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날씨가 좋다. 이렇다 할 일이 없어도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고 미소가 지어지는 그러한 날인 것이다. 오전 트레이닝을 마친 나는 방에서 책을 가지고 나왔다. 벤치에 앉아 읽고 있을 때 우연히 지나가던 이타도리와 만났다.
"뭐 읽고 있어?" "이타도리 군. 헤헤헤." 이타도리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는 옆자리가 아닌 내 앞에 무릎을 구부려 앉았다. 집게손가락으로 책을 잡아 내렸다가 염염한 눈웃음. 고개를 든 채 나긋나긋이 건넨다. "아, 심심해. 너는 오늘 산책 안 해?" "하고 싶어. 그래도 이거 다 읽고 나서 할래." "혹시, 저번에 얘기했던 그 로맨스 소설이야?" "맞아. 이미 끝까지 봤지만 처음부터 읽고 있어." 왜인지 이타도리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모양새였다. 그러더니 한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로 다른 손이 내 책을 덮고, 흘겨보고, 다시 펼쳤다. 표지에도 그가 내용을 짐작할 만한 일러스트는 없다. 그는 책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재미있어?" "응! 처음에는 엄청 빨리 읽었거든. 다시 한 번 천천히 음미하는 중이야. 내가 놓쳤던 부분들을 하나씩 알아 가는 것도 재미있어. 일인칭이라 남자 주인공에 대한 묘사는 별로 없지만 간접적으로 표현이 잘 되어 있더라고. 그냥 '보고 있었다'라든지, '손을 움켜쥐었다'라든지, 몇 글자 안 되는데도 이쪽을 향한 뜨거운 시선이나 감정이 느껴져." "굉장하네. 나는 한 번 읽으면 흥미가 떨어져. 영화는 다시 보기도 하는데. 책 같은 건 아무래도 금방 지쳐서." "내가 별난 건지도 몰라. 뭔가에 한 번 빠져 버리면 다른 건 눈에 전혀 안 들어오거든. 이타도리 군도 굉장해. 나는 영화의 내용은 끝까지 보고 나서도 이해 못할 때가 많아. 이야기가 되게 빨리 진행되고 생략되는 장면도 많아서 누가 누구고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더라고. 영화를 볼 때는 이타도리 군 같은 사람이 옆에 있어 주면 좋겠어." 나는 흥얼거리며 소설을 읽었다. 소설 속에서 잠시 멈추었던 시간이 다시 경쾌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내일도 이거 볼 거야?" "그럴 것 같아. 그건 왜?" "책 읽으려고. 너랑 같이." "정말? 잘됐다! 기대할게!" 책 읽는 것도 산책도 좋지만 무엇보다 같이 하는 게 좋다. 이타도리가 옆에 있어 준다면 더 재미있을 거다. "내일 이 시간에 나도 무언가 읽을 걸 가져올게." "벌써 가는 거야?" 무릎을 펴고 일어나는 이타도리를 보니 아쉬움이 밀려 왔다. 그가 내 물음에 능청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네 말 대로, 지금은 내가 안중에도 없잖아. 내일 보자." "나는, 그런 게 아니라, 잠깐, 이타도리 군. 미안. 기다려." 이타도리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내 한쪽 어깨 위로 늘어진 기다란 머리카락을 툭 쳤다. 점잖게 시비 걸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가 버렸다. 흥 토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 후 책 속으로 들어가려 애썼지만 웬걸 책이 나를 밀어냈다. 번듯한 글자가 요리조리 시선을 피해 간다. "너 말이다, 그건 누가 봐도⋯⋯." "알아요! 저도 아니까 말하지 마요!" 나올 수 없게 두 손으로 뺨을 막아 버렸다. 네, 뭔가 일어났습니다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바보예요.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부끄러웠다. 여러 가지 의미로. 그리고 다음날. 나는 같은 장소에서 책을 펼쳤다. 어제 메시지를 나누며 약속했던 시간보다 일찍 나왔다. 그냥, 그렇고, 그래서, 그러니까요⋯⋯ 그랬습니다. 오늘은 잘 해야지. "이타도리 씨, 무슨 책 가져왔어요?" "해리포터요. 깜짝 놀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직 읽어 본 적 없거든요." "해리포터를? 읽어 본 적이 없다고? 저, 저, 정말 영화밖에 모르는구나!" "어제 좀 읽었어요. 으음, 맥고나걸 교수가 고양이로 변신한 부분까지요." 그렇다는 건⋯⋯ 거의 펼쳤다 덮은 거나 다름없구나. 기억하기로는 프롤로그 첫 부분이랄까, 주인공인 해리가 등장하기도 전이다. 뭐, 이타도리도 기숙사로 돌아가면 피곤할 것이다. 고전에서 시간이 남아 도는 사람은 나뿐이니까. "신기하지. 