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작달비처럼 소르르 울며 이파리를 흔들더니 점점 품을 크게 벌려서 이제는 거의 머리에 닿을 듯하다. 구메구메 깊숙이 자리잡은 풀들도 발끝에 스칠 적마다 풀내음을 후 뱉는다. 폐부에 숨을 깊숙이 넣으면 레몬 향처럼 향긋함이 물씬하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오늘도 여지없이 모두와 함께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임무가 떨어져서, 나를 제외한 1 학년 모두가 서둘러 떠날 준비를 했다.

 "조심히 다녀와."

 "다녀올게. 너는 오늘 뭐 할 거야. 혼자 심심하겠다."

 "오늘도 똑같지. 산책하고, 공부하고, 트레이닝하고."

 "응, 응응. 그래, 너도 조심해야 돼. 무리하지 말라고."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계속 학교에만 있을 건데 뭐."

 "기다리고 있어. 그럼 나는 서둘러야 하니까, 이제 간다?"

 지금 일 학년들 중에서 주술사로서 훈련받고 있지 않은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 지금까지 다른 세 명이 같은 임무를 받은 적은 없었다. 혼자 남겨지는 건 처음이었다. 남는 게 시간이다 보니 기꺼이 남자친구를 배웅하러 나왔다.

 정문과 가까운 나무 아래. 아쉽게도 그다지 여유가 없었다.

 돌아서려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유, 유우⋯⋯ 이타도리 군! 저기!"

 멈춰서 돌아보는 모습이 왠지 능청스러웠다.

 나는 쑥스러워면서도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 임무 말인데, 무슨 소년원이라고 했던가?"

 "어, 맞아. 니시도쿄 시에 있는 에이슈 소년원이래."

 "특급 원령 주령? 나는 잘 모르겠지만 심각한 상황인 것 같던데. 많이 위험한 거야?"

 "으음, 글쎄. 우리 임무는 생존자 확인과 구출이니까 아마 전투는 없을 거야. 걱정 마."

 아이들이 임무를 전달받을 때 나도 대략적인 내용을 들었다. 자세히는 몰라도 위험도가 높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원래는 주령과 동일한 혹은 비슷한 등급의 주술사가 해당 임무를 수행한다. 특급이라면 최소 준1 급 이상 실력을 가진 사람을 보내는 것이 맞다. 그러나 옛 시대와는 달리 현재는 훈련받은 주술사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 자신에게 버거운 주령을 상대하는 것쯤 보통 일이라 한다. 여기저기 주워들은 게 있어 나도 분위기 정도는 읽는다. 특급이란 말을 듣고 후시구로가 한숨을 삼켰다. 무사히 돌아올 거라 믿지만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앗, 미안. 사람을 불러세워 놓고 혼자 생각에 잠겨서. 이제 됐어. 고마워, 이타도리 군."

 이타도리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치 들리지 않았던 것처럼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타도리 군, 왜 나를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서둘러야 한다며. 이러다 늦겠어. 빨리 가."

 사뿐사뿐히, 그가 다가왔다. 시선은 그저 내게 푸욱 꽂혔다. 긴장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그는 나를 불렀다.

 "."

 그리고 또 한 번 불렀다.

 "."

 씽긋 웃으며 붉은 뺨을 내리고,

 "우리 이제 사귀는 사이네."

 소곤거리는 얼굴에는 빛이 났다.

 "그러네! 되게 좋다! 헤헤헤."

 "헤헤헤, 좋아? 근데 왜 성으로 불러? 사귀는 사이가 됐는데 왜 아직도 이타도리 군이야?"

 "나, 나한테 시간을 줘. 다음에는 이름 부를게. 이번 임무 끝나기 전까지만 기다리면 안 돼?"

 마음속으로는 하고 있었다. 계속. 목까지 차오른 이름을 몇 번이나 삼켰다. 나는 내가 진심으로 반한 상대와 사귀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마음은 이미 여름. 쉴 틈 없이 쿵쿵 뛰어대는 가슴을 붙잡느라 몸살을 앓을 지경이다.

 "."

 이타도리는 화난 척을 잘한다. 아니, 그냥 무표정이 살벌하다. 평소에는 항상 웃고 있으니 몰랐는데 작정하고 노려보면 눈을 마주치기가 무서울 정도다. 그저 뚫어지게 쳐다볼 뿐인 너무나도 반듯한 눈이라 견딜 수 없다. 물론 나는 그런 의외의 부분들도 좋아한다. 다시 웃음꽃이 피면 더욱 눈부시다. 그가 길게 자란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럼 다른 거."

 "음⋯⋯."

 요비스테라든지, 이름을 부른다든지. 결국 무리였다. 다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 더는 붙잡아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과감히 그의 목을 끌어았다. 쪽, 뺨에 입맞추고 얼른 떨어졌다. 아니, 놓긴 했는데 떨어지기 무섭게 따라붙었다. 입술이 또 한 번, 쪽, 닿았다. 그는 접촉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뭘 내어주든 그 이상으로 돌려받게 된다.

 "너무 늦어지면 전화할 테니까. 그동안 연습해. 알았지. 정말 갈게."

 "네, 다녀오세요."

 수줍게 대답했다. 그는 아쉬운 듯 나를 쓰다듬다가 덤덤히 떠났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이 꼬맹이들, 나를 얼마나 부끄럽게 만들 셈이냐. 적당히 해라. 눈꼴 시려워서 못 봐 주겠다. 어우, 내 눈!"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돌아서자 스즈카가 뺨에서 튀어나오며 구시렁댔다. 입만 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스즈카도 부끄러워요? 스쿠나 씨가 보고 있어서요? 그럼 안 돼요. 자꾸 한눈 팔면 저도 본격적으로 방해할 거예요. 딴생각 하지 말고 스즈카도 고죠 쌤한테 표현 좀 해요. 둘이 좋아하면서 요즘에는 왜 그래요. 찬바람 쌩쌩."

 "글쎄⋯⋯ 아무래도 내가 고죠에게 차인 것 같구나."

 "네애? 언제요! 어떻게요! 저는 그런 얘기 처음인데요! 무언가 오해가 있었던 거 아니에요? 쌤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데요? 서, 설마! 나는 인간이고 너는 주령이라 안 돼? 그럴 수가! 믿고 있었는데! 고죠 쌤, 왜 그랬어요! 배신자!"

 "목소리 낮춰. 나는 말이다. 고죠가 너희 보다 어렸을 때부터 녀석을 지켜봤어. 너희 만큼이나 애송이였지."

 스즈카와 고죠 쌤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어쩌면 두 사람에게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복잡한 사정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주령이란 존재를 그다지 접해 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스즈카는 매사 담담하고, 은근히 잘 웃고, 장난도 친다. 그런 그녀가 드물게 착잡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과거에 내가 녀석에게 애송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실망과 죄책감을 안겨 주었다. 그건 돌이킬 수 없어."

 스즈카와 고죠 쌤이 서로 바라볼 때 나는 둘 사이에 특별한 뭔가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리움일 거라고 단순히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복잡한 감정이었다. 두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문득 돌이켜보면 안타까움과도 같았다.

 "저는 쌤을 안 지 얼마 안 됐지만, 한 번도 그런⋯⋯ 슬퍼하시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사실은 나도 못 봤어. 고죠가 정말 힘들어할 때 나는 언제나 녀석의 옆에 없었거든."

 스즈카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나에 대한 현실은 제대로 보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비관적이고 덧없는 꿈처럼 말한다.

 "그거예요? 겨우? 걱정 마요. 그래도 고죠 쌤은 스즈카를 사랑해요. 저는 알 수 있어요."

 "사⋯⋯ 맙소사. 그딴 말은 입에 담지도 마라. 이건 네가 읽는 로맨스 소설 따위가 아니야."

 "제가 잘못 본 건가요? 지금 스즈카의 얘기를 듣고 저는 오히려 더 확신했어요. 사랑이에요."

