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를 갖고 천천히 연습하는 편이 좋을까. 아니면 과감히 해치우는 편이 좋을까. 그런 것을 고민하고 있다가 시간이 무의미하게 흘러 버렸다. 여전히 말을 놓는 것은 어색하다.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타입, 언제까지 그런 변명이 통하겠는가. 이루카는 얼마 전부터 카카시를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원래 나와 똑같은 타입의 녀석인데, 무슨 계기가 있었는지 몰라도 요즘에는 같이 점심을 먹기도 하면서 제법 친하게 지내는 모양이다.

 오늘은 드물게 카카시보다 먼저 눈이 떴다. 그러니까 계획했던 건 아니지만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서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식사를 차렸다. 그런 다음 준비를 갖추고 방으로 갔다.

 "카카시, 일어나."

 잠에서 깨어난 그는 나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게 손을 뻗더니 천천히 뺨을 쓸어내렸다. 어쩌면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눈을 뜨자 마자 마주친 사람이 기억속에서 걸어나온 듯한 다섯살 였으니까.

 "저기… 지금 모습은 말야, 웃을지도 모르지만, 내 나름대로 머리를 써 봤어. 어렸을 때의 나라면 편하게 얘기할 수 있으니까, 앞으로 조금씩 어른으로 변해 가면서 적응하는 거야. 그러고 나서 마지막에는 완전히 말을 놓는 게 목표! 어때? 헤헷-."

 "오늘은 눈 뜨자 마자 러브러브 시리즈 같은 상황이 펼쳐지네. 뭐라고 해야 할지… 좋아서 말도 못하겠다. 우리  똑똑해."

 쑥스럽게 웃자 카카시의 손이 머리 위로 올라왔다. 역시 는 똑똑해. 스스로 생각하노라면 뿌듯한 기분이 들면서 더욱 용기가 생겼다.

 (…)

 오전 업무가 끝나고 대기실을 찾았다. 나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카카시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마침 잘 됐다는 생각에 쪼르르 달려갔다.

 "카카시, 밥 먹자."

 12살의 짧은 다리로 폴짝 뛰어 앉은 나는 손수 만든 도시락을 펼쳤다. 요리는 보통 내가 하지 않지만 아무래도 혼자 생활하던 때와는 다르기 때문에 이래저래 살림을 많이 하게 됐다. 지금이라면 나도 영양 만땅에 그런대로 맛있는 도시락을 만들 수 있다.

 "배고팠지?"

 아침부터 요리한다고 힘들었는데 달달하며 부드러운 반찬이 피로를 잊게 해주고, 상큼하며 아삭아삭한 반찬이 입안을 즐겁게 해준다. 그러나 지금은 먹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 카카시와 얘기하면서 이름도 많이 불러야 한다.

 "내가 먹여줄게… 카카시."

 반찬을 집어야 하는데, 그것이 자꾸만 미꾸라지처럼 젓가락에서 빠져나갔다. 언제나 사용하는 평범한 젓가락도 짤막한 손가락으로는 여간 다루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반찬을 콕 집어서 포크처럼 썼다.

 "아- 해… 카카시."

 그는 아예 방향을 돌려 나와 마주 앉았다. 등받이에 편하게 팔을 걸치며 능청스레 받아먹는 모습, 한결같이 나른한 분위기가 좋았다.

 "카카시……."

 조금 전과 달리 무의식적으로 나온 중얼거림이었다. 그때 카카시의 페이스가 묘하게 무너지는 듯하더니 갑자기 나를 제 품으로 확 끌어당겼다.

 작은 몸을 꼬옥 끌어안으며 그는 두 팔에 힘을 실었다. 자신의 감정, 대답을 돌려줄 방법이 달리 없었던 거겠지.

 (…)

 "어서와, 카카시."

 퇴근 후에도 여지없이 저녁을 준비했다. 덧붙여 17살의 모습으로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문이 열리는 순간 카카시를 끌어안았다.

 문간에 서 있다는 건 진작 알아차렸어도, 갑자기 품에 뛰어들 거라는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머뭇거리던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잘 하고 있네. 이대로 가면 오늘 안에 목표를 달성할지도."

 "그치, 며칠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까 별 거 아니더라구. 진작에 할걸 그랬어. 이제 와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우습지만 너와 더 가까워진 기분이야."

 "우스갯소리가 아냐. 어떻게 해도 어린 시절과 같은 관계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가능한 일인지도 몰라. 과거에만 존재했던 내 첫사랑과의 재회 말이야."

 "러브러브 파라다이스 챕터 6에 나오는 대사잖아. 정말 못 말린다니까. 얼른 들어가서 밥 먹자. 여기, 네 슬리퍼."

 내가 가져다 놓은 그것은 회색 바탕에 카카시의 얼굴이 귀엽게 수놓아져 있는 슬리퍼였다. 아카데미 시절 배워둔 솜씨로 직접 만들었다.

 전부터 수면용 안대라든지 인형이라든지 취미삼아 만들긴 했지만 그런 것들보다 훨씬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다. 카카시도 마음에 들었는지 아까워서 못 쓰겠다며 처음에는 그냥 보관해 두려고 했었다.

 모처럼 커플 아이템으로 만들었는데 나만 쓰면 의미가 없지 않은가. 이쪽 슬리퍼는 아이보리색 바탕에 내 얼굴이 수놓아져 있다. 두 사람의 잠옷 색과 맞춘 것이다.

