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즈카가 고죠 쌤과 점심을 먹기로 한 날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습을 하는 동안 혼자 외출을 했다. 떠들썩한 웃음소리. 모두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면 나도 긴장이 바짝 들어갔을 텐데. 다행인지 뭔지 그런 모습은 없었다.
"이타도리 군,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야?" "아, . 우리 수수께끼 하고 있었어." 이타도리와 후시구로는 문제집을 등진 채 앉아 있고 노바라는 아예 책상에 걸터앉았다. 어쨌든 화기애애해서 좋다. 쌤이 한 명이라도 제대로 공부하고 있지 않으면 꼭 이르라고 당부했지만 이런 분위기면 아무래도 말할 수 없다. "와아, 재밌겠다. 나 수수께끼 되게 좋아해! 나도 하고 싶어!" "조금만 빨리 오지. 그럼 문제 낼 테니까 잘 생각하고 맞춰 봐." 어차피 배신할 거 화끈하게 공범자가 되기로 했다. 들켜서 다같이 혼나면 좋고, 안 들키면 더 좋고, 고죠 쌤은 괜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니 좋고 좋고. 뒤늦게 합류해 이제부터 혼자 궁리해야 하는 나를 위해서 모두 돌아앉았다. "이건 왼쪽에는 없고, 오른쪽에는 있어." "이건 새것에는 없고, 낡은 것에는 있어." "이건 시작할 때는 있고, 끝날 때는 없어." 이타도리, 후시구로, 노바라 순으로 내게 힌트를 줬다. 세 사람을 번갈아보며 각 힌트의 공통점이 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나 빼고 다 맞춘 문제라 생각하니 아무래도 모르겠다고 말하기 껄끄러워서 겉으로는 자신있는 척했다. "알 것도 같은데, 더 줄 수 없어? 힌트." "얼마든지 줄게. 우리는 이미 고수니까." 힌트를 주는 것도 나름 고민이 필요할 텐데. 너무나도 여유롭다. 새삼 교실에 뭐가 있었나 살펴보다 다시 귀를 기울였다. "높은 곳에는 있고, 낮은 곳에는 없는 거." "질문할 때는 없고, 대답할 때는 있는 거." "기뻐할 때는 있고, 싫어할 때는 없는 거." 미간에 힘을 줬지만 내 안의 데이터베이스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두둥, 에러가 뜨더니 파란색으로 뒤덮였다. "우⋯⋯ 우우⋯⋯ 우우우. 모르겠습니다." "어떡할까?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더 줄까?" "네⋯⋯ 주세요⋯⋯." 이번에도 맞추지 못하면 울지도 모른다. 맞추고 싶다. 맞춰야 한다. 재빨리 머리를 재부팅하고 이타도리에게 집중했다. "나랑 후시구로한테는 하나도 없고, 쿠기사키한테는 세 개나 있는 거." "야, 그건 좀 아니지. 기본적으로 '글자'도 다르고, 하나는 '큰 거'잖아." "노바라한테 세 개나 있어? 글자? 큰 거? 아! 알겠다! 답은 입(口)이야!" "드디어 맞췄네. 축하해. 이제 너도 고수야. 일본어의 고수. 하하하." 이타도리의 힌트를 듣고 혹시 했다가 후시구로의 힌트에 전구의 불이 환하게 들어왔다. 정답을 거의 떠먹여 준 셈이지만 어쨌든 맞추긴 했다. 왼쪽(左)에 없고, 오른쪽(右)에 있고. 새것(新)에 없고, 낡은 것(古)에 있고. 시작할 때 있고(始), 끝날 때 없고(終). 등등. 전부 입 구(口)자의 유무다. 한자에 대한 수수께끼였다니. 블루스크린까지 떴는데. 처음부터 모르면 바보고 알아도 차마 자랑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흠흠. 야, 후시구로. 얘기를 많이 했더니 목이 좀 마르네. 나랑 가서 음료수 뽑아 오자." "또냐⋯⋯ 그래, 같이는 가 줄게." 문득 비 내리는 현관 앞의 네 사람이 생각났다. 노바라와 내가 우산을 두고 왔던 날. 그때와 같은 상황이다 보니 금방 이해가 됐다. 미리 얘기했어야 됐던 걸까. 후시구로도 마지못해 일어나자 노바라가 이타도리와 내게 말했다. "너희 둘은 뭔가⋯⋯ 뭔가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눠 봐. 예를 들면 좋아하는 녀석이라든지." 그런데 뜻밖이라고 해야 할지, 이타도리까지 일어나 노바라의 어깨를 부드럽게 밀어냈다. "내가 다녀올게." "왜,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어? 그냥 얘기하면 되잖아.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뭘 겁내?" "억지부리는 건 하나도 도움 안 돼." "둘러대지 말고. 아이믄 아이라⋯⋯ 아놔, 너 때문에 사투리 나왔잖아! 닥쳐! 내가! 간다고!" "아아, 그래. 후시구로랑 단둘이 있고 싶었구나. 그렇다면 응원해 줘야지! 힘 내라, 쿠기사키!" "이걸 콱!" "뭐? 가려면 빨리 가!" 노바라는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후시구로가 안 오고 뭐 하냐는 듯이 그녀를 잡아당겼다. 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웃옷을 털고 후시구로와 함께 교실을 나갔다. 나는 이타도리가 자리에 앉길 기다렸다가 말했다. "사실, 내가 노바라한테 부탁했어. 이타도리 군이랑 얘기할 수 있게 자리 좀 피해 달라고." "⋯⋯." "마음대로 해서 미안. 좀처럼 기회가 안 생기더라고. 이타도리 군, 요즘에는 산책 안 하잖아." 이유가 뭐였든지 고마워. 나한테 충분히 시간을 줘서. 덕분에 훨씬 차분히 말할 수 있게 됐어. 그렇게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이타도리 군. 