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을에 커다란 풍파가 일었던 것이 아직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지만, 이제 츠나데 님의 치세도 안정되었고 마을은 다시 평화로 돌아가는 분위기다.
퇴근 후 노을진 거리를 걸어 도착한 곳은 마을에서 가장 큰 도서관. 정직하게 말해서 독서를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한가한 시간에 읽을만한 책이 없을까 하는 갑작스런 변덕으로 들르게 됐다. 주민 모두가 오고 가는 곳이지만 지금은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아이들이 많다. 그 중에서 평소 가깝게 지내는 아이의 얼굴도 몇몇 보이지만 지금은 집중하도록 그냥 내버려두는 편이 좋겠지.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은 크게 두 곳으로 분류되는데, 한 곳은 그야말로 시험기간의 독서실처럼 침묵을 유지해야 하는 곳, 다른 한 곳은 비교적 편하게 옆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휴게실 같은 곳이다. 고요한 것도 좋지만 나는 누구처럼 소리 없이 다니는 데 그다지 능숙하지 않다. 그런고로 대충 로맨스 소설 하나를 집어서 두번째 공간으로 이동했다. 어라?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저 하얀 통수, 비뚤어진 서클렛, 그리고 황당한 소리지만 뒷모습에서도 왠지 천재의 기운이 느껴지는 하타케 상닌이다.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아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가 도서관에 있는 것은 딱히 이상할 게 없다. 내가 도서관에 자주 오지 않으니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것 뿐이다. 무슨 책을 읽고 있을까. 히죽 웃으며 기척을 숨기고 조용히 다가가 보니 참으로 어이가 없다. 러브러브 시리즈를, 집에 전권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굳이 도서관까지 와서 읽는 건지. 그런데 문득 그가 읽고 있는 책의 표지와 종이가 너덜너덜해져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오래된 건지 사람 손을 많이 탄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 마을에 야한 소설을 즐기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묘한 충격을 받았다. 뭐, 야한 소설을 즐기면 어떠랴.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속으로 중얼거리며 헤실헤실 웃다가 헉 하고는 얼굴을 고친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어휴, 주책이야 정말. 아니, 주책이 아니라 중증이다, 중증. 10대 소녀도 아니고. "……." 보아하니 러브러브 택틱스 같은데 지금 어느 부분을 읽고 있는 거지. 이 이상 가까이 다가가면 들킬 것 같지만 은근히 궁금하다. 지금은 책에 집중하고 있어서 모르려나. 들켜도 딱히 잃을 것은 없으니 이참에 자신의 기척 숨기기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한 번 시험해보자. 슬금슬금─. 슬금슬금─. 오오, 아직 몰라! 몰라! 안 들켰어! 웬일이야! 맨날 기척이 너무 빤하다고 혼났는데, 이 정도면 꽤 능숙한 거 아니야? 당신이야말로 알아차리는 게 늦다고. 큭큭큭. 이거 이거 장난을 치지 않을 수가 없는걸. 이 님의 경륜이란 게 뭔지 확실하게 보여주지. 뒷짐을 지고 있던 손 하나를 앞으로 가져와 조용히 변신술의 인을 맺는다. 과연 이렇게까지 하면 들킬 가능성이 높지만, 만약 들키지 않는다면 나는 오늘 하타케 카카시를 뛰어넘는 기척 숨기기 천재 닌자가 되는 거다. 멋대로 정한 거지만 뭐 어때, 나만 즐거우면 됐지. "카카시 선생님, 뭐 읽어요~?" "ㄷ헛! 누, 누구니? 선생? 여기서 그런 모습으로 뭐 하는 거야? 깜짝 놀랐잖아." 꺄하하하하핫─. 됐어, 됐어, 내가 하타케 카카시를 놀래켰어, 내가. 크허 살맛 난다. 요렇게 찰진 재미를 어찌 그냥 넘기랴. 맘 같아선 육성으로 크게 웃고 싶은데 아무리 어수선한 곳이라고 해도 도서관에서는 차마 그럴 수가 없기에 마냥 즐거우면서도 아쉽다. "저 무릎에 앉아도 돼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여긴 도서관이라구." "지금은 애들이 워낙 많아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거예요. 부탁이니까 앉게 해주세요~." 흔들흔들 몸을 움직이며 아이의 앳된 목소리로 조르자 그가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주변을 슥 둘러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다리를 내어준다. 원래 그는 내 꾀임에 쉽게 넘어올 사람이 아니지만, 지금은 내가 기분이 좋아 애교를 부리고 있으니 그도 평소보다는 유들유들한 느낌이다. "애를 무릎에 앉혀놓고 같이 야한 소설을 읽다니… 사람들이 날 이상한 인간으로 볼 거야……." "언제나 길거리에서 당당히 야한 소설을 들고 다니시는 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하타케 상닌이 변태인 거 마을 사람들 다 알아요, 다." "그래…? 