 "도대체 어디가. 지금도 뒤에서 견디다 못해 약으로 겨우 버티잖아. 말해 봤자 입만 아프겠군."

 고죠 쌤의 두통도 속앓이도 스즈카가 곁에 있으면 사라질 것이다. 그는 그녀와 웃고 있을 때 아무도 모르게 안심한 표정을 짓는다. 그걸 정말 모르는 건지. 꼬치꼬치 따져 물어도 보고 나를 설득해 보라고 과감히 대들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의미가 없었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말했다. 낡은 것은 닦아 봤자 낡은 것일 뿐이라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이미 흉터로 남은 상처는 어쩔 수 없다는 뜻일까. 그것만은 함부로 부정할 수 없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그가, 그녀가, 우리가 너무 나약하다. 불쌍하다. 그러니 설령 그게 현실이라 해도 나는 우리를 믿고 싶었다.

 오늘도 산책하고, 공부하고, 트레이닝하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일도 잊지 않았다. 몇 번이나 목을 가다듬으며 열심히 연습했다. 좀 부끄럽긴 해도 다음부터는 작은 목소리로나마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이타도리⋯⋯ 아니, 유지를. 이제 밤이다. 내 하루는 끝났지만 잠들 수 없었다. 침대에 몸을 눕히지도 못하고 휴대전화기만 들었다 놓았다 했다.

 "더 기다릴 셈이냐. 이러다 날 새겠다."

 "전화하겠다고 했는데. 왜 안 할까요?"

 "너무 피곤해서 깜빡하고 잠들었나 보지."

 "아뇨⋯⋯ 뭔가 이상해요. 어쩐지 불길해요."

 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떨쳐내고 싶어도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불안은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기분 탓으로 여기고 싶지만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나를 애워싼다.

 "안 되겠어요. 제가 유지한테 걸어 볼래요."

 스즈카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알고 있다. 뭔가, 뭔가를.

 "안 받아요⋯⋯ 전화기는 켜져 있는데⋯⋯."

 "그러니까 지금쯤 아무것도 모르고 쿨쿨⋯⋯."

 주령은 이런 식으로 태어나는 것일까. 스즈카를 만나고 이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면서 감춰 있던 것이 드러났다.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그려졌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나는 그것을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고 볼 수 있었다.

 "세 사람 다 안 받지는 않을 거예요. 그쵸?"

 그것은 어디든지 있다. 나를 포함해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주변을 바람처럼 떠돈다. 슬픔, 두려움, 증오, 원망, 미련. 그리고 하나 더 있다. 무엇보다 짙은 냄새를 풍기는 것. 죽음. 고개를 젓고 끝없이 마음속으로 부정했다. 그러나 내 손은 속이지 못했다.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손목을 꽉 움켜쥐어도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막을 수 없었다.

 "여보세요? 쿳키? 다행이다! 받아 줘서 고마워! 이런 시간에 미안해!"

 가슴을 쓸어내렸다. 분명히 통화가 연결됐고 노바라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안정적인 호흡을 듣는 것만으로 모든 의심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불안이, 떨림이, 작은 소음에도 다시 역류하는 것처럼 끓어올랐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쿳키, 지금 어디야?"

 「어⋯⋯ ⋯⋯ 우리 차에 있어. 지금 학교로 돌아가는 중이야.」

 숨소리는 평소와 크게 다를 게 없는데 어쩐지 목소리가 달랐다. 차갑고 딱딱했다. 미리 훈련된 것처럼. 저항할 수 없는 것처럼. 노바라는 침착하고, 담담하고, 냉정했다. 그러면서도 인간이기에 동요를 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구나! 모두 임무 끝나고 지쳐서 차에서 잠든 거지? 그치? 헤헤헤."

 「⋯⋯.」

 "쿳키⋯⋯ 나 불안해. 무슨 말 좀 해 봐. 옆에 유지 있지? 잠깐 바꿔 줘."

 「에이 씨⋯⋯ 나 보고 어쩌라고⋯⋯ 미안해. 지금 나랑 후시구로밖에 없어.」

 노바라는 힘들어하면서도 주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일을 얘기했다. 세 사람의 임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가 안 돼. 왜 그렇게 되지. 유지는 스쿠나 씨가 치료해 주면 되잖아."

 「그 개자식을 아직 몰라? 걔들은 우리랑 달라. 인간이 아냐. 괴물이라고.」

 나는 잠자코 들으며 서랍을 열었다. 물 없이 약을 삼키고 기계를 끼웠다.

 괴물이라니. 실소가 나왔다.

 "꼬맹아⋯⋯."

 그때 심장이 요동쳤다. 커다란 바위가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신음하며 꽈악 움켜쥐자, 머잖아 기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차라리 꺼내 버리고 싶을 만큼 아프다. 어째서 나는 이다지도 약한 심장을 가진 걸까. 애초에 이 모양이니까 따라가지 못했던 거다. 안전한 곳에 가만히 앉아서 기도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검붉은 피와 같은 숫자를 보며 탄식했다.

 "헉⋯⋯ 헉⋯⋯."

 아무것도 부정 못 한다.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무엇 하나 받아들일 수 없다. 주령은 부정적인 감정의 결정체라고. 그럼 뭐 어때. 어차피 인간의 감정이야. 굳이 말하면 인간 때문이야. 하나도 다르지 않아. 똑같아. 그렇잖아.

 "괴물? 그럼 뭐야? 나는 뭐야? 헉⋯⋯ 헉⋯⋯ 쿳키, 나, 너무 아파."

 「? ! 쓰러지면 안 돼! 약을⋯⋯ 야, 후시구로! 이제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이리 줘! 여보세요? 스즈카 씨, 치료할 수 있겠어요?」

 "최선을 다하고 있다만, 너도 알잖냐. 내 능력 밖이야. 당장 병원에⋯⋯ 으윽!"

 스즈카가 곁에 있으면 아픔이나 괴로움은 금세 사라진다.

 마치 그 자리에서 피가 멎고 예쁜 새살이 돋아나는 것처럼.

 그런데 아픔이 가시질 않았다. 괴로움밖에는 느끼지 못했다.

 언젠가 그녀가 내게 농담처럼 말했다. 온갖 반송장을 다 경험해 봤지만 나처럼 까다로운 녀석은 처음이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숨 쉬기 벅차다 느꼈는데 이제 알 것 같다. 스즈카도 힘에 부쳤던 거다. 까다로운 나 때문에. 무리를 해 왔던 게 틀림없다. 더는 몸부림조차 칠 수 없었다. 시야가 까맣게, 빨갛게 뒤덮였다. 어쩌면 스즈카조차 치료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침대 위에서 울고 있는 자신의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고죠! 살려 줘! 헉⋯⋯ 헉⋯⋯."

 미안하다. 한계야. 이제 더는 못하겠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는 늦기 전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로부터 며칠 간 의식을 잃고 되찾길 반복했다. 어디까지 꿈이고 현실이었는지 모르겠다. 겨우 겨우 눈을 떴다.

 "스즈카."

 하얀 천장이 보였다. 식은땀에 젖어 눅눅해진 침대가 느껴졌다. 지겨운 기계들과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내가 있었다.

 "스즈카."

 몸이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 가슴을 수십 차례 찔러댄 것 같았다. 악몽같은 기계음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싫어⋯⋯."

 꿈이라면 깨고 싶었고 현실이라면 다시 잠들고 싶었다. 어느 쪽이든 좋으니, 언제나처럼, 그녀가 대답해 주길 바랐다.

 "나 여깄다. 감히 죽지 마라. 내가 너를 어떻게 살렸다고 생각하냐. 진정해 꼬맹아."

 "으⋯⋯ 흑⋯⋯ 대답이 없어서 떠난 줄 알았어요. 저는 당신이 필요해요. 가지 마."