 "어제 여기 있던 책 못 봤어? 선생-."

 "제가 원래 자리에 꽂아 놨습니다. 어라…?"

 "별 거 아니라더니 가벼운 함정에도 쉽게 걸리는구나. 너무 기대하면 안 되겠네."

 방금 건 실수였는데. 예전과 같은 호칭이 들리는 순간 당연한 것처럼 존댓말이 나왔다. 그렇지만 두 손을 꼭 쥐고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다. 한심하게 뒷걸음질쳐서야 되겠는가! 여기까지 왔으니 오늘 안에 불필요한 '-ㅂ니다'와 '-요'를 반드시 버리는 거다!

 "그렇게 비장한 표정을 지을 것까지는… 뭐, 나도 힘 닿는 대로 도울게. 밤에는 아무렇지 않게 반말을 쓰잖아."

 밤에는. 분명히 그렇다. 격정적인 순간 무슨 말이 입 밖으로 나가는지 알까보냐. 오히려 어떤 말을 내뱉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때로는 교성과 함께 전혀 나답지 않은 말들을 내뱉기도 했다. 정식으로 교제하는 사이가 되기 전부터 '좋아해'라든지, '사랑해'라든지.

 침대 위에서는 불필요한 경칭 따위 생략하는 게 당연한 거다. 나중에 자괴감이 밀려오긴 하지만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부르고, 표현하고, 그만큼 기분 좋았으니까.

 (…)

 지금부터가 관건이다. 5, 12, 17살 때는 실제로 카카시를 동갑내기처럼 대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느껴졌던 건지도 모른다.

 카카시와 같이 욕조에 들어왔다. 26살로 변신한 이유는… 지금 생각해도 서럽지만, 어쨌든 의미가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해?"

 "…으, 응?"

 무심코 '네?'가 튀어나올 뻔했다가 간신히 삼켰다.

 "나한테 존댓말 쓰기 시작한 것 말이야."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태어나 17번째로 맞이한 겨울이었을 것이다. 한 해가 거의 끝나갈 무렵, 바람이 물 위에 떠 있는 살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지던 때였다. 당시에는 내 마음도 상당히 얼어붙어 있었다.

 "적어도 마음만은 친구로 남아 있고 싶었는데, 이제부터 우리는 상사와 부하일 뿐이라고 못을 박아 버렸지."

 그렇게 하는 편이 서로에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원해서 내린 결정이라기보다는 불가피한 일이었달까.

 내게 있어서 카카시는 행복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유일하게 상기시켜 주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원망함과 동시에 집착했던 것이다.

 정말 나는 그것뿐이었는데. 사람의 마음이란 정말 오묘하기 이를 데 없다. 만약 카카시가 같은 이유로 나를 안았던 것뿐이라면… 차라리 현실을 외면해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모른 척했던 거야?"

 따뜻한 욕조 안이 아니었다면 분위기가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만큼 이제는 시답잖은 이야기가 됐다. 하지만─

 "이제라도 솔직하게 말해 봐."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건조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라고. 어린 시절의 나를 부른 것이었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유혹하니 못 참겠더라… 미안해."

 끝이냐. 참으로 담백하다. 이참에 터놓고 얘기한 다음 후련해지고 싶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막상 듣고 나니… 역시, 하타케 군은 재수뿡이었다.

 "나한테 미움 받을까봐 겁나서 말하지 못했던 거지?"

 "네가 고개까지 숙이면서 정중하게 인사했을 때 알았어. 아, 이제 나와는 관련되고 싶지 않은 거구나. 최악의 상사에게 최악의 방식으로 당했다는 걸 알면, 심지어 계속 그 녀석의 얼굴을 보면서 살아야 한다면, 죽기보다 끔찍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겁나긴 하더라고."

 그야, 가능하다면 나도 잊고 싶었다. 약에 취해 진상을 부려놓고 기억하고 싶을까보냐. 하지만 역시 잊는 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처음이었으니까.

 "바보, 멍청이. 이리도 답답해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나 몰라. 마을의 영예니, 차기 호카게니, 전부 거품이야, 거품."

 아이처럼 볼을 꼬집다 눈이 마주쳤다. 검회색 눈동자에 오랜 시간 축적된 고단함이 비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느껴졌다. 싫은 기억조차 덮어 버릴 만큼 사랑하고 있다는 것.

 "차라리 멱살 잡고 책임지라고 할걸 그랬어."

 "조금만 기다려 봐. 남편의 멱살을 잡을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말이나 못하면. 마음 같아서는 볼을 쭉 잡아당기고 싶었다. 그래봤자 이제 와서는 나른한 표정으로 하품이나 하겠지.

 "어쨌든 그때나 지금이나 당신은 바보예요."

 "그러는 너는 '-요'를 좀처럼 버리지 못하네."

 "아차… 미안해."

 이번에는 함정에 걸린 것도 아니고 100% 실수였기 때문에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어서 자신의 이마를 착 때렸다. 역시 하루 만에 바꾼다는 건 욕심이었나.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말하려는 찰나 카카시의 팔이 물속에서 허리를 감아 왔다.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상냥한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뺨을 만질 때는 어쩐지 상냥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른한 목소리도 끈적하게 들렸다.

 "괜찮아… 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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