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내기에 지는 바람에 벌칙을 받게 된 건데⋯⋯ 같이 가겠다고 말해 줘서, 고맙습니다아. 이타도리 씨."
"편의점 갔다 오는 건데요 뭐. 그보다 요즘 왜 그렇게 미안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시나요. 씨." "제대로 말해야지요. 말 안 하면 마음이 불편해요⋯⋯ 사실, 나는 조금 걷고 싶었어. 비가 계속 내려서 산책을 못했잖아. 맑은 하늘 보면서 걸으니까 기분 좋다. 솔직히 산책할 때 이타도리 씨가 옆에 없으면 심심해요. 미안해요." "불편하네애. 나야말로 미안해요. 괜한 소릴 해서. 아니, 후회는 안 해. 근데 왠지 전보다 더 쓸모없는 놈이 된 기분이야. 뭐, 이렇게 조용한 날 평소 같았으면 뭔가 일어나길 바랐겠지. 오늘은 생각하기 싫네. 주령이라든지, 주령이라든지." 자습시간이었다. 출출하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네 사람이 입을 모아 간식거리를 사다 먹기로 했다. 그리고 내친김에 내기를 했다. 진 사람이 혼자 편의점에 다녀오기로 했고 내가 졌다. 이타도리가 그런 나를 생각해 줘서 같이 나왔다. 주문대로 골라 담은 네 사람 분 봉투는 묵직했다. 양이 많긴 해도 매번 목록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빠진 거 없나 확인해 보자. 으음. 후시구로 거. 쿠기사키 거⋯⋯ 참! 쿠기사키가 라무네 꼭 사오라고 했는데!" "맞아! 라무네! 이타도리 군, 여기서 기다려. 금방 사 올게." "내가 갈게. 일 분이면 돼. 잠깐 혼자 있어도 괜찮지? 간다?" 이타도리가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꽤 걸어왔는데, 일 분이면 된다니. 암만 생각해도 불가능한 거리였지만 딱히 위화감은 없었다. 머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아도 이타도리라면 아무렇지 않게 해내고 돌아올 것 같은 믿음 아닌 믿음이다. 그날 밤, 전화를 끊은 뒤부터. 며칠 동안 비가 심심찮게 내렸다. 교실에서는 다른 애들도 있으니 딱히 평소와 다른 점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답답했다. 산책을 못하면 둘이서 얘기할 기회가 없고 그래서 조금 어색해졌다. "있잖아요, 스즈카. 그날 이타도리 군은 왜 그런 말을 했던 걸까요." "보이는 대로 말했을 뿐이겠지. 너, 좋아하잖아. 그 사실이라는 놈." "그럼 방금 전에는 왜 자기가 쓸모없는 놈이 된 것 같다고 한 걸까요."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하냐. 네가 그렇게 만들어 놓고서. 나 원 참." 큰길로 가는 대신 골목을 지나서 가면 조금 더 빨리 학교에 도착할 수 있다. 지름길이긴 하지만 인적이 드물고 어두컴컴하다. 도쿄는 오랜만이라 아직은 낯설기도 하고 처음으로 나 혼자 남겨져서 문득 좀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꼬맹이. 너, 아무런 느낌도 없냐?" "네?" "놀라지 말고 침착하게 뒤를 봐라." "제 뒤에⋯⋯ 뭐가⋯⋯ 꺄아아아아!" 주령이었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주술사도 아닌 내게 주령이라 불리는 것은 그냥 무언가였다. 나쁜 예감밖에 들지 않는 무언가. 분명히 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모르겠다. 헛것이 보이는지도. 하지만 스즈카가 같은 것을 보고 있다면. 공격해 오면 어떡하지. 첫만남 때 느꼈던 것과 같은 짙은 악의가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기에 도망치고 싶었다. "저, 저기. 제가 길을 막고 있었나요? 죄송합니다!" "네, 지나가세요. 그럼⋯⋯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겉모습만으로 저를 얕보시면 안 돼요! 큰일나요!" "제 안에 훨씬 무서운 사람 있어요! 정말이니까요!" 내가 생각해도 그건 어딘가 많이 잘못된 대처법이었다. 그러나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스즈카도 기가 막혀서 할말을 잃었는지 도와주긴 커녕 나오지도 않았다. "저기, . 지금 그 주령하고 대화하고 있는 거야?" 