 "괴물이라도 말이냐. 은혜를 모르지는 않는구나. 농담이 아니라 진짜 부서질 뻔했다."

 "꿈⋯⋯ 꿈을 꿨어요. 봤어요. 우리 같이 지냈던 날들. 스즈카는 달라요. 괴물 아니에요."

 부서질 뻔했구나. 하지만 부서지지 않았어. 눈물과 안도의 미소가 뿌옇게 서렸다. 스즈카도 지친 듯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자신의 친구에게 말하듯 외쳤다. 죽일 테면 죽이라지. 데려갈 테면 데려가라지. 아직 그녀가 있어.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내 몸이 아우성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밤새도록 이야기했다.

 "옛날에는 굉장한 주령이었다면서요?"

 "응? 뭐, 굉장하긴 했지. 흠흠. 그건 왜?"

 "왜⋯⋯ 지금은 왜 그렇게 약해요?"

 "뭐, 뭐야. 약하긴 누가 약해, 인석아."

 "맨날 여기저기서 구박만 당하잖아요."

 "⋯⋯."

 "저 같은 사람들⋯⋯ 더 살게 하는 거. 간단해 보여도 실은 스즈카한테도 엄청나게 부담이 큰 일이죠? 그쵸?"

 "딱히."

 "오랜 시간에 걸쳐서 점점 약해졌던 거예요. 무리해서 힘을 썼으니까. 그러니까 스즈카는 이제 괴물 아니에요."

 "괴물이 아니면 뭐게? 인간이게?"

 "네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당신이 정말 어떤 존재인가는 저한테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당신과 내가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거. 같이 웃을 수 있다는 거. 무엇보다 당신을 이렇게나 좋아할 수 있다는 거예요. 헤헤헤."

 "네놈들은 하루라도 위선을 떨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지? 한두 번 속냐? 진실은⋯⋯ 내가 더 잘 알아!"

 "스즈카도 몰라요. 고죠 쌤의 마음이니까. 부딪혀 보기 전에 안 된다고 하지 마요. 행복한 모습 보여 주세요."

 "울지 마! 알았다! 알았어! 눈물이 내 입으로 들어오잖⋯⋯ 어우 짜! 퉤! 이제 그만! 그만 좀 울라고! 뚝 그쳐!"

 현실은 로맨스 소설이 아니라고 했죠. 그거야 나도 알고 있어요. 그래도 나는 꿈꾸는 걸 그만둘 수 없었어요. 왜냐면 자신에게는 이룰 수 없는 꿈이라 생각했거든요. 어쩔 수 없잖아요. 내 이야기가 아니여도 행복한 결말 보고 싶다구요.

 "결국에는 다시 돌아왔네요. 병원."

 "나도 협박당하긴 했지만 너까지 끌어들여서 미안했다. 퇴원하면 집에 가자. 기숙사 말고. 네가 살던 집으로."

 "그래도 돼요? 그럼 가요. 계속 연락하면서 지낼 수 있잖아요. 쌤이랑, 후시구로 군이랑, 쿳키랑. 가끔 만나서 놀고요."

 "좋다! 가자! 누가 붙잡든 협박을 하든 그냥 가는 거야! 그런 음침하고 재미없는 학교에 더 있다간 나을 병도 안 낫는다! 어휴!"

 옳소! 무리한 탓에 말이 나오지 않아 또 한 번 속으로 외쳤다. 그 전에 먼저 병원을 나갑시다. 죽든 살든 퇴원부터 합시다.

 스즈카도 나도 며칠 동안 푹 쉬면서 조금씩 이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나야 물론 그녀가 포기하지 않고 치료해 준 덕분이다. 다시 고전으로. 머무른 시간은 짧다지만 그것도 내 방이었으니 정겹고 그리운 기분마저 들었다. 눈물이 찔끔 났다. 이걸 언제 다 정리한담. 반나절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나는 작은 물건부터 차례로 상자에 담았다.

 똑똑똑.

 문득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누구세요."

 "나, 나야. 노바라."

 "쿳키? 어서 들어와."

 "어어, 그럼 들어갈게."

 천천히 문이 열렸다. 어째 사람은 온데간데 없다 했더니 한참 뒤에 노바라가 문 뒤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내가 손짓하고 나서야 그녀가 주춤거리며 들어왔다. 두리번두리번. 처음 오는 곳도 아닌데 어딘가 많이 어색해 보였다.

 "쿳키, 왜 이렇게 쭈뼛거려?"

 "아니⋯⋯ 나는 그냥⋯⋯."

 "좀 어수선하지만 앉아. 차 한 잔 줄까?"

 "됐어. 그냥 네 방이 계속 비어 있었잖아. 오늘은 소리가 들려서 와 본 거야. 오자마자 짐 정리하고 있었네."

 "나는 스즈카를 따라온 거니까. 있어 봤자 폐만 끼칠 것 같아. 마음먹은 김에 최대한 빨리 돌아가기로 했어."

 노바라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방금 전까지 물건을 담고 있던 상자가 있었다. 그녀에게 선물받은 것도 그 안에 넣어 두었다. 괜찮다고 했지만 차 정도는 같이 마시고 싶었다. 나는 그녀를 침대에 앉힌 뒤 마실 것을 내오려고 돌아섰다.

 "우리한테 화났지?"

 그때, 노바라가 말했다.

 "이타도리가 죽었는데 우리는 말짱히 살아 돌아와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잘 지내고 있어서, 그래서 화내는 거지?"

 의젓하게 앉아 있는 노바라의 모습은 태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와 달리 일찍이 단련되어 있었으니까.

 "미안해."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과 마주하는 자세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거침없이 말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혼자 떨어져 있었어. 적의 수가 너무 많았어. 후시구로도 나를 구하러 오느라고 같이 싸우지 못한 거야. 애초에 내가 넋 놓고 있다 당하지 않았으면, 뿔뿔이 흩어지지 않았으면, 걔는 살 수 있었어. 그러니까 나한테 화 풀고⋯⋯."

 그제서야 노바라의 얼굴에도 겨우 나와 같은 나약함이 비쳤다. 나는 고토를 삼키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화 안 났어. 노바라는 인정 안 하려고 하지만 네가 마음 약한 여자애란 걸 알고 있었어.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 하고 있다가 뒤에서 몰래 운 거 아냐. 후시구로 군도 겉으로 표현 안 하는 남자애잖아."

 좀 더 일찍 연락하고 싶었지만 이런 말들이 그녀의 의젓함을 무너뜨린다면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돌아와서 전과 다를 바 없이 훈련하고 있는 두 사람을 봤을 때 원망은커녕 고마웠다. 덕분에 나도 정신차릴 수 있었다.

 "나는 화나서 떠나는 게 아니야."

 "그럼? 무서워서 도망치는 거야?"

 "응."

 "!"

 내가 원했다기 보다는 스스로 등을 떠민 꼴이었다. 나라고 해서 쉽게 놓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그녀처럼 강하지 못했던 것뿐이다. 그 임무에서는 유지였다. 다음 임무는. 만에 하나 노바라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불안과 싸우다 결국 무력해지고 말았다. 노바라가 그런 내 어깨를 붙잡았다. 다시 자신을 바라보게끔 손끝에 힘을 실었다.

 "⋯⋯ . 앞으로 내가 넘어질 때마다 이렇게 누군가를 계속 잃게 된다면, 나는 일어날 수 없어."

 내가 떠난다고 노바라가 이겨내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미안하고 아쉬워서, 나는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노바라도 겁나?"

 "쬐, 쬐끔. 인정해."

 "정말 귀여워. 마음 약해지네애."

 "그러니까 여기 있으라고. 가지 마."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매번 겪는 통증과는 느낌이 달랐다.

 "헉⋯⋯."

 "?"

