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은 쏟아져 하염없이 지붕을 달군다. 묵삭은 나무 냄새가 가볍고 싱그러운 것과 너훌너훌. 향긋한 바람이 선선해도 조금은 덥다. 넉넉히 놓인 마루는 언제라도 널찍한 그늘과 자리를 내어 준다. 쉬어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래도 넌즈시 하늘선을 바라보면 오늘은 조금만 더 멀리 나가 보고도 싶다. 어정어정 고개를 두리번대며 걷고 있을 때 우연히 이타도리를 보았다. 후시구로도 그 옆에 나란히 앉아 휴대전화기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분위기는 아마도 귀여운 강아지 사진 따위.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두 남자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나누고 몇 분 지나지 않아 후시구로는 가 버렸다. 그가 앉았던 자리는 내가 차지했다. 이야기 나누다 보니 문득 이타도리도 나와 다름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같이 놀러 가지 않겠냐고 서슴없이 말을 꺼냈다. 자습, 숙제, 훈련 등 이러니 저러니 해서 나가지 못했다. 이타도리는 늘 그대로. 반듯한 얼굴이다. 다만 두 눈에 생기가 돌더니 흥미를 내비쳤다. 내게 어디로 갈 것인지 묻기도 잠시.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가겠다고 했다.

 "쇼핑한 다음 밥 먹고 학교로 돌아오는 거 어떨까. 근데 이타도리 군, 둘이서 가고 싶어."

 "그러니까, 좋다고 했잖아. 둘이서. 다같이 가고 싶었다면 모두가 모인 곳에서 말했겠지."

 "실은 어제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타이밍을 놓쳐서⋯⋯ 저기, 갑작스럽지만 오늘 괜찮아?"

 "으응. 괜찮아. 쉬는 날이고. 어차피 특별한 계획이 없으면 후시구로랑 게임이나 할 테니까."

 일기예보의 햇님은 웃고 있었다. 나도 따라서 웃었다. 과연 맑다. 이런 날 놀러 가지 않으면 손해인 것도 같다. 고전에 온 것만으로 나로서는 갑갑한 병원으로부터 해방된 것이었지만 어느새부터인가 그런 생각은 하지 않게 됐다. 두 팔을 크게 벌려 상쾌함을 끌어안고 이내 놓아 주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떠 보니 하늘은 더욱 높고 푸르렀다.

 "한 시간 후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이대로 가도 별로 상관없지 않아?"

 "아니, 준비해야 돼. 조금만 기다려."

 "알았어."

 햇살에 비낀 얼굴이 뜨거웠다. 그대로 뒷걸음질치다, 휙 돌아서 기숙사로 뛰었다. 평소에는 잘 입지 않는 하얀 옷. 품이 넓은 블라우스와, 실바람에도 나풀거리는 하르르한 검정 원피스를 걸쳤다. 이제 곧 여름이기도 하니까.

 교복이 아니다. 그것만으로 내 나름대로는 꾸민 차림새라고 할 것이다. 준비를 마치고 같은 장소로 돌아왔다. 이타도리를 기다리게 하지 않아서 안심하면서도 기다리는 일 분 일 초가 느리게 흘렀다. 잠시 후 그의 발소리가 들렸다.

 "이타도리 군, 왔네애. 다행이다아."

 "다행이라니. 약속했으니까 당연하지."

 "혹시라도 계획이 바뀔까 봐, 걱정했어."

 "계획이 바뀌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하하하."

 "헤헤헤."

 "나를 뭘로 보고. 아무튼 이제 됐지. 빨리 가자."

 거리의 풍경은 확연히 다르다. 나무나 풀 대신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도로에 차들이 빽빽이 들어섰다. 나는 옷가게에서 옷을 몇 벌 샀다. 모두 원래 입는 옷들과 비슷하고 또래의 여자애라면 누구나 입을 수 있는 무난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목적으로 길 위를 바삐 오간다. 고전과 비교하면 몹시 어지럽고 목소리도 일부러 크게 말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나의 산책 파트너와 평소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어서 뿌듯했다.

 "고마워, 이타도리 군. 오늘 골라 준 옷들 다 마음에 들어. 너도 귀여운 스타일을 좋아하는구나."

 "음⋯⋯ 꼭 그렇지는 않아. 귀엽긴 한데 어떤 옷들은 조금 답답해 보여서. 그래도 너한테 어울렸어."

 "나는 자기 스타일만 너무 고집하는 것도 그리 좋은 습관은 아니라 생각해.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도 뭐 어때. 너, 아까 보여 줬던 옷들은 진심으로 예쁘다고 생각한 게 아니었구나. 지금 돌아가면 다른 걸로 바꿀 수 있으려나."

 "아까도 말했지. 나는 쿠기사키랑 달리 옷 같은 거 볼 줄 모른다고. 내 취향 대로 고른 옷이 네 마음에 들까. 막상 진심으로 고르면 질색할 거 같아. 정말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해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만둬. 후회하지 말고."