소설 속 네 개의 기숙사가 모든 사람의 성격을 정확히 네 가지로 구분짓다니." "해리포터 팬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거잖아. 나라면 어느 기숙사에 들어갈까." "듣고 보니 궁금하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자, 네가 마법의 분류 모자라 생각하고." "간단하지! 후시구로 군은 래번클로! 이타도리 군이랑 노바라는 그리핀도르! 그리고 나는⋯⋯." 주인공 삼인방이 호그와트에 입학한 장면부터 천천히 머릿속에 그려 봤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마법의 분류 모자가 되어 나 자신에게 씌어진다면. 후시구로, 이타도리, 노바라 그리고 나. 세 사람의 기숙사가 금방 정해졌다. 이제 내 차례인데.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이럴 수가. 다른 사람들은 금방 알겠는데 정작 나한테는 어느 기숙사가 어울리는지 모르겠어." "영화밖에 안 봐서 잘 모르지만 이미지를 한 번 그려 보면 너는 후플푸프 아닐까? 노랑 노랑. 응." "아니! 후플푸프는 성실하고 진실된 자들을 위한 기숙사야! 제일 좋아하는 기숙사지만 나는 안 돼." "왜?" "나는 성실하지 않아. 친구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고 숨겼어. 그러니까 후플푸프에 들어갈 자격이 없어." "성실함이 힘든 일을 참고 견디는 모습만 말하는 건 아니야. 언제나 한결 같은 모습도 어찌 보면 성실한 거지. 그리고 진실은 네가 준비됐을 때 말하면 되는 거야. 너는 그냥 다른 애들한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거잖아." 이타도리가 내 머리에 손 모자를 만들며 나를 후플푸프 기숙사의 일원으로서 인정해 줬다. 스즈카랑은 상관없는 일이라 그녀에게 면목이 없지만 어쨌든 내가 동경하는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신이 나서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후시구로 군은 그리핀도르일 수도 있겠다. 헤르미온느도 래번클로일 것 같지만 그리핀도르에 들어갔잖아." "우리 셋이 그리핀도르에 들어가면 혼자 쓸쓸하겠다. 그래도 뭐⋯⋯ 세드릭 선배가 있잖아. 호박 주스랑." "헤헤헤. 나도 해리포터의 세계관에 뛰어들고 싶어졌어. 지금은 안 돼. 이거 다 읽을 때까지 집중해야지!" "남자 주인공이 진짜 마음에 들었나 보네. 해리, 론, 말포이, 심지어 세드릭 선배까지 포기하게 만들다니." 말포이까지는 그렇다 치고 세드릭 선배는 정말.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호그와트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이타도리 군이 반지 만들어 줬잖아. 그 부분만 10 번도 더 읽었어. 남자 주인공의 마음도 조금은 알 것 같아." "어떤 마음이었을까." "되게 벅차고 설렐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거 같아. 이타도리 군이 말했던 것처럼 꽃은 금방 시들어 버리잖아. 여자 주인공의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앞섰어. 꽃은 그냥 꽃일 뿐이구나 하고⋯⋯ 좀처럼 힘이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참았어야지! 나쁜 녀석아!" "미안합니다. 맞다, 두 주인공이 이별하는 장면에서 나였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봤어. 내가 여자일 때는 잊어 줬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남자일 때는 그녀가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왜일까. 좋아하는 건 똑같은데." "그건 사실 남자도 다르지 않았을 거야. 꽃 반지 같은 건 안 주는 게 낫지만 그 전에 맨날 무거운 반지를 끼고 다니는 게 얼마나 불편한지 알고 있으니까. 뭐, 어쨌든 둘은 이어진 거 아냐. 결과적으로 해피엔딩으로 끝났음 된 거지 뭐." 배드엔딩입니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나니 말하기 뭣하다. 사실 그 후에 남자는 떠났고 돌아오지 못했다. 두 번 다시 못 만날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싶었던 그의 절절함 때문에 이 책을 놓지 못했던 거였다. 자신의 결말을 알고 현재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그래도 예쁜 사랑이었구나라고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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