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써 한달이 지났지만 끔찍했던 그날의 악몽은 내 기억 속에서 조금도 지워지거나 흐릿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선명해져 간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 나는 정말 신에게 버림받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루토를 어디에 숨겼나?' '몰라! 모른다고!' '너도 죽는 쪽이 편한가?' '모른다면 모르는 거야!' 스승님을 곁에서 모시며 아카츠키와의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이유는 이번 습격이 예삿일과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페인과 코난뿐이었다. 무리를 이끌지도 않고 단둘이 닌자마을을 상대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게다가 나는 일개 졸병에 불과하다. 대단하신 분을 직접 만나 뵐 줄 누가 알았으랴. 친히 멱살까지 잡아 주셔서 감개무량했다. '컥! 지, 지라이야 님은… 우리 모두의 스승님이셨어. 네놈들은 스승을 죽인 원수란 말이야. 뜻대로 되게 놔둘 것 같냐! 천만에. 차라리 죽여. 나루토가 있는 장소는 절대 못 알아낼걸. 커헉!' '그러니까 우리는 동시에 스승을 잃은 셈이군.' 솔직히 오금이 저렸다. 지라이야 님을 쓰러뜨릴 정도면 이미 내게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 '신'이나 다름없다. 태어나 처음 보는 자색 눈동자가 악몽으로부터 깨어난 뒤에도 나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윤회안이라니. 그것은 말 그대로 돌아가는 수레바퀴처럼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힘이었다. 이후 밝혀진 페인과 코난의 정체는 여짓껏 그랬듯이 호카게와 소수정예만 기억하게 될 1급 기밀로 정해졌다. 그 외의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아카츠키가 마을을 공격했다' 정도밖에 알지 못한다. 불공평하지만 닌자들에게는 익숙한 일이다. 정보에 대한 보안력을 잃는 순간 전부를 잃게 된다.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은 죄악이나 다름없다. 알아 봤자 의미가 없고, 안다 해도 모르는 척한다. 그런 룰인 것이다. "이것 봐, 카카시. 굉장해." "응?" "이번에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구호물품을 한 개 받았거든. 이건 모래마을 특제 약이야. 나뭇잎에 나라 일족이 있듯이 그쪽 연구자들만 제조법을 알고 있어서 엄청 구하기 힘들어." "흐음. 어떤 분께서 보내셨는지 알 것 같은데." "맞아, '왕자님' 정도가 아니면 어렵지. 후후후." 이제 '왕'이 되었다고 봐야 하나. 카제카게는 뭐랄까, 왕보다는 '보스'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부하들과 진지하게 논의할 때는 느와르 영화같은 분위기 아닐까. 터프한 바람의 나라니까. 담배 연기 자욱한 집무실에서 딱딱한 표정으로 명령을 내리는 가아라의 모습이라든지, 생각하니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친구같은 말은 감히 꺼내지 못하게 되어서 아쉬운 마음이 없잖아 있었는데. 구호물품으로나마 마음을 전해 받으니 반갑고, 기쁘고, 무엇보다 고마웠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일해야지! "연구실에 가져가서 성분을 알아내고 말 거야." "으응, 나는 괜찮으니까 우리 다 가져." "…사, 사과 하나 더 줄까?" "아니, 아니. 그만. 배가 터지겠어. 누군가 병문안을 올 때마다 먹을 걸 권유하더라. 그동안 우리 마을이 얼마나 풍요로운 곳이었는지를 실감했달까, 쑥대밭이 된 와중에 먹을 게 넘쳐나네." 바람의 나라가 '터프'라면 불의 나라는 '섹시'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 바로 그거다. 부유함. 톡 까놓고 말해 돈. 나뭇잎마을의 발전에 있어서는 조상님들의 공이 제일 크지만, 영주들의 씀씀이도 무시할 수 없다. 불처럼 화끈하니까. 방계에 속하는 소류 씨만 봐도 이쪽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그만 가 봐. 너도 좀 쉬어야지." "싫은데. 여기 있을 건데. 내 맘인데." "어휴… 진짜 말 안 듣네… 혈압 올라……." "마지막으로 체크했을 때 정상이었으니까 걱정 마." 불필요한 '-요'를 버린 뒤, 전보다 격이 없어졌다. 사실 연인 사이에 격이란 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남다르게 시작한 관계다 보니… 뭐, 두 사람은 조금 많이 늦어졌다. 지금은 소꿉친구답게 가끔 장난치고, 농담도 하고, 말하자면 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이다. "카카시 너 요즘 살찐 거 알아?" "흐음?" "지금 약간 통통해 보여." "음… 그래? 여태껏 크게 찐 적 없었는데." "이참에 좀 더 찌워서 푸근한 이미지의 아저씨가 되어 보는 게 어때." "어째서 그런 무책임한 발언을 하지? 지금도 23시간의 헌신으로 1시간 정도의 보상을 받고 있는데. 배까지 나오면 더 힘들어지잖아. '난 배 나온 남자도 좋아'라는 말이 하고 싶은 거라면 대답 대신 코웃음을 돌려줄게. 흥." "……." "나 정도는 돼야 상대방의 뱃살까지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거야." "예, 카카시 선생님." 미남에다 늙지도 않는 사기 캐릭터 주제 우쭐대기는. 그래, 거기까지는 괜찮다. 나라도 모두를 대표해 재수뿡이라 외쳐 주면 되니까. 문제는 평범한 말도 저 얼굴로 조잘거리면 드라마 대사처럼 들린다는 거다. 얼굴만 빼면 평범한 아저씨다. 능글능글 산뜻한 구석이라곤 없는. 나른한 표정과 말투로부터 나오는 진득한 로우 텐션에 익숙해질라치면 갑자기 황당한 짓을 해서 나를 당혹시킬 때도 많다. 예를 들면 이렇게. " 선생님. 저, 슬슬 해도 되나요?" "거 참!!! 말했잖아!!! 