 아파서 괴롭고 무엇보다도 무거웠다. 한마디 말의 무게를 견디기가 버거웠다. 마지막에, 가지 말라고 했을 때. 노바라의 말이 가시처럼 날아와 박히는 것 같았다. 스즈카도 느낀 걸까. 짓누르는 듯한, 옭아매는 듯한, 익숙한 느낌. 때로는 스즈카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생각과 감정이 전해진다. 어쩌면 그녀인지도 모른다.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당신은 줄곧 이런 속박을 견뎌내 왔던 거예요. 지난 몇 백 년 동안.

 "!"

 노바라가 나를 끌어안았다. 며칠 지났을 뿐인데 그리운 느낌이었다.

 "왜 그래! 왜 아픈데! 도대체 이게 뭐야! 누가 이렇게 만든 거냐고!"

 나도 그녀에게 지친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쿠기사키 씨. 친구한테 실연당한 여자애를 막 안고 그래도 돼요? 헤헤헤."

 "흑⋯⋯ 더 웃어어. 더어. 나는 네 푼수 같은 말투랑 웃음소리가 좋단 말이야."

 얼굴을 묻고 헤헤헤 웃어 줬다. 반쯤 묻힌 소리에 노바라도 피식 웃었다. 아픈 건 어쩔 수 없지만 가슴 속까지 번졌다.

 "노바라는 가끔 남자보다 터프하다니까. 내가 지금 러브러브하고 있는 거 유지가 보면 되게 황당할 거야."

 "듣고 보니 내가 왜 이런 응큼한⋯⋯ 굳이 할 필요 없는 말까지 하고 있지? 어색해지기 전에 떨어져야겠다."

 "나는 노바라가 여자애로서 사랑받길 바라지만 유지와 만나지 못했다면 분명히 노바라를 좋아하게 됐을걸."

 "풉! 너야말로, 벌써부터 내 편 들어도 되는 거야?"

 뭐라 말해도 고전에서 지내는 동안 즐거웠다. 짧은 시간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쓰던 물건들과 함께 모두 상자 안에 담아 간직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 다이어리에는 아직 페이지가 가득 남아 있다. 여백을 채우기 위해 종종 상자를 열어 보겠지만 그렇게 써내려간 것들은 그리움에 젖은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내가 이대로 도망친다면.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다이어리를 보물처럼 여겼다. 지울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것. 미완성인 채로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그리움뿐인 이야기로 채우고 싶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유지는 이곳에 머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도 남는 걸 택했다. 자기는 죽기 아님 까무러치기니까 무서울 게 없다고 했다. 그 정도 각오면 나도 강해질 수 있을까.

 "그래서 결국 고전을 떠나지 않기로 한 것이냐. 이래서 꼬맹이는, 시시각각 마음이 갈대처럼 변한다니까."

 "꼬맹이라서가 아니라, 변덕쟁이인 거예요."

 "자랑이다!"

 "저도 피해자예요. 노바라처럼 귀여운 여자애가 작정하고 미인계를 쓰는데 누가 안 넘어가요. 억울합니다."

 스즈카는 자업자득이라고 하겠지만 나도 이번에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애써 담아 놓은 짐을 다시 풀고, 정리하고, 청소하고, 그러다 몸살이 나서 이틀 간 앓아 누웠다. 노바라가 기꺼이 도와줬기에 망정이지 나 혼자였음 꽤나 우스운 꼴이 됐을 거다. 퇴원하자마자 무리를 했으니 어쩌면 또 나둥그러져서 모두에게 폐를 끼쳤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분간 컨디션 관리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 누워 있을 수만은 없다. 다행히 몸이 한결 가벼워져 산책을 나왔다. 어떻게든 일어나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지만,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여유를 가지고 몸과 마음을 추슬러야 한다. 유지가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욕심부리면 안 된다.

 "어쨌든 이것으로 내 화려한 휴가도 물건너갔군. 이참에 나도 너를 핑계로 튈 계획이었는데. 망했다! 망했어!"

 "어디로 튀려고요? 고죠 쌤은 어쩌고요? 저는 스즈카를 존중하지만 그런 비겁한 계획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스즈카에게는 내가 쌤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려나. 물론 그녀가 진심으로 신물이 나서 떠나고 싶은 거라면 이견은 없다. 그게 아니니까.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그녀는 내가 헤맬 때마다 나를 이끌어 준다. 나도 그녀에게 어설프게나마 그러한 역할이 되어 주고 싶다. 오해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가려 할 때는 붙잡아 세울 것이다. 이래 봬도 나는 진지하다. 언제쯤이면 알아 줄까. 내 말을 귀담아 들어 주긴 하지만 스즈카는 결국 오냐오냐 어린애 취급이다.

 "잘 들어. 얘기가 이렇게 되는 거다. 이제 빡친 고죠가 불쌍한 이지치를 진심 따귀로 응징할 거야. 그건 시작에 불과하지."

 "진심 따귀요?"

 "그런 다음에는 그 놈 안에 있는 미친개가 깨어나서 영감탱이들을 물어 죽이려 하겠지. 그럼 나한테까지 그 불똥이 튀는 거다."

 "미친개요? 뭐든 간에 잘못한 사람은 혼나야죠. 이번 일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요. 저, 저는 쌤을 응원할 거예요!"

 "아이고 머리야. 얼마나 제자로 있었다고 잠깐 사이 너도 미친개 바이러스에 감염됐구나.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다. 훌륭하군."

 스즈카는 어른들의 사정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도 이제 고등학생이고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때로는 어른들의 그 말이 구차한 변명으로 들린다. 아직은 말해도 모를 거라는 둥 어쩔 수 없다는 둥 판에 박힌 말들. 적어도 고죠 쌤은 내게 그런 변명을 하지 않았다. 제자가 죽었으니까. 쌤이 무슨 일을 하든 이유가 있을 거라 믿는다. 물론 나도 스즈카가 딱하긴 하다. 안 그래도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치이는 신세라 몸을 사리는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한편으로는 고죠 쌤이니까 그런 일이 가능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참, 며칠 전에 고죠 쌤이랑 만나서 얘기했잖아요. 궁금했지만 엿듣는 건 나쁘니까, 저는 기억 안 나요. 두 분 화해한 거죠?"

 "화해하고 말 것도 없었어. 더는 고전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 과감히 떠나겠다고 했지. 웬일로 쿨하게 가라고 하더군. 그게 전부다."

 "그리고요? 그냥 왔어요? 위로 한마디 없이? 스즈카, 너무한 거 아니에요? 이유가 없긴 왜 없어요! 이럴 때일수록 같이 있어야죠!"

 "위로? 위로는 내가 받아야지! 억지로 끌려와서 애송이들 치다꺼리나 하다 이제는 언제 튈지 모르는 불똥까지 걱정해야 하잖냐!"

 "그, 그건 그래요. 협박을 받긴 했죠. 하지만 생각해 봐요. 애초에 쌤이 그 정도로 강하게 나오지 않았음 스즈카가 고전에 왔겠어요?"

 "하아? 절대!"

 "그러니까요. 어쩌면 처음부터 제자들의 훈련을 돕는 건 핑계였고 스즈카를 곁에 두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요."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그런 상상력을 드라마 작가가 되어서 펼쳐 보는 건 어떠냐. 생사를 뛰어넘는 사랑. 고죠가 보면 기겁하겠군."

 "자기는 재밌게 볼 거면서. 칫."

 스즈카가 이곳에 발이 묶인 또 하나의 이유는 과거에 그녀의 영혼과 주력을 봉인한 주물 때문일 것이다. 영혼 없이는 당연히 존재할 수 없다. 문제는 지난 수백 년 동안 고죠 가에서 그 주물을 소유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스즈카는 당주님 말씀이라면 억울해도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게 사실이다. 도망쳐 봤자 멀리 가지도 못하겠지.

 "전화나 받아라."

 "제 거 아닌데요?"

