어휴. 팔에 닭살이 돋아서 괜스레 소매를 털어내는데, 문득 그가 내게 한걸음 다가선다. "선생, 어렸을 때 이따금씩 벽이라든가 나무에 숨어서 오비토를 지켜보곤 했었지?" "그랬습니다만. 짝사랑이 다 그런 것 아닙니까?" "만약 그때 선생에게 그냥 숨는 것보다 더 효율적으로 상대방을 지켜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능력이 있었다고 한들 저는…! 저는… 저……." 어째서 깔끔하게 부정할 수 없는 거지. 자신의 안에 숨겨져 있던 스토커의 본능을 깨닫기라도 한 것인가. 생각하기도 싫지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 당시 자신이 오비토에게 푹 빠져 있던 것을 고려하면 충분히.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야." "네?" "벽에 숨는다든지, 나무 뒤에 숨는다든지, 그런 뻔한 방법은 쓰지 않았을 거라고."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언제나 하던대로, 기척을 숨기고 조용히 다가가서 지켜볼 거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데." "상대방을 만만하게 보고 계시는군요." "으응, 그럴만 하거든.(너털웃음)" |
<제작> Copyright ⓒ 공갈이 All Rights Reserved. <소스> Copyright ⓒ 카라하 All Rights Reserv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