으응……." 무릎에 앉았다고 해도, 하타케 상닌이 책상 위에 두 팔을 올리고 있어 그에게 안겨 있는 것과 같다. 살짝 흐트러진 자세를 똑바로 고쳐잡고서 그가 읽고 있던 페이지로 시선을 옮기니, 이제는 내게도 제법 익숙해진 소설의 한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지난 번에는 후반부를 읽더니 이번에는 반대로 전반부를 읽고 있다. 준코와 주인공이 평범한 사제지간으로서 조금씩 썸을 타던 시절의 이야기다. "완결을 읽고나면 다시 1권으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아니, 그냥 그때 그때 읽고 싶은 부분을 읽어." "오늘은 뜨거운 것보다 순수하고 파릇파릇한 첫사랑의 기분이시라는 거군요." "난 언제나 뜨거운 기분… 이, 아니라…! , 주변의 듣는 귀를 조금 신경쓰도록 하자." 주변에 사람이 많긴 하지만, 곳곳에서 아이를 무릎 혹은 옆에 앉혀놓고 책을 읽어주거나 무언가 가르쳐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꼬마 아이들이 비교적 소란을 자주 피우니 전부 이곳으로 온 게 아닐까 싶은데, 덕분에 두 사람의 모습이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자연스레 그들 사이에 섞여서, 아는 사람이 바로 옆을 지나가도 모를 것 같다는 느낌이다. 이 정도로 어수선하면 구석진 자리의 작은 이야깃소리는 가볍게 묻힌다. "하타케 상닌은 언제부터 러브러브 시리즈를 읽으셨습니까? 성인용이니까 20살부터였으려나요." "그보다 훨씬 어렸을 때부터 읽었습니다……." 새삼스레 민망한 듯 그가 내 시선을 피한다. 언제나 여유가 넘치다 못해 태평한 사람인데, 초조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니 묘하게 재밌다. "어쩌다 처음 접하게 됐는데요?" "한때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 형성에 대한 공부를 했었는데, 그때 책에 소개된 것을 보고 알게 됐어." 인간의 관계 형성과 야한 소설에 무슨 연관성이 있는 거지. 뭐, 따지고 보면 러브러브 시리즈도 로맨스 소설이고, 로맨스라는 것은 남녀 관계의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으니 아주 상관이 없지는 않다. 실제로 도움이 될지 어떨지는 미지수지만. 그런데 이 사람에게 연애에 대한 공부가 달리 필요했을까? 그냥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이 따라붙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으니 딱히 먼저 접근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더군다나 내가 기억하는 당시의 하타케 군은 연애에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다만 문득 떠오르는 것이──. '조금은 네게 친근하게 느껴질 법한 인간이 되었는데, 너는 신경도 안 쓰더라?' 혹시 이렇게 연결되는 건가. 에이, 설마. 아무리 뭐래도 그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을의 영예 하타케 카카시가 나와 가까워지기 위해 야한 소설로 이성 관계를 공부했던 것이라고 하면 너무 귀엽질 않은가. 생각만 해도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다. 물론 웃겨서라기보단 기분이 좋아서다. "설마하니 처음부터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야한 소설을 읽었던 건 아니시겠죠?" "그야 당연하지. 책을 덮은 뒤로도 계속 얼굴이 화끈거려서 병에 걸린 게 아닐까 의심했었어." "ㅍ핫…!(웃음 꾹) 무, 무슨 병이요…?(부들부들)" "감기부터 심혈관 질환까지 무궁무진하게 고민을 해봤는데 다 아니더라고. 내 신체에 차마 부정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거든." "크흑… ㅍ하하하하핫…! 우웁…!"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가 하타케 상닌에게 입이 틀어막혔다. 시원하게 웃지 못해 이젠 내 얼굴이 뜨거워지고 눈물까지 나온다. 파는 곳 마다 귀여움이 솟구쳐나오는 하타케 카카시 당신은 대체. "(우물우물)" "응?" 입을 막고 있던 그의 손이 자연스레 머리 위로 올라와 나를 어루만진다. 쓰담쓰담. 정말 아이를 다루듯이. "카카시 선생님, 잠깐 귀 좀 가까이 대봐요." "왠지 불안한데.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 미심쩍은 얼굴을 하면서도 궁금하긴 했는지 그가 순순히 내 말에 따른다. 그리고 나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딱 그에게만 들릴 정도의 아주 작은 숨소리로 속삭인다. "오늘 밤에 에게 야한 거 가르쳐주세요." 크흐으으윽, 내 입으로 말해놓고도 오글거려서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그렇지만 내 말 한 마디에 당황하며 얼굴이 빨갛게 변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 좋다. "나를 놀리는 게 재밌어?" "놀리는 걸로 받아들이셨어요?" "아무래도 좋아. 방금 네가 내뱉은 말 제대로 책임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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