 나는 스즈카와 내 전화기를 같이 들고 다닌다. 스즈카는 검은색 나는 흰색. 일부러 소리도 전부 다르게 설정해 놓았다. 그래서 그다지 헷갈리는 일은 없는데 이번처럼 진동이 울릴 때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것에 먼저 손이 간다.

 흰색을 넣어 두고 반대쪽 주머니에서 검은색을 꺼냈다. 이 순간 누구보다 반가운 이름이 액정에 비쳤다. 이름 옆에는 스티커를 붙인 것처럼 사랑스러운 하트. 볼 때마다 입 꼬리가 올라가서 능글능글 웃게 된다. 스즈카의 반응도 귀엽다.

 "꺄아, 고죠 쌤이에요. 헤헤헤."

 "아, 그러냐. 다시 주머니에 넣어."

 "가지 말라는 거예요! 얼른 받아요!"

 "싫다. 나는 그 놈과 더 할 얘기 없어."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말하면서 누가 봐도 연인임을 짐작할 수 있게 저장해 놓은 이름은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헤어지자고 말은 쉽게 했지만 어쩌면 사실 처음부터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라는 레파토리인지도 모른다.

 "그럼 스즈카가 후회하지 않게 제가 받을게요!"

 "누가 후회를 해? 이미 끝났다니까, 이 녀석아!"

 이번만큼은 뭐라 말해도 안 들을 거예요. 진짜 끝난 거면 어차피 내가 뭘 해도 소용없겠지. 그렇기 때문이다. 여기서 좀 더 고집을 부린다고 어차피 잃을 것도 없다. 나는 신이 나서 얼른 초록색 버튼을 밀어당기고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스즈카 씨의 전화기입니다아."

 「결국 가 받았네. 역시 내 제자야. 나이스!」

 "헤헤헤. 스즈카, 교대해요. 아이 참, 빨리요."

 「냅둬. 선생님이 붙잡지 않아서 삐친 거니까.」

 고죠 쌤의 그 말로 모든 게 해결된 것 같아서, 나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끝났다는 건 스즈카 혼자만의 생각이었잖아요. 그날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고죠 쌤에게도 분명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스즈카, 지금 이러는 거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러게, 어차피 다 듣게 되어 있는데 말이야.」

 어떤 사정이든 내가 두 사람에게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음은 생각해 볼 것도 없다. 유지와 사귐으로써 미칠 영향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그때는, 그래요, 우리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쳐요. 내가 응석부렸다 치자고요. 이제 스즈카가 만회할 차례예요. 이번에야말로 당신의 소중한 사람을 혼자 두지 마요.

 "고죠 쌤! 저희 안 갈 거예요! 근데 바보 스즈카는 튈려고 했대요!"

 「하하하. 그새 못 참고 또 튈 궁리를 했대? 으응, 그랬구나. 알았어.」

 살벌하네애. 이러니까 내가 좀처럼 이 소설을 내려놓을 수 없는 거다. 지난 10년 간 이어져 온 남다른 관계성. 살벌하면서도, 뭐랄까, 어딘지 모르게 야릇하달까. 스즈카에게는 미안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다음 이야기가 궁금할 뿐이다.

 "두 분 이제 화해하시는 거죠? 좋아할 거죠? 데이트할 거죠? 그쵸?"

 「그건 생각해 봐야겠는데? 어떡할래, 스즈카. 만나서 얘기 좀 할까?」

 "안 좋은 예감밖에 들지 않아. 절대 안 간다. 만나려면 너희들끼리 만나."

 「나는 아무것도 안 보여, 안 들려, 하겠다는 거지? 삐치니까 되게 귀엽네?」

 내 뒤에 숨어 눈과 귀를 막고 있는 스즈카를 생각하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내가 언제나 그렇듯이 그녀가 작정하고 의식을 묻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 상태에서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 고죠 쌤과 만나면 스즈카는 못할 거다. 마음속이 쌤의 눈동자와 목소리로 가득가득한데 별 수 있을까!

 "우우, 제 가슴까지 두근두근해요. 쌤 같은 남자를 놓치면 진짜 바보예요!"

 「그렇지. 나를 알아주는 건 제자밖에 없다니까. 뭐,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전화기 너머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마치 지금까지의 대화가 이제부터 꺼낼 이야기를 위해서였던 것처럼.

 「이런 부탁 해서 정말 미안한데, 유지 방에 가서 물건 몇 개만 가져다줄래?」

 "유지 방에서요?"

 「응. 맘에 드는 걸로 위 아래 옷 한 벌씩. 괜찮으면 속옷이랑 양말도 부탁해.」

 "위 아래 옷 한 벌씩이랑, 속옷이랑 양말이랑⋯⋯ 저기, 후드 달린 것도 괜찮아요?"

 「완벽해. 문은 열려 있을 거야.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까 천천히 골라서 가지고 나오렴.」

 "네⋯⋯."

 가시처럼 목에 걸려 꺼내기 괴로웠다. 삼키기도 버거워서 겨우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마음의 댐이 무너지고 억류되어 있던 감정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미 범람하기 시작한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어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또 우는 거냐. 그래, 아직은 웃어도 웃는 게 아니겠지. 실컷 울어라. 다 털고 일어나. 유지도 그걸 바라고 있을 게야."

 내 눈물이 스즈카의 입속으로 들어가지 않게, 나는 손수건을 꺼냈다. 축축하게 젖어서 쓸 수 없게 되면 다른 손수건을 꺼냈다. 그래도 부족해서 흐느적흐느적 손등으로 문질렀다. 어제도 이렇게 울다가 방안이 눈물 먹은 티슈로 가득 찼다.

 "저, 유지랑 약속했어요! 돌아오면 이름 부르겠다고! 아직 부르지 못했어요! 어떡해요! 벌써 염습하나 봐요!"

 "왜 수의를 입히지 않고 후드티를 입히지. 뭐, 마지막 길이니 생전에 좋아하던 옷을 입고 떠나는 것도 좋겠군."

 시간이 걸렸지만 길바닥에서 계속 통곡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죠 쌤에게 부탁받은 일도 있으니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른 뒤에 일어났다. 하도 울었더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휘청휘청 기숙사로 향하는 내게 스즈카가 말했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슬픈 네 심정은 이해한다만 정신 좀 차려라. 여기는 여자 기숙사 아니냐. 남자 기숙사는 저쪽이야. 쯧쯧."

 "쌤이 제 맘에 드는 옷으로 고르라고 했잖아요. 제 방에 있어요, 제일 좋아하는 거. 유지가 저 감기 걸릴까 봐 입으라고 벗어 줬던 거예요."

 "그런 게로군. 언제나 너를 먼저 생각했으니. 행여 더울까, 추울까,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질까. 음, 보기 드문 사내야. 녀석은 좋은 남자친구였다."

 "그리고 가지고 있으면 볼 때마다 생각날 거 같아서⋯⋯ 흑. 그냥 돌려줄래요. 유지가 입은 거 보고 싶어요."

 후드 달린 하늘색 외투를 곱게 개어 종이 가방 안에 넣고 유지의 방으로 왔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니 당연한 얘기지만 내가 기억하는 풍경 그대로였다. 유지가 마지막으로 썼던 물건들이라고 생각하니 슬픔이 북받쳐올랐다.

 유지의 물건들을 괜히 한 번씩 들었다 내려놓고, 침대와 의자를 만지작거리고, 속으로 몰래 질투했던 제니퍼 로렌스마저 애틋해 보여서 그녀의 비키니 포스터를 쓰다듬기도 했다. 그러다 옷장 문을 열자 그리운 냄새가 났다.

 "흑흑⋯⋯."

 "그러다 몸 축나겠다."

 "이 팬티 되게 귀엽죠? 흐애앵!"

 "귀엽구나 그래. 적당히 고르고 가자."

 유지가 입을 옷을 내가 직접 고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니 적당히라는 말을 들어도 나로서는 속옷 하나까지 가벼이 넘길 수 없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심사숙고해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랐다.