퇴원할 때까지 절대 안 돼!!! 당신 죽는다고!!! 어지간히 알아들어!!! 진짜 죽는다니까!!!" "어떻게 좀 해보세요." "미안하지만 내 능력 밖이야!!!" "……." 카카시는 말 없이 창가를 돌아보았다. 거기서는 할말이 없어지는 게 당연한 거긴 하지만, 평상시였다면 좀 더 이렇게, 나른하게 웃으면서, 내가 뭐라 말해도 여유로이 되받아쳤을 것이다. 하루종일 갇혀 있으니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건 이해한다. 그렇다 해도 진짜 풀이 죽어 버리다니. 의사로서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잔소리를 했을 뿐인데 괜히 미안해졌다. "뭐랄까… 무능력한 인간이 된 것 같아… 당신은 지금도 밤낮으로 뛰어다니고 있는데……." "그런 기분이 드는 건 카카시 네가 너무 일에만 매달려 살아 왔기 때문이겠지. 말해 봐, 6살 때 중급닌자가 돼서, 그 이후에 제대로 쉰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아? 언제나 좀 살겠다 싶으면 휙 퇴원해 버리고…" "열심히 일하면 내가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 믿었어. 뭐, 재수뿡밖에 되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한 사람에게 잘 보이고자 했던 의지가 나를 마을의 영예까지 만들어 줬네? 푸하핫." "그러니까, 이제 됐잖아. 네가 좋아했던 여자애는… 지금 너의… 으, 으흠……." 기적처럼 살아났다. 하지만 부상은 그대로. 카카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아무리 얘기해도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관심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지금만 해도 넌지시 창문만 보고 있다. "솔직하게 말할까? 마음 같아서는 이제라도 너한테 마음껏 갑질하고 싶구, 내가 받은 그대로 돌려주고 싶어. 근데, 와이프한테 목매어 사는 게 우리 집안 남자 유전인가 봐. 하하…하……." 또 한 가지. 애정결핍마냥 외로워 보인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진데다 가만히 누워만 있자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나나 보다. 그야, 지난 시간은 분명 나보다 카카시 쪽이 훨씬 고단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내 나름대로 노력, 아니, 더는 무리일 정도로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이 사람에게는 '겨우' 23시간 중의 1시간이었나. "이 바보야, 너는 가만히 있어도 멋있어." "우윽…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아니,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사실이 그렇다고!" "듣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보단 부끄럽게 만드는 칭찬이었어." 누구 놀리나. 약해져 있는 사람에게 상냥한 표정만 지어 보여도 모자라다고 생각하지만 입꼬리가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 말주변이 없다는 건 인정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내 안의 오글거림 방지 필터가 잠시 고장났던 것 같다. "." "왜?" "우리 이제 애기 아니잖아." "그래서 뭐?" 잠깐 눈을 돌린 사이, 창가에 머물러 있던 시선이 다시 내게로 향해졌다. 깨닫고 보면 카카시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는 평소처럼 두 팔 벌려 나를 안으려다 팔에 꽂힌 링거의 방해에 멈칫하더니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이거 잠깐 뽑아도…" "뽑기만 해 봐!" "조금만… 가까이 갈 수 있게…" "거기 가만히 있어! 내가 가면 되잖아!" 카카시의 작은 행동에 일일이 가슴 졸이면서 잔소리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차마 하지 못했다. 대신 침대에 걸터앉아 다정하게 바라보며 뺨을 쓰다듬었다. 어느덧 중후함이 생긴 얼굴은 기억 속 아저씨를 떠올리게 했다.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달라 보였던 것 같은데 나이를 먹을 수록 닮아 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헛기침)" "?" "더 가까이." "……." 작은 속삭임이 선명하게 들릴 뿐 아니라 숨결까지 닿을 만큼 가까웠다. 최소한의 거리를 둔 것은 일부러였다. 시작을 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덜 괴로운 방법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게 완강히 거부할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 혹시라도 내가 잘못되면…" "알았어, 알았다고. 나만 믿고 하면 돼!" 에라 모르겠다 앞섬을 확 잡아당기자 카카시가 뜻밖의 박력에 움찔하더니 포개어진 입술 사이로 묘한 신음이 들렸다. 아팠구나. 미안. 살짝 떨어져서 무언의 감정을 주고받은 뒤 한결 차분하고 부드럽게 다시 엉키었다. 툭. 링거가 뽑혔다. 내게는 당연히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흠칫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인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를 쓰러뜨렸다. 등을 부딪힘과 동시에 삐걱대는 소리가 다른 병실까지 다 들릴 기세로 컸다. "아, 생각해보니까 이거 정확히 17살 때 내 판타지였어." "어련하실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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