이제 살았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놀랐다. 아니 벌써. 빠르기도 빠르거니와 경황이 없어서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은 느낌이었다. "이타도리 군⋯⋯ 어떡해. 왜 안 가지. 나, 나, 사과했어어." "또 사과했어? 일단 와. 그 다음에 싸울지 말지 결정하자." "실례했습니다⋯⋯ 저 이제 갈 거니까요⋯⋯ 안녕히 계세요!" 나는 이타도리의 뒤에 숨었다. 주령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있었다. 잘 보면 나를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귀여워." "응?" "저 주령 말이야. 달팽이랑 비슷하게 생겼잖아." "그런가?" "많이 놀랐어? 숨 쉬고 있는 거지? 심호흡해 봐." "후⋯⋯ 하⋯⋯ 후⋯⋯ 하⋯⋯ 고마워. 이제 괜찮아." 나도 딱히 누군가 나 대신 싸우고 있을 때 그 사람 뒤에 숨어서 구경만 한다든지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동화 속 이야기를 동경하던 어린시절에도 그게 싫었다. 공주님 드레스를 입긴 했지만, 나는 손에 장난감 칼을 들고 괴물과 싸우기 놀이를 하는 여자애였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이타도리 대신 앞으로 나서고 싶었다. 지켜 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에게 순진무구하던 시절의 배짱은 없었다. 적어도 아직은. "저기⋯⋯ 차, 착한 주령이에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스즈카 쌤?" "이쯤 되면 너희도 눈치챘겠지만 주령이라 해서 모두 인간을 해칠 만큼 포악한 건 아니야. 예를 들어 단단한 껍질이 의미하는 바는 대개 하나, 두려움이다. 놈도 마찬가지로 우릴 꺼리는 게야. 덤빌 놈이었으면 벌써 덤볐지." 그 말을 듣고 나는 주령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전혀 움직이지 않으니 특이하게 생긴 봉제인형 같기도 했다. "너어, 무서워? 그럼 나는 안 무서워! 헤헤헤." "한 번 붙으면 쉽게 떨어지지 않겠지만 말이야." "헉!" "아무튼 건드리지 않으면 되는 거죠? 가자, ." 우리는 주령을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하고 다시 길을 걸었다. 문득 스즈카가 말했다. "희한하군. 그 장소에서 별다른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무슨 뜻이에요?" "개연성이 없달까. 말하자면, 너무 뜬금없는 곳에 나타났다는 거다. 이봐, 영감. 당신이 그런 거 아니야? 응?" 나는 이타도리의 뺨을 돌아보았다. 묵묵부답. 스쿠나는 평소처럼 그 자리에 지그시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스즈카에게는 그럭저럭 평범하게 대답해 주니까 그 틈에 한 번 더 인사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좀 아쉬웠다. "스쿠나가 한테 왜 장난을 쳐요?" "왜긴, 심심해서지. 게서 뭐 하고 놀겠냐."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닫혀 있는 눈을 보며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리고 웃었다. 스쿠나 씨도 참, 심술쟁이. "료멘스쿠나는 겁내지 않으면서 기껏해야 4급 정도의 주령을 보고 놀라서는 난리부르스를 춰 대는구나." "싸워야 할지도 모르잖아요. 공격하지 않으면 괜찮아요. 스쿠나 씨도 저를 해치치 않으니까 안 무서워요." "영감이 작심하면 너랑 나 여기 다 죽어. 아직 잠이 덜 깨서 조용한 게지. 어떻게 해치지 않는다고 확신하냐." "첫째, 아는 여자애니까! 둘째, 나 같은 걸 죽여 봤자 재미없으니까! 셋째, 예의바른 나를 귀여워해 주시니까!" 스즈카와 이타도리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침묵의 아이 컨택. 무언가 많은 걸 주고받은 듯한데, 나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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