 "양말은 어떤 게 좋을까요? 곰돌이랑 스마일이랑 뭐가 예뻐요? 흑흑⋯⋯."

 "글쎄다. 기왕이면 가벼운 마음으로 웃으며 가라는 의미에서 스마일 어떠냐."

 "흐애애앵! 싫어요! 곰돌이로 할래요! 흐윽⋯⋯ 흑흑⋯⋯ 흑⋯⋯ 귀여워⋯⋯."

 "그래, 네 말이 옳다. 헤실헤실 웃고 있으면 여자 귀신들이 집적댈지도 모르니까."

 여자 귀신이라니.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는데 스즈카의 말을 들으니 갑자기 열이 확 올랐다. 설령 이별과 함께 모든 걸 받아들인다 해도 마음만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질투심으로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도 유지는 모르겠지.

 부탁받은 물건들을 내 마음과 함께 차곡차곡 담아 꼬옥 끌어안고 방을 나왔다. 워낙 넓은 고전이라 아직 가 보지 못한 곳도 많지만 부검실 같은 곳까지 있는 줄 몰랐다. 터덜터덜 걷다 보니 어느새 고죠 쌤과 만나서 꾸벅 인사했다.

 "고죠 쌤, 유지 옷 가져왔어요⋯⋯."

 "아이고. 이 얼굴 좀 봐. 반쪽이 됐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으니 거울을 보지 않아도 뻔했다. 울다가 진이 다 빠져 열이 오른 건지 머리가 뜨거웠다. 쌤이 안타까운 듯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커다랗고 차가워서 조금은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괜찮겠어? 유지를 볼 준비가 된 거니?"

 "무서워요⋯⋯ 그래도 보고 싶어요⋯⋯."

 고죠 쌤이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와 정확히는 내 뺨에 대고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스즈카는? 우리 스즈카도 준비 됐니?"

 "지금 농담이 나와! 빨리 문이나 열어!"

 그렇게 화낼 것까지는. 이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죠 쌤이 웃으며 물러났다. 부검실은 뒷편에 있었다.

 "네, 보시죠. 이타도리 유지 군이에요."

 문이 열렸다. 조명이 강해서 현기증이 일었다. 흔들리는 시야에 낯익은 누군가 스쳤다. 하얀 천을 두른 남자애가 있었다.

 "아, 쌤! 왜 이렇게 늦어요! 지금 제 상태가 어떤지 알면서⋯⋯ 헉."

 눈 뜨기 힘들 정도로 환한 빛 아래 남자애의 얼굴이 보였다. 눈동자가 보였다. 그때까지 나를 애워싸고 있던 감각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가슴의 통증이라든지, 자신에 대한 무력감이라든지, 짙은 현훈 따위. 갑자기 다른 세상에 떨어진 것처럼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까맣게 잊어버렸다.

 "고죠,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거냐? 저게 왜 일어나 있지?"

 "왜겠어. 귀여운 여자 친구를 울리고 싶지 않아서 돌아온 거잖아."

 고단했던 기억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웅덩이를 만들었다. 수면 위에 내 모습이 비칠 정도로 깊었다.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비가 그치고 날이 개이는 것과 같이 당연한 것처럼 내 마음도 맑아졌다. 햇빛이 그늘을 밀고 들어와 떨어져 있어도 그의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입가에 흐르는 미소가 온몸에 번지며 비로소 그에게 말할 수 있었다.

 "유지."

 "이름 불러 주는구나."

 유지가 대답했다. 덕분에 모든 감각이 돌아왔다. 내 몸 구석구석 움트기 시작한 감각들이 뜨거운 피를 만들고 활력을 퍼뜨렸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그래야만 했다. 마침내 나는 그를 향해 나아갔다. 망설임 없이 끌어안았다.

 "유지! 유지!"

 임무를 마치고 무사히 돌아오면. 떠나기 전에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몇 번이라도 부를 수 있을 때까지 연습했으니까. 어쩌면 끝내 삼키지도 뱉지도 못할 뻔했던 이름을 입안에 잠시 머금는 것만으로 달콤한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 미안, 나도 안아 주고 싶은데. 내가 지금 좀⋯⋯."

 좀 뻣뻣하게 느껴지는 것 같은데. 왜 이러지. 맞아, 며칠 동안 누워 있었으니까 굳는 게 당연해. 이렇게 생각한 나는 유지의 몸을 살살 어루만졌다. 놀랐는지 움찔하며 물러나는 그에게 괜찮다는 말 대신 내 품으로 더 끌어당겨 넓은 가슴에 뺨을 댔다. 그의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듯했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게는 어떤 약보다 잘 듣는, 어떤 서러움도 어떤 괴로움도 잊게 하는, 상냥한 남자 친구의 손길이었다.

 "이제 안 울어도 돼. 돌아왔잖아. 하하하. 스즈카 쌤도 안녕하세요."

 "어어. 근데 너, 그렇구만. 그래서 옷을 가져오라고⋯⋯ 흠흠⋯⋯."

 "가져왔어요? 그럼 빨리 주세요! 너무 생짜라 위험하다구요!"

 "풉! 거, 네 옷을 왜 나한테 달라고 하냐. 네 여자 친구 있잖아."

 다른 건 안 들리고 여자 친구라는 말이 다시 한 번 내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두 팔에 힘을 싣고 바짝 붙어서 온몸으로 내 마음을 전했다. 돌아와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내가 유지를 누구보다 많이 아끼고 보듬어 줄 거야. 여자 친구니까.

 심장 박동이 더 빨라졌어. 유지도 설레는구나. 응, 나한테도 전해지고 있어. 두근두근. 두근두근. 기쁨의 빨간 불이 켜진 거야. 행복의 경고음인 거야. 내 마음도 같아. 할 수 있다면 유지랑 만날 수 없었던 시간 만큼 붙어 있고 싶어.

 "우리 넷이서 밥 먹으러 갈까? 쌤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가시면 어떡해요! 아⋯⋯ , 거기에 부비적거리지 마. 윽."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지롱. 쌤이 보고 있어서 부끄러운 거잖아. 유지도 참. 짓궂게도 나를 떨어뜨려 놓으려 하기에 으응 하며 버텼다. 부검실 안이라 온도가 낮아서 입김이 날 정도였다. 많이 추웠지. 내가 더 따뜻하게 해 줄게.

 "유지, 준비하고 바로 나와야 된다?"

 "아, 알았어요."

 유지의 목소리에 어쩐지 힘이 없었다. 갑자기 피로가 쏟아지는 듯이. 나는 지쳐 있는 남자 친구에게 무슨 일을 해 줄까라는 세상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그 사이 고죠 쌤이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히나 싶더니 다시 덜컥 열렸다.

 "나오는 데 몇 분 걸리는지 볼 거다?"

 "알았다니까요!"

 고죠 쌤이 쿵 하고 문을 세게 닫았다. 언제부터인가 스즈카도 말이 없었다. 둘만 남게 되자 다시 눈물이 났다.

 "흑⋯⋯ 유지,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어. 보고 싶었어."

 "나도⋯⋯ 계속 너를 떠올렸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어떻게 된 거야. 스쿠나 씨가 심장을⋯⋯ 심장을⋯⋯."

 "심장을 뽑혔는데⋯⋯ 그게, 잘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죽다 살아났으니 후유증이 생기지 않을 리 없다. 비슷한 경험을 했기에 알 수 있었다. 유지는 기억에 혼란이 생긴 모양이다. 더 심각한 문제를 겪지 않길 바라며 일단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충분히 쉬고 나면 기억이 차츰 돌아올 테니까.

 내가 생과 사를 넘나들었을 때도 실제로는 고작 며칠이었지만 훨씬 긴 시간을 어둠 속에서 보낸 기분이었다. 보이는 길은 하나뿐. 어디로 이어지는지 가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다.