 귀여운 옷이 잘 어울린다는 말은 좋게 들으면 그 사람 성격과 스타일이 맞아 정말 보기 좋다는 뜻이 되지만, 반대로 들으면 유치하게 입고 다닌다는 뜻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옷은 아동복처럼 리본이나 레이스가 잔뜩 달려 있었다. 그 중에서도 최대한 어울리는 옷을 찾는 것이지만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스타일임은 분명하다. 사실, 오늘은 나도 좀 더 어른스러운 느낌의 옷을 고를 생각이었다. 이제 스즈카의 취향도 고려해야 되고, 그리고─ 어휴. 문득 한숨이 나왔다. 새옷을 장만한 것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어쩐지 힘이 빠졌다.

 남은 시간은 요기를 하거나 간단한 오락거리로 보냈다. 금세 저녁이 되었고 조용한 장소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마침 넓은 공원이 있었는데 돌을 깎아 만든 벤치가 많았다. 우리는 이름 모를 들꽃으로 둘러싸인 자리를 골랐다.

 "이타도리 군, 쉬는 날에 뭐 했어?"

 "숙제하고 그냥 침대에서 뒹굴거렸어. 오늘처럼 누가 어디 데려가 주지 않을까아 하면서."

 "좀 더 일찍 얘기할걸 그랬네애. 나는 내 방에서 로맨스 소설 읽었는데 그거 꽤 재미있었어."

 "나도 로맨스 좋아하는데 소설은 잘 모르겠어. 솔직히 책 읽는 것보다 영화 보는 게 더 좋아."

 "내 생각에 책은 여운을 좀 더 길게 느끼는 거 같아. 글자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고, 은유적인 표현도 많아서, 굉장히 몰입할 수 있거든. 남자주인공이 꽃으로 반지를 만들어 주는 장면에서 가슴이 찡했어."

 "나쁜 녀석이네애. 아, 나는 아무리 재미있게 본 영화라도 금세 잊어버려. 여운이라든지, 다 본 뒤에도 무언가 남는다는 기분은 그다지 느껴 보지 못했어. 실제로 해 보지 않은 일에는 별로 몰입이 되지도 않고. 으음, 이거면 되겠지."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처럼 어떤 것은 매년 같은 자리에 피고 지고 하여도 그 누구도 그곳에 있었는지 모른다. 이름이 뭔지 궁금하지도 않다. 어딘가의 화단에서 씨가 날아와 자라서 그대로 길가의 들꽃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짐작할 뿐이다. 손 줘 봐, 하며 이타도리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꽃을 꺾어 손가락에 둘렀다. 그러한 모습이 소꿉놀이에 진지한 아이 같다. 내게 언제나 상냥하기 때문에 소꿉놀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정말 기뻤다.

 "이타도리 군, 좀 전에 나쁜 녀석이네라고 했지?"

 "그랬던가. 그야, 뭐. 꽃은 금방 시들어 버리니까."

 우리는 공원에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곳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고전에 돌아왔다. 이타도리 몰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느라 뒷짐지고 걸었다. 나와는 관심사가 다른 스즈카도 제법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지쳐 보이는데, 괜찮아?"

 "응. 푹 잘 수 있을 거 같아."

 기숙사가 보였다. 헤어지기 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이타도리 군은 나한테 친구 이상의 일을 해 주고 있어."

 "친구 이상의⋯⋯ 저기, 그렇게 말하니까 이상하게 들려."

 "그래? 달리 어떻게 표현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헤헤헤."

 "그 정도는 보통인 줄 알았지. 바보 같이 잘해 줬네. 미안해."

 처음부터 이타도리는 내게 특별히 신경을 써 줬다. 사귐이 길지는 않아도 모를 리 없다. 내게 상냥했던 이유가 고죠 쌤에게 부탁받았기 때문이라 해도 나는 줄곧 그런 그의 상냥함에 기대어 왔다. 친구로써 호의를 져버리면 안 된다.

 "전에 했던 얘기 말인데, 누가 뭐래도 나는 스즈카가 행복해지길 바라. 그리고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

 "그게 다야? 진지하게 생각해 본 거 맞아? 내어 달란 대로 내어주고 나서, 너는 어떻게 행복해질 건데?"

 "사랑을 해야지! 헤헤헤."

 "무슨⋯⋯ 아아, 네 마음은 네 거다 이 말이지. 됐어. 네가 모두를 위한 방법을 고민하는 거라고 믿을게."

 "애초에 한몸이니까 어느 한쪽을 떼어 놓고는 생각할 수 없어. 역시 이타도리 군은 웃어 주지 않는구나."

 "나까지 웃으면 너무 슬플 거 같은데. 나는 안 행복해. 그것도 너한테 중요하면 억지로 웃으라고 하지 마."

 이타도리는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여겼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이 고민했고 한동안 말하지 않는 게 나았을까 후회도 했다. 후련하긴 커녕 마음이 더 복잡했다. 밤새 그의 말을 돌이켜 보다 잠들 만큼. 기숙사 앞에 이르자 이타도리가 짐을 건네 줬다. 겉보기와 달리 듬직한 두 팔을 가진 내게 그 정도 짐은 거뜬했다.

 "내일 보자, ."

 "고마웠어. 그럼 들어갈게."

 "그 전에, 저랑 잠깐 얘기해요."

 "⋯⋯."

 이타도리의 말투가 달라졌다고 느꼈을 때. 스즈카가 그와 마주섰다. 그 다음의 기억은 꿈처럼 흐릿할 뿐이다.


<제작> Copyright ⓒ 공갈이 All Rights Reserved.
<소스> Copyright ⓒ 카라하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