나는 말하기도 전에 들켜 버리는 바보야. 그러니까 그냥 나답게 고백할게." "너답게?" "응. 이런 거야. 나 말이야,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근데 누구인지는 말 안 할래. 비밀이야." "그것 참 편리한 비밀이네. 그리고? 더 하고 싶은 말 없어? 답례로 나도 내 비밀 말해 줄까?" 표정이나 눈빛은 둘째치고 말에는 책임이 따른다. 내게 호의였어도 상대방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비겁하다는 걸 알지만 내 나름대로는 고민하고 망설인 뒤에 내린 결정이었다. 부담이 되지 않게. 나답게 전하는 것. "이타도리 씨도 비밀이 있어요?" "당연하죠. 엄청난 게 있는데요." "내가 알면⋯⋯ 많이 곤란한가요?" " 씨가 아프다는 걸 숨긴 것쯤은 내가 씨한테 숨긴 거랑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침묵이 흘렀다. 나는 이타도리의 눈치를 보며 한참 뜸을 들였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엄청난 비밀이라면⋯⋯ 혹시⋯⋯ 혹시⋯⋯ 이, 이타도리 군은 그런⋯⋯ 문제가 있는⋯⋯." 탁! 그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깜짝 놀라서 역시 말하는 게 아니었나 하고 후회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 분위기 못 읽는구나! 나는 평범하게 네가 경계해야 될 남자애야!" "미, 미안. 미안해. 나는 이타도리 군이 별로 평범하지 않다고 해도 괜찮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말하지 마! 내가 안 괜찮아!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나는 평범해! 어제도 엊그제도 극히 평범했어!" 결국 분위기를 못 읽는다고 혼이 났지만 일단 웃었다. 그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평범했구나. 다행이다아. 아, 아무튼 오해한 건 미안해요! 그래서, 이타도리 씨의 비밀은 뭐지요?" 다급하게 표정을 고치고 물었다. 기가 막히지만 웃기긴 한지 이타도리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언젠가 네가 나를 나쁜 새끼라고 욕해도 너한테 차마 말할 수 없는 비밀이란 게 비밀이야. 하하하." 어째서 내가 그런 심한 말을. 나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는 오히려 더 담담하게 말했다. "나 말이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비밀이 많은 녀석일지도 몰라.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 이미 강렬한 네 글자가 내 머리에 짙은 인상을 남겼기에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비밀이라면, 친구일 뿐이라면, 그의 말대로다.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답답한 것은 그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대답은 아직일까. 이미 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알면서 모른척하고 있는 걸까. 믿고 싶지 않은 걸까. 그러니까, 그게 끝인 거야? 나는 시르죽은 얼굴로 이타도리를 찜부럭하게 쳐다봤다. 그도 말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럼 이타도리 씨. 좋아하는 사람은⋯⋯ 아 참, 없다고 했지. 그건 얘기해 줄 거예요? 나중에라도요." "사실 내가 말하려던 게 그거예요.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솔직하게 얘기할게요. 네, 있는 것 같아요." "있으면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지. 있는 것 같아는 뭐예요. 저번에도 그러더니. 참 편리한 비밀이네요." 마음에 물결이 일었다. 잠잠해질 듯이 고요하고, 쓸려나갈 듯이 떨리고, 갑자기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어느 쪽이지. 무표정은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착잡해 보이지도 않았다.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쿠기사키가 돌아왔을 때 이런 분위기면⋯⋯ 오해를 받을 것 같아. 내가. 그러니까 수수께끼라도 계속 할까." "응, 할래." 눈에 보이는 만큼, 들리는 만큼의 진실에 안주하기로 했다. 그가 내게 뭐라고 답한 것인지 천천히 생각해 볼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 만족한다. 긴장하지 않고, 편하게 숨쉴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이타도리는 내가 어떤 애인지 안다. 나를 무리시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의 자상함 또한 잘 안다. 그래서 고마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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