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시구로, 설명해 봐. 어쩌다 우리가 피구를 하게 된 거지? 배드민턴이나 다른 걸 할 수도 있었는데."
"내 기억으로는, 약 10분 전 가 초등학생 때 반 친구들과 피구를 자주했었다는 얘기를 꺼냈어." 계단에 걸터앉아 쉬는 동안 그런 얘기를 했었다. 거기에 이타도리가 '하자'고 내게 맞장구를 쳐 주었던 것이다. 트랙 위에서는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운동장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옮긴 뒤, 라인을 그어서 피구 코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 전 배드민턴 내기로 우리를 가볍게 이겼잖아. 지금 다시 한다고 해도 서로 민망해질 뿐이니까." 코트가 완성됐다. 나는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샐샐거리며 노바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가락 위에서 회전하던 공이 멈추었다. 노바라가 나를 가리키며, 그러나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누가 밀쳐서 넘어뜨려도 헤헤헤 웃겠지. 됐어. 그래도 이타도리 너는 좀 더 생각이라는 걸 해야지. 초등학생 남자애처럼 네가 무식한 힘으로 던진 공에 맞아서 아파하는 여자애들을 보고 재밌다고 깔깔 웃을 거냐고." 이타도리는 손에 묻은 흙을 탁탁 털었다. "그래서 네가 초등학생 여자애들처럼 구석에 쪼그려 앉아 엉엉 울 건 아니잖아. 두 배 세 배로 나한테 복수할 거잖아. 해 보기도 전에 재미없을 거라고 단정짓지 마. 누가 보면 벌써 이긴 줄 알겠다. 한 번 지고 나면 생각이 바뀔걸." 노바라는 우직한 걸음으로 이타도리에게 다가섰다. "너야말로 벌써 이긴 것처럼 자신만만해 보이는데?" "이길 자신 있으니까. 지기 싫음 나랑 같은 팀 해도 돼." "누가 네놈 따위랑! 어차피 후시구로랑 할 생각이었어! 그치!" 그녀가 암팡진 손을 훔켜쥐고 후시구로의 가슴팍을 퍽 때렸다. "윽⋯⋯ 쿠기사키를 무시하지 마, 이타도리. 괜한 말이 아니잖아." 후시구로가 이어 말했다. "우리는 고작 네 명이라고. 너는 넷이서 피구하는 광경을 본 적 있냐." "그렇지, 후시구로! 말 잘 한다! 이 쿠기사키 님이 특별히 칭찬해 주마!" "하지 마." 그는 함부로 제 머리 위를 날아드는 노바라의 손을 가볍게 뿌리친 뒤 모두에게 제안했다. "인원이 적어도 게임이 쉽게 끝나지 않도록 기존 룰에 몇 가지 항목을 추가하는 게 좋겠어." 이타도리와 나는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후시구로는 이쪽이 아닌 자기 파트너 쪽을 돌아보며 "이를테면 패널티를 가지고 하는 거야. 어때, 쿠기사키." 하고, 친절하게 물었다. 그런 성의를 봐서, 그녀도 조금 관심을 보이는 듯했다. "하아⋯⋯ 들어나 보자. 지는 쪽이 음료수 쏘는 거였지." 그녀의 입 꼬리가 씰룩거렸다. 피구는 둘째치고 처음부터 내기를 마다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짝피구를 할 거야. 너희도 알다시피 규칙은 간단해. 남자는 남자만 맞힐 수 있고 여자는 여자만 맞힐 수 있어. 이성을 맞히면 무효. 같은 팀의 아웃을 막기 위해 공을 대신 맞는 등의 방해 행위는 인정해. 쿠기사키, 너는 저 괴물을 맞히기 위해 굳이 애쓸 필요가 없어. 를 살리려고 네가 던진 공에 알아서 달려들 테니까." "뭐, 그건 꽤 재밌겠네." "방금 전에 우리를 얕잡아봤던 걸 후회하게 해 주자." "좋아, 오늘에야말로 지난 설욕을 갚는 거야! 화이팅!" "그래, 내 목숨 내가 챙길 테니까 걱정하지 마. 화이팅." 학교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운동은 대부분 구기 종목이다. 배드민턴 따위의 복식경기를 제외하면 남녀가 협력할 수 있는 것은 생각 보다 많지 않다. 우리도 이렇게 인원이 적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지내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네 명뿐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단합할 수밖에 없고 같은 의미에서는 짝 피구도 결코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가랏!" 