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학교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몇 학기가 지난 상태였고 진도를 따라잡기가 벅찼다. 그러나 비슷한 이유로 진땀 흘리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수업이 심화 단계로 접어들면서 전보다 어려워지고 숙제도 배로 늘어났다.

 오늘은 후시구로의 방에 모였다. 그는 동급생 중 가장 성적이 좋기 때문에 고죠 쌤이 없을 때 다른 세 사람의 공부까지 거들어야 하는 입장이다. 물론 쌤이 당부하지 않았어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지켜본 바로는 그렇다.

 "아, 어려워. 모르겠어. 진짜 모르겠다고오."

 "쿠기사키, 정신 사나우니까 가만히 좀 있어."

 "젠장, 으시대긴. 네가 못 가르쳐서 그런 거잖아!"

 "내 잘못이야? 나는 충분히 설명했어. 몇 번이나!"

 가엾은 노바라. 단정한 머리가 엉망이 되도록 애쓰고 있지만 자신에게 유난히 취약한 과목이다 보니 좀처럼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나는 아직 견딜 만한데 잠시 후 내 모습이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진도가 늦으니까.

 답답함도 괴로움도 공감하기에 잠깐 머리를 식히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노바라가 문제집을 탁! 덮으며 일어났다.

 "에잇, 몰랏! 나 5분만 잘게⋯⋯ 후시구로, 침대 좀 빌리자."

 "참 나."

 "아오, 땀 냄새. 하여간 남자들이란⋯⋯ 하나같이 맘에 안 들어."

 "너 말이야, 멋대로 드러눕고는⋯⋯ 어휴, 말을 말자. 잠이나 자."

 부부처럼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고 나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임무 다녀와서 피곤한가 봐."

 그러자 이타도리가 대꾸했다.

 "후시구로가 더 피곤해 보이는데."

 후시구로는 펜을 쥐고 있는 손으로 미간까지 잡으면서,

 "장난 아니야. 너한테도 책임이 있어. , 너 말이야."

 "나?"

 "우리 셋일 때는 평화로웠지. 네가 오고 나서 균형이 깨졌어."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뚝뚝한 후시구로가 말을 이었다.

 "뭘 어리둥절 하고 있어. 네가 내 유일한 아군을 독차지했잖아."

 해명하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타도리도 말이 없었고 세 사람은 다시 문제를 푸는 데 집중했다. 아무튼 둘러댔어야 했는데.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좀처럼 문제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15분 정도 지났을까.

 후시구로는 노바라의 문제집을 펼쳐서 단원 첫 장으로 되돌렸다.

 "야,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 줄게. 일어나."

 그리고 이불을 잡아당기며 그녀를 깨웠다.

 "으윽. 싫어. 나는 좀 더 잘 거야. 내버려 둬."

 "일어나라니까. 여기서 숙면하면 어떡해."

 "아⋯⋯ 싫다고 했잖아. 눈이, 눈이 안 떠져."

 노바라는 비몽사몽한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까지 덮어 버렸다. 땀 냄새 난다고 불평했던 것치고는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후시구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고 일어나서 이타도리와 내게 말했다.

 "마실 거 가져올게. 잠을 깰 만한 걸로."

 이타도리는 문제집을 보면서 어깨 너머로,

 "힘내라, 후시구로."

 하고는 말았다.

 후시구로가 또 한 번 한숨을 쉬고는 싱크대로 향했다. 만약 후시구로의 말대로 내가 그의 아군을 독차지 해 버린 것이 사실이라면. 민망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눈에 억지로 힘을 줘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나 문제를 집어삼킬듯 노려보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눈이 피로해지자 덩달아 졸음이 밀려왔다.

 꾸벅꾸벅 졸다 고개를 들었다. 후시구로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 보니 그리 오래 졸지는 않은 것 같다. 어리벙벙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다 이타도리와 눈이 마주쳤다. 기껏해야 몇 분 졸았을 뿐인데 들켜 버리다니 좀 억울했다.

 "졸려?"

 "응. 내 볼 좀 꼬집어 줘."

 농담처럼 들릴 법도 한데, 그는 대수롭지 않게 집게손가락으로 내 볼을 잡아당겼다. 그래도 힘 주어 당기지는 않았다. 그의 손은 조금 더울 정도로 따뜻했다. 도리어 다정하게 느껴져서 잠이 오는 것 같았다. 나는 과감히 그를 보챘다.

 "안 돼. 부족해. 세게, 좀 더 세게 해 줘."

 "이만큼? 이이만큼? 아니면 이이이만큼?"

 이타도리의 손에 힘이 실릴 때마다 버티는 나도 움츠러들었다.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그제야 남자애의 악력이 조금은 실감났다. 낑낑거리며 매달리자 이타도리가 손을 거두었다. 내가 부탁하고도 바보 같은 소리를 내 버렸다.

 "고마워어. 아파라아."

 마침 돌아온 후시구로가 의아하게 쳐다봤지만 별로 알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는 테이블에 쟁반을 놓고 노바라를 깨웠다. 쿡쿡 찔렀다가, 가볍게 흔들었다가, 엉덩이를 철썩 때렸다. 노바라가 비명 아닌 비명을 질렀다.

 "아악! 후시구로 이 노옴! 감히 누구 엉덩이를 때려? 죽고 싶냐!"

 "정신차려!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건데! 이러고 맨날 내 탓만 하지!"

 그냥 내버려 두라는 듯이 이타도리가 손에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나 없어도 되잖아."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해도 좋은 걸까. 말하지는 않고 조용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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