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밝이 무렵 감파란 하늘에 떠 있는 낮달이 제법 선명하게 보였다. 낡은 교실 문을 열자 돌쩌귀가 찌걱찌걱 울어댔다. 문턱에 덧댄 나무 판자는 묵삭아서 먼지와 더께가 꼈고 가시랭이같은 널조각을 밟을 적마다 음산했다.
차마 주술사들이 상주하는 곳에서 주령이 나올 것 같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거기에는 엄중한 까닭이 있었다. 이유인 즉 건물이건 사물이건 주술사들에게는 낡을수록 편리해서 마땅한 사유 없이는 새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교직원들이 수학하던 시절에도 교실의 풍경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테고 어쩌면 지금도 교실 어딘가에 졸업생들의 발자국이 척척히 남아 있을지 모른다. 희뿌연 먼지가 쌓이고 또 쌓여서 더는 보이지 않을 뿐이다. 새벽부터 등교했으니 다른 사람이 있을 리도 없고 나는 혼자서 하릴없이 교실을 서성거리다 교탁 앞에 섰다. 바로 여기. 언제나 같은 자리에 서 계시는 선생님은 이따금 교실을 둘러보며 옛사람의 발자국을 찾는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와서 알아볼 수 있을까. 애틋한 시간을 물처럼 구름처럼 흘려보내고 미련은 먼지처럼 계속 쌓여 간다. 나는 그대로 뒤돌아서서 선생님의 분필을 집어들었다. 두툼한 분필 홀더가 내게는 손에 쥐기 조금 버거웠다. 그러나 호젓한 교실이거니와 사람들이 올 때까지 멍하니 시간만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과감하게 획을 그어 보았다. 직직 그는 것마다 하얗고 선명했다. 홀더를 사용해도 하얀 분필 가루가 버슬버슬 떨어졌다. 선생님은 수업 중 틈틈이 소매에 묻은 가루를 털어내신다. 이제 대각선도 버듬히 그려 본다. 그려 놓고 보니 공연히 더 음산하다. 지우개로 깨끗이 지우고 본격적으로 낙서를 궁리했다. 동그라미 네 개를 나란히 그린 다음 생각나는 대로 살을 붙였다. 그때 문이 열렸다. 빠르게 열어젖히므로 곳곳에서 나는 소리가 한데 뒤섞인다. 복도 유리창으로부터 희미한 양광이 비쳤다. 그래도 여전히 어둡다. 가방을 한쪽 어깨에 들쳐맨 이타도리가 자리로 향하며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내가 일등일 거라 확신했는데. 일찍 나왔네." "이타도리 군, 좋은 아침. 오늘따라 눈이 일찍 떠져서." 이타도리는 자기 책상에 걸터앉아 팔짱을 꼈다. 입술을 일그린 채 넌지시 바라보던 그가 말없이 픽 웃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마주쳤다. 왜 벌써 왔지. 그런 생각을 해 봄직한 정적은 딱히 길지도 않았다. 바닥에서 떨어져 한들거리는 발끝을 무심코 보았을 때 내가 긴장했음을 알았다. 묘하게 가슴이 뛰고 얼굴이 뜨뜻했다. "귀엽다." 당연하게도 이타도리는 낙서를 보고 있었다. 내 작품이랄까. 그를 포함해 같은 교실을 쓰는 세 명의 얼굴을 마음대로 그린 것이었다. 민망해질 이유가 전혀 없다고는 하지 않겠으나 그 순간에는 나 홀로 단상에 오른 것 같이 부끄러웠다. 낙서하는 동안 한 번도 털지 않은 소매가 해끗했다. 제대로 증거를 남겼다. 어차피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아 교복에 슥 닦았다. 이타도리는 사진을 찍으려는지 자기 스마트폰을 꺼내고는 카메라에 비친 낙서를 보며 부러 간들댔다. "저기, 나하고 후시구로는 왜 눈하고 입밖에 없어. 