 한편으로는 유지가 기억을 하지 못해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약했던 시절의 나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죽음 앞에서는 유지도 두렵지 않았을까. 그 와중에 나몰라라 시치미 떼고 있는 뺨의 눈을 보고 울컥했다.

 "흐애애애앵! 스쿠나 나쁜 놈! 나쁜 놈아! 왜 그랬어! 나빠! 나빠!"

 "아, 아야! 아야야! 나쁜 놈 맞아. 하지만 내 뺨을 때려도 소용없어."

 누가 아플지 뻔한데 유지의 뺨을 찰싹찰싹 때리고 있었다. 내 남자 친구를 위험에 빠뜨렸던 못된 저주의 왕 때문에 눈에 봬는 게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지만 결국 유지를 때린 사람도 그를 어루만진 사람도 나였다.

 "흑흑. 미안해. 너무 기쁜데 너무 화가 나서⋯⋯ 유지, 많이 아파?"

 "응⋯⋯ 아, 아니! 괜찮아! 괜찮으니까 그거 잡아당기지 마! 안 돼!"

 하얀 천을 쥐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뺏어 와 버렸다. 스르륵. 남자 친구의 나신 앞에서 나는 마치 북극 하늘에 펼쳐진 오로라를 바라보는 것처럼 난생 처음 우주만물의 깊이를 깨달았다. 아아, 나는 그렇게 태어나 여기까지 오게 됐구나.

 "꺄아! 뭐야! 유지! 왜 홀라당 벗고 있어?"

 "그게, 그러니까 말이야⋯⋯ 나도 모르겠어."

 유지는 하얀 천과 이별하는 순간 체념했던 것 같다.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심지어 가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뒤돌아섰던 나는 비로소 고죠 쌤의 심부름을 떠올렸고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유지에게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내, 내가 옷 가져왔어. 여기, 속옷이랑 양말도 있어."

 "아, 다행이다. 노 팬티로 돌아다니긴 진짜 싫었는데."

 그렇잖아도 활활대는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유지의 방에 머무는 동안 내가 만지작거렸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생각할수록 새삼 부끄러웠다. 그러고 보니 아까 통화할 때 고죠 쌤이 '괜찮으면⋯⋯'이라고 했다. 유지에게는 노 팬티를 면하기 위한 속옷 한 장이 간절했을 텐데 난처한 상황에서도 거기까지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던 걸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나는 반대로 떳떳해졌다. 부끄럽지 않아. 남자 친구의 속옷이니까 만질 수 있는 거야.

 "저기, 다 입었어?"

 "응. 돌아봐도 돼."

 나는 유지의 대답을 듣고 마음속으로 3 초를 셌다. 돌아설 때도 일부러 살금살금 천천히 움직였다. 유지는 바짓단을 털어 깔끔하게 마무리한 뒤 허리를 펴고 윗쪽 옷매무새를 만졌다. 어젯밤까지 내 품에 있었던 하늘색 외투였다.

 "이 옷에서 네 냄새가 나. 좋다."

 "유지가 없을 때 매일 입고 잤어."

 자기 전에 샤워를 하니까 화장품이나 샴푸 냄새가 짙게 뱄을 것이다. 그래서 정작 내가 원했던 유지의 냄새는 더 빨리 사라졌다. 이제 그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뭉클했다. 앞으로도 며칠 동안은 눈물이 마르지 않을 것 같다.

 "자, 이리 와. 이제 안아 줄 수 있어."

 "⋯⋯."

 "왜⋯⋯ 울지만 말고. 나도 안게 해 줘."

 "무서워. 닿으면 사실 꿈이었다든가⋯⋯."

 꿈에서 깨어났을 때 모든 걸 잃는다면. 내가 만졌던 게 깨진 파편에 불과한 것이었다면. 생각하기조차 버거울 만큼 잔인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오늘처럼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겠지만, 그때는, 더는, 가슴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눈물을 그쳐야만 했다. 유지가 미안해하니까. 유지도 지쳤으니까. 나는 부득불 웃음이 나는 일을 떠올렸다. 예를 들어 스즈카가 아침에 진흙을 밟고 넘어질 뻔했던 일. 인간이든 주령이든 누구나 한 치 앞도 예상하지 못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고마워요 스즈카. 아침부터 큰 웃음을 줘서. 덕분에 눈물이 쏙 들어갔어요. 눈을 감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하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녀에게 전해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떠 보면 어느새 나는 유지의 품에 안겨 있었다. 얼굴이 푹 묻혀 눈만 빼꼼 나왔다. 겨울 이불에 들어간 것처럼 따뜻하고 포근했다.

 "얘기 들었어. 눈 떴을 때 병원이었지. 무서웠지."

 "안 무서웠어⋯⋯ 그때는 죽는 것도 안 무서웠어."

 그날 나는 선생님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마침 그때 전화기가 울리지 않았다면, 스즈카가 필사적으로 손을 뻗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병원 침대에 누워서도 이번에는 돌아오는 길을 찾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서 피폐해져 있었고 하마터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속 로미오가 될 뻔했다.

 "."

 나는 유지의 손에 살며시 기대었다. 정갈한 그의 손가락이 눈물 자욱을 따라서 내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나, 너 많이 좋아하고 그래서 네가 나 때문에 아픈 게 제일 속상해."

 유지가 하는 말이라면 그게 무엇이든지 달콤한 약 같아서 잠이 쏟아지는 것처럼 멍해졌다. 둥실둥실 떠 있는 기분을 느끼며 몽롱하게 있다가 뜻밖의 아픔에 신음했다. 앙탈을 부려야 할 정도로 내 팔을 잡은 유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중요한 거야. 꼭 기억해. 내가 없어도 잘 지내야 돼. 다른 사람들이랑."

 차마 유지의 눈을 보면서 두고 가는 사람이 나쁜 거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눈치를 한 번 살피고 입술만 삐죽 내밀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팔을 놓아 주었다. 그래도 유지니까 좋다. 화를 낼 때도 내게는 스릴러 로맨스 같다. 오싹한 느낌이 묘하게 짜릿하달까. 가슴을 꽉 조여서, 괴로워서, 무조건 네 하고 대답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당연한 거지만 싫다고 대답해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이미 내 마음이 굴복했기 때문에 더 화내 봤자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삐죽한 것도 몇 초만에 원상복귀됐다. 눈이 풀린다. 다리가 풀린다. 다 풀린다. 둥실두둥실. 유지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그에게 매달려 뺨에 입맞추었다. 그대로 떨어지지 않고 마주보며 말했다.

 "나는 유지랑 같이 있을래. 계속."

 "나도 지킬 거야. 계속."

 영원히 이별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는데 뭐가 두려울까. 나는 눈을 감았다. 뺨 다음은.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자기가 정해 놓고. 허리쯤에 머물러 있던 유지의 손이 내 얼굴을 받쳤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처음보다 더 긴장되어서─

 "고죠! 이 놈들 뽀뽀한다! 사고친다! 빨리 와!"

 "뭐? 안 돼!"

 긴장하지 말걸. 이제 와서 뽀뽀 정도로 무슨 긴장이야. 냉큼 해 버렸음 좋았을 텐데 중요한 순간에 방해하는 짓궂은 어른들 때문에 결국 하지 못했다. 유지가 아까보다는 덜 무섭고 예의바른 느낌으로 두 어른에게 화를 냈다.

 "두 분 다 재미없거든요! 잠깐이라도 저희 프라이버시를 지켜 줄 수는 없어요?"

 부끄러워서 입을 다물어 버린 나 대신 유지와 쌤의 시선을 끈 사람은 스즈카였다.

 "누가 할 소릴! 먼저 나를 배신하고 고죠한테 고자질한 건 이 망할 꼬맹이란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별로 듣고 싶지도 않다는 듯 유지가 과감히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알겠으니까! 고자질은 그만해요! 서로 까발리고 까발리는 더러운 난투극이 되기 전에!"

