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석쟁이는 아니지 않아? 너."

 훈련을 마치고 이제 기숙사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노을이 선연해지자 숨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이타도리의 모습도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우리는 흙먼지 덮인 계단에 거리낌없이 앉아 자판기에서 뽑아 온 캔 음료로 지친 몸을 달랬다.

 "그냥 좀 부끄러워졌어. 이타도리 군한테는 더. 평소에도 나를 많이 도와주니까."

 "딱히 네가 떼를 쓴 게 아니잖아. 나도 그런 보호본능 자극에 약한 사람은 아니고."

 어젯밤 모처럼 집어들었던 책을 덮고 침대에 누웠을 때였다. 나는 지금까지 읽어 왔던 소설 중에서도 장르가 로맨스였던 것의 여자 주인공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은 모두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성장한다. 현실처럼 다양한 사건과 시련을 겪으면서 변화하기 때문에 어느 한 시점만 보고 이렇다 저렇다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주인공의 운명을 타고난 그녀들도 사랑 앞에서는 왠지 응석쟁이가 되는 것 같다. 귀족 영예든 전장을 누비는 여장부든 상관없다. 소설 속에서 사랑이 시작되면 거기서부터 남자 주인공이 확실하게 조명을 받는다. 아프면 번쩍 안아 옮겨 주고, 속상해하면 눈물을 닦아 주며 위로하고, 위기에 처하면 예고된 것처럼 나타나서 구해 준다. 주인공이 독자에게마저 끝까지 사랑스러워 보이기 위해 이 역할은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득 궁금해졌다. 주인공의 연인이 소설 속에서 사라진다면. 아플 때, 슬플 때, 위험할 때도 등장하지 않으면. 그럼 주인공도 달라질까. 그녀는 원래 응석쟁이였던 걸까 아니면 사랑에 빠짐과 동시에 응석쟁이가 되어 버린 걸까.

 나는 스즈카에게 이와 같은 질문을 했다. 사람들은 쓸데없는 고민이라며 혀를 쯧쯧 찼을 거라 예상할 수도 있겠지만, 나 역시 그랬지만, 뜻밖에 그녀는 고민했다. 그리고 오롯이 진지하고도 명쾌하게 자신의 생각을 들려 주었다.

 "사내인지 계집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다 아양스런 풋둥이거든. 혼자서는 살아 갈 수 없는 존재니까. 말하자면 그건 본능이야. 너희는 나약함을 이용할 줄 알기 때문에 이성에게 구애할 때조차 불쌍한 척을 하지. 너그러움, 배려, 사랑 따위를 바라면서. 너희가 말하는 사랑이란 참된 연민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별안간 낯뜨거워, 공기가 덥다. 그때 그랬듯이 스즈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지만, 참으로 그녀답지만, 내게는 너무 적나라히 와 닿는 것 같았다. 나약함을 이용할 줄 안다니. 인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다.

 "이타도리 군은 여자애도 터프한 걸 좋아하는 거지. 네 앞에서는 약한 소리 하면 안 되겠네. 헤헤헤."

 "여자애니까 당당하게 응석부리는 게 오히려 귀여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해. 내 말은, 나는 어떻게 해야 되지. 솔직히 지금보다 상냥한 사람이 될 자신은 없어. 둔해서 알아차리기도 어렵거든. 보통은 말이야. 으응. 네 말이 맞을지도."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보탰다.

 "음⋯⋯ 그래도 정말 좋아하게 되면 상관없으려나. 모르겠네. 왜, 응석부리고 싶은 사람이라도 생겼어?"

 "응석부리고 싶긴 해. 그, 근데 나는 귀여운 남자애 좋아해. 받아 주는 쪽이 되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

 이 말에, 이타도리는 콧방귀를 뀌었다.

 "남자애가 응석부릴 이유는 뭐가 있을까. 그, 뭐든 간에. 네가 생각하는 거랑은 달라. 괜히 손해 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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