몸풀기는 앞서 한 트레이닝으로 충분했다. 그래도 저쪽이 시작부터 그런 힘을 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노바라가 있는 힘껏 던진 공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솔직히 피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감탄하고 있었다. 그런 나 대신 이타도리가 공을 받을 때 날샌 바람과 함께 귀를 스치는 쌔한 소리가 적잖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쿠기사키, 네 목표에 나까지 포함된 건 알겠는데. 가 맞았으면 지금 기숙사 지붕 위에 누워 있을 거야." 도대체 다른 아이들에게는 내가 어떤 이미지로 각인되어 버린 것일까. 꽃으로 때려도 부서질 거 같다는 말을 떠올리면 답은 빤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언젠가 한 번쯤은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타도리의 빈정거림이 어느 정도는 사실에 기반한 과장이므로 노바라는 뜨끔하면서도 주먹을 불끈 쥐었다. "먼저 전쟁을 선포한 건 네놈이잖아. 이제 와서 봐달라고 해도 소용없거든. 그치, 후시구로?" 후시구로도 다른 세 명과 같은 광경을 지켜본 까닭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럼. 그래도 페이스 조절은 해야지." 그는 말하면서도 이쪽을 주시하다가 "계속 그런 기세로 던지다 몸살나겠어." 하고, 어물쩍댔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말이든 대충 둘러댄 말이든 노바라에게는 다를 게 없었다. "누가 너한테 그딴 걱정 해달래. 집어치워. 무엇이든 처음에 기선제압을 단단히 해 두어야 한다고." "알았어. 이제 도발은 충분한 것 같아. 그러니까 지금 저 괴물에게 노려지고 있는 내 생각도⋯⋯ 헉!" 후시구로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쌩 하고 공이 날았다. 이타도리 딴에는 노바라가 뛰어들어 방해할 것을 감안해 무난하게 던졌을 테지만 노바라가 후시구로 대신 공을 맞았을 때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물고 끙 앓았다. "어딜 감히. 이 쿠기사키 님께서 버티고 있는 한, 후시구로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거다. 이타도리!" "쿠기사키⋯⋯ 너 괜찮냐. 무리하지 마. 아니, 바보 같이 굴지 마. 내가 먼저 아웃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노바라는 속으로 구시렁대는 듯한 표정을 하면서도 덤덤하게 손의 아릿함을 털어내고 떨어진 공을 주웠다. 그녀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파트너에게 공을 넘겼다. 딱히 남자애들만 그런 건 아니지만 게임 중에도 서로 위협하며 장난치는 것은 빼 놓지 않는다. 노바라가 등짝을 후려치려 할 때 즈음 후시구로가 시원스럽게 공을 던졌다. 짝피구라 해서 반드시 방패가 될 필요는 없지만 막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준비하고 있다가 재빨리 몸을 날렸다. "꺅!" 내 나름대로는 넘어지거나 부딪혀도 아프지 않은 곳까지 생각해 두었으나 얄밉게도 쏙 피해 가서는 옆구리를 푹 찔렀다. 게다가 엉덩방아도 찧었다. 아프기도 아프거니와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상대편의 기세에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헤헤헤." 나는 낑낑거리면서도 이타도리의 도움 없이 혼자 일어났다. 그의 손을 잡으면 조금 수월할지 몰라도 또래의 눈에 약해 보인다는 사실만으로 서러워서 적어도 게임 중에는 자잘한 도움을 바라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 마이⋯⋯." 그 사이 이타도리가 공을 주웠고 이번에는 뜸들이지 않았다. 노바라가 막으려 했으나 후시구로는 어쩐지 그 시점에서 이미 체념한 듯 그녀가 앞에 서는 것을 막았다. 