 프라이버시는 유지와 내게도 당연히 민감한 사항이다. 그러나 주령의 그릇인 우리에게는 남다른 고충이 있다. 좋든 싫든 일거수일투족이 알려지게 되는데 거기에 각자의 사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비단 둘만의 문제가 아니란 거다.

 그 가운데 주령도 그릇도 아니지만 크게 한몫하고 있는 고죠 쌤이 능청스레 끼어들었다.

 "나쁜 것만은 아니야, 유지. 예를 들어 한쪽이 바람을 펴도 이대로는 바로 들켜 버리잖아."

 고죠 쌤이 밑밥을 뿌린 것 같은데. 말릴 틈도 없었다.

 "그렇다! 이 녀석을 잘 감시해라! 노바라랑 부둥켜안고 자기 입으로 러브러브라고 했다!"

 스즈카가 바늘에 걸리면 나는 자연스레 따라간다. 일타쌍피. 이렇게 피를 보는 것이다.

 꿈처럼 내게 돌아온, 두 번 다시 잃고 싶지 않은, 소중한 남자 친구. 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이 바람 폈어?"

 "스즈카! 그 부분만 떼어서 얘기하면 어떡해요! 오해받기 딱이잖아요! 아, 아니야! 유지!"

 그때는 유지가 죽은 줄 알았으니까 우리 관계도 끝났다고 생각했달까, 아니, 아니, 그렇다고 쿳키한테 진짜 딴마음을 품었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고⋯⋯ 당황한 나머지 사고회로가 이상하게 꼬였다. 에라, 모르겠다. 이판사판이다.

 "고죠 쌤! 스즈카는요! 스쿠나 씨랑 소개팅하고요! 유지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그랬대요!"

 "어머나! 배신감 두 배! 스즈카가 몰래 바람을 피웠어? 유지가 그걸 또 숨겨 줬어? 하하하!"

 "그마아안! 결국에는 난투극이 되어 버리잖아요! 그러니까 고자질은 안 돼요! 그만하라구요!"

 고죠 쌤이 입맛을 쩝 다셨다. 더 자세히 듣지 못해서 아쉽다는 듯이. 유지의 중재로 다행히 일이 더 커지는 건 막았지만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서로에게 상처만 남겼을 뿐. 나는 나중에라도 해명하면 된다. 하지만 스즈카는⋯⋯ 사실 소개팅이라 말하기도 뭐한데 나는 좀처럼 의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누구든 한결같이 무시하는 스쿠나 씨도 스즈카랑은 평범하게 대화를 나눈다! 심지어 부르면 나와 준다! 스즈카야 뭐 겉으로만 츤츤대지 처음부터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상태였고. 문득 진땀이 나서 손으로 이마를 훔쳤다. 유지랑 좀 더 단둘이 얘기하고 싶었는데.

 제자의 이런 속마음쯤은 빤히 보이는 건지 고죠 쌤이 아쉬운 대로 능청을 떨며 말했다.

 "유지 말이 맞아. 제자들의 프라이버시는 꼭 지켜 줘야지. 응. 딱 5분 줄게. 서둘러야 돼."

 "고맙네요."

 유지가 대답하자 쌤이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이번에는 과연. 아니나 다를까 또 열렸다.

 "뭐라 말해도 유지를 응원하니까아. 서두르라 했다고 5 분도 되기 전에 나오면 실망할 거야."

 "고오맙네요!"

 문이 닫히고 다시 둘만 남겨졌다. 유지가 피곤한 듯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으⋯⋯ 나 조금 자신이 없어졌어. 아, 오해하지는 마. 정말 좋은데, 뭐랄까. 그냥 혼란스러워."

 "응⋯⋯ 말하지 않아도 알아, 유지. 솔직히 말하면 나도 아직 적응이 안 돼. 하지만 재밌으니까."

 내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무심코 내뱉은 말 때문에 유지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재밌으니까? 하하하. 그렇네. 어쩌겠어. 어차피 웃음밖에 안 나는걸. 웃는 수밖에."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유지가 없는 동안 나는 두 분이 정말 잘 되길 바랐어."

 유지도 나만큼은 알고 있다. 지켜봤으니까. 우리가 만나기 전부터, 10 년, 20 년도 넘게 그들은 얽히고설키어 왔다. 처음부터 다른 누군가에 의해 좌지우지될 관계가 아니었다. 떠나겠다 말 한마디로 깔끔하게 정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

 유지는 침착해 보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걸까.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강해서 더 미안했다.

 "일단은 알겠어. 지금으로써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아직까지는 두 분이 아무것도 확실하게 결정하지 못한 것 같으니까 좀 더 지켜보자. 나도 미안해. 딱히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지금부터 같이 고민해 줄게."

 "고마워."

 "고민해 보겠다는 거지 다 받아들이겠다는 게 아니야. 누군 속도 없는 줄 알아? 나를 봐, 평범한 남자애잖아. 물론 쌤이랑 너는 다르지만 너도 이해하게 될 거야. 좋아하니까 나는 네 머리카락 한 올도 양보하기 싫어. 너는 이게 재밌어?"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 말도 못했다.

 마주보도록, 유지가 내 소매를 흔든다.

 "○○ 씨. 나, 질투해도 되죠?"

 그 말에도 차마 대답은 못하고 끄덕였다.

 "화나면 꽤 무서운데. 괜찮아요?"

 나는 얼음이 됐다. 유지는 딱히 화낸 적 없지만 그런 상상을 하는 게 별로 어렵지는 않았다.

 "그건 안 괜찮구나? 풉! 알았어요. 내가 최대한 참아 볼게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헤헤헤."

 "헤헤헤, 좋지?"

 "아야, 아야야야!"

 내가 뭐 때문에 웃었는지와는 관계 없이, 유지는 내 볼을 쭈욱 잡아당겼다. 요즘따라 고생하는 내 볼이지만 이건 손끝에 실린 힘이 예사롭지 않다. 눈시울이 뜨거워져도 감탄의 눈물로 여겼다. 나를 흉내내는 웃음소리가 정말 똑같아서.

 "며칠 만에 야윈 거 봐. 이래서 내가 너한테 마음대로 화도 못 내는 거야. 으휴, 너 때문에 억울해 죽겠다."

 "유지가 울려서 그런 거잖아. 저도 억울합니다. 그래도 나는 유지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 저어엉말 좋아!"

 "나도 저어엉말 좋아해."

 밖에서 고죠 쌤이 기다리고 있다. 스즈카도 덩달아 부끄러워졌을 거다. 넷이서 외출은 오랜만이라 기대된다. 그래도 조금만 더. 나는 유지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의 어깨에 기대어 마음껏 응석부렸다. 그런 나를 달래듯이, 쓰담쓰담.

 "하⋯⋯ 5 분 됐네. 갈까?"

 "응!"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다. 이런 날에는 기분 좋은 햇빛을 받을 수 있다. 목조식 건물이 따뜻한 색으로 물들고 사이사이 눈부신 빛줄기가 쏟아졌다. 마침 바람이 불면서 처마에 매달린 풍경이 흔들렸다. 맑은 소리로 울렸다. 녹음이 짙을수록 나무나 향초 냄새 대신 싱그러운 풀내음이 난다. 그늘은 자갈 모양으로 드리웠다. 산책할 때 자주 지나는 길. 유지에게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걸었다. 고죠 쌤과 스즈카도 언제 그랬냐는 듯 투닥투닥하며 다정해 보였다.

 왜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지. 솔직히 나는 아직도 자신을 위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여기서 내가 갖는 의미와 필요성을 계속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끊어낼 수 없는 감정에 단단히 얽매여서 하루가 멀다 하고 그리워진다. 유지가 돌아와 주지 않았다면 그 모든 것을 잃고 가까이하지도 멀리하지도 못한 채 근처를 맴돌았을 것이다. 그래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거나 허물없이 장난을 치는 것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꿈과 다를 바 없다 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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