쿠기사키만 사람이고 우리는 찐빵 취급이냐. 치사해." 안대 하나로 얼굴 묘사 대부분이 생략되어 버리는 고죠 쌤을 보면 이타도리도 더는 불평할 수 없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분필을 움켜쥐었으나 차마 내 마음속에 햇살처럼 빛나는 키다리 아저씨를 낙서처럼 그릴 수는 없었다. '쯧⋯⋯ 내게 맡겨라⋯⋯.' 스즈카는 고죠 쌤과 관련되면 싫증부터 내는데 그런 것에 비해서는 적극적으로 낙서에 동참했다. 순순히 물러나 있었던 나는 감히 불평하지 못했다. 아는지 모르는지 이타도리가 어색하게 박수를 쳤다. 웃음을 참고 있었다. 갑자기 두 사람의 시선이 같은 곳으로 향했다. 노바라가 웅강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바람 잘 날 없는 경첩은 삐거덕, 떨어져 나갈 듯이 흔들렸다. 눈을 사무려 보니 어스름 사이로 길게 뻗은 희붐한 빛줄기에 먼지가 적이 날렸다. "뭐야, 오늘은 일등인 줄 알았더니! 3등이잖아?" "내가 3등이야. 새치기한 의미가 없었네, 쿠기사키." 노바라의 뒤를 이어 후시구로가 서붓서붓한 발걸음으로 교실에 들어왔다. "어서 와, 노바라. 후시구로 군도 좋은 아침. 같이 등교도 하고 사이 좋네." "새벽같이 등교해 어둑한 교실에서 단둘이 노닥거리고 있는 너희 둘보다?" "우리는 교실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거야. 그쪽 상황보다 훨씬 설득력 있지." "그거 나 아냐? 그리고 멍게랑 성게 같은 건⋯⋯ 하하하!" "이타도리랑 나겠지. 그 옆에 배추는 딱 봐도 고죠 쌤이네." "다들 좋은 아침팬지! 메구미, 방금 선생님 부르지 않았어?" 오늘은 어쩐 일인지 선생님도 일찍 오셨다. 피곤하셨는지 한손에 커피를 들고 계셨다. 후시구로는 시치미를 떼고 자리에 앉았다. 낙서를 지워야 하는데 고죠 쌤이 성큼성큼 걸어오셔서 일단 자리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 다음으로 선생님의 눈길이 닿는 곳이라 하면 그야 칠판이고 쌤은 교탁 앞에 서기도 전에 낙서를 발견하셨다. "음?" 짐작하건대 선생님은 세 아이의 얼굴을 먼저 알아보시고 다른 한 명은 누굴까 하면서 눈을 굴리셨을 것이다. 결코 칭찬받을 만한 그림이 아닐 뿐더러 감히 닮았다고는 못하겠으나 누가 봐도 고죠 쌤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누구야? 누가 선생님을 배추 인간처럼 그렸어? 손 들어." 피치가 뚝 떨어졌다. 망설여졌지만 머뭇거릴 틈도 없었다. 나보다 앞서 후시구로가 손을 들고 발표하듯 또박또박 대답했다. "선생님. 고자질하는 건 아닙니다만 저와 쿠기사키가 교실에 들어왔을 때 와 이타도리가 사이좋게 노닥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나 또한 후시구로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손을 번쩍 들고 웅변을 토했다. "선생님! 멍게, 성게, 깻잎은 제가 그렸지만 배추는 억울합니다! 그때는 스즈카였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딱히 노닥거리지도 않았습니다!" "아하." 선생님은 귀찮다. 아니 예뻐할 수 없을 뿐이다. 이런 기색으로 고개를 구부스름히 놓고 지우개를 집어든다. 그러나 지워 내리기 전에 딱 멈추었다. 찰칵찰칵. 제자가 그랬던 것처럼 사진을 찍으시고는 얼른 다시 주머니에 넣으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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