팍 하는 것도 아니고 빡 하는 소리가 운동장에 메아리쳤다. 내가 봐도 피하면 안 될 공이었지만 노바라는 기가 찼다. "멍청아! 뭐 하는 짓이야! 내가 대신 맞을 수 있었는데!" 후시구로는 찜부럭한 얼굴로 신음하고는 버럭 화를 냈다. "지금 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멍청이는 너야! 윽!" 노바라는 샐쭉하면서도 그에게 공감하는 듯 작은 소리로 "젠장⋯⋯ 분하지만 인정할게. 솔직히 나도 좀 무섭긴 했어." 하고는 후시구로를 흘겨보다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후시구로는 안색을 바꾸고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모략하듯이 말했다. "이걸로 됐어. 말했잖아, 내가 먼저 아웃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간다." 이타도리의 과격한 한방은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게임을 빨리 끝내려는 것 같기도 했고 사적인 감정이 실린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 봄직한 것이었다. 그렇게 무지막지한 힘으로 던지는 공을 노바라가 맞으면 큰일이겠으나 그렇기 때문에 후시구로는 피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이타도리의 단순한 전략이었다 볼 수도 있겠다. 후시구로는 터덜터덜 걸어나와 제 위치에 섰다. 그가 작은 돌을 이타도리에게 툭 던지고는 투덜거렸다. "솔직히 나도 조금 지나쳤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무슨 투포환 같은 걸 던지냐. 어지간히 하고 죽어." 이타도리가 후시구로를 돌아보았을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보지는 못했지만 후시구로의 반응을 보면 그냥 조금 미안한 듯이 웃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거기서부터 어쩐지 이기고 지는 것보다는 당한 만큼 되돌려 주는 게 더 중요하다는 느낌으로 흘러갔다. 이타도리가 후시구로에게 되갚음을 당하듯이 아웃되고 내가 노바라의 일격에 전사하는 것으로 짝피구는 깔끔하게 끝이 났다. 아쉽게도 이번 내기에서 승리의 여신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건배하자, 후시구로! 짠!" "힘들게 얻어낸 공짜 음료수가 넘치고 있잖아, 바보야." "좀 더 기뻐하라고! 우리가 이겼어! 진짜 이겼단 말이야!" "그래, 괴물과 맞서싸워서 이긴 네가 솔직히 자랑스러워." 나는 후시구로의 '내가 먼저 아웃되는 게 낫다'는 말을 계속 염두에 두고 있었다. 거기에 어떤 전략이 숨겨져 있을까 하고. 그래서 알았느냐 하면 뭐라 말하기가 어렵다. 지금 후시구로와 그의 파트너인 노바라를 보면서 생각하건대 그냥 자기가 일찍 죽어야 노바라가 공을 덜 맞을 테니까라는 최고로 단순한 전략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결국 음료수를 사야 했지만 한 번 이긴 전적도 있고 하니 그리 아쉽지만은 않았다. 승자들에게 트로피를 쥐어 준 다음 우리도 좋아하는 음료를 하나씩 집어들었다. 한결 개운해진 나는 후시구로처럼 내 파트너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이타도리 군." "응?" "오늘도 같은 팀 해 줘서 고마워." "으응, 나도. 졌지만 이건 이것대로 재밌네. 저거 봐. 쿠기사키가 폴짝폴짝 뛰면서 재잘거리고 있어. 참새처럼." 어수선한데다 작게 말해서 들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노바라의 시선이 이타도리에게 날아와 꽂혔다. 덩달아 움찔했다. "누가 참새라는 거냐 이 노오옴!" "귀도 밝다⋯⋯ 아! 아야! 미안해!" 노바라가 마구 때려서 응징을 가하고 이타도리는 피하다가도 대수롭지 않게 맞아 주며 그녀와 티격태격했다. 후시구로가 한숨을 푹 쉬고는 조용히 내 옆으로 피신해 왔다. 멀찍이 서서 사이좋은 두 사람을 바라보는 것도 즐거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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