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여보세요. 쿳키, 학교에 도착했어?"

 「응! 옷 갈아입고 방으로 갈게.」

 "뭐 마실래? 따뜻한 차? 시원한 주스?"

 「당연 주스지. 아무나 문 열어 주지 마!」

 노바라에게 무사히 임무를 마쳤다는 메시지를 받고 기뻐하며 이야기하다 평소처럼 별 생각 없이 배고프다는 말을 꺼냈다. 쏘 스윗 쿳키. 요즘 내가 입맛 없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돌아오는 길에 가라아게(닭튀김)을 사다 준댔다! 가라아게에 곁들일 샐러드를 만들었다. 서두르느라 옷이 젖어서 노바라가 오기 전에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았다.

 똑똑똑.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도 아직인데, 오늘따라 굉장히 빠르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넌지시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아직 옷을 덜 입었지만 기다리게 하기도 뭐했다. 노바라는 지금 일 초라도 빨리 앉아 편하게 쉬고 싶을 거다. 여자끼리 브라 좀 보는 게 대수랴. 같이 체육복을 갈아입은 적도 많다. 대신 재빨리 옷을 집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갑자기 미안. 통화 중이길래⋯⋯ 헉."

 "이, 이타도리 군? 꺄! 뭐야! 어째서!"

 "미안해! 바, 방금 들어오라고 하길래!"

 "노바라인 줄 알았어! 꺄아! 보지 마아!"

 순정만화에서 자주 써먹는 클리셰. '옷 갈아입고 있는데 갑자기 이성친구가 들어왔습니다' 그 흔해빠진 시츄에이션이 실제로 일어났다. 심장이 고양이 움짤처럼 번쩍 뛰었다. 이타도리는 얼음이 됐다가 땡 하자마자 눈을 가렸다.

 "이, 이거 고죠 쌤이 너한테 갖다 주랬어!"

 "무슨 일이야! 비명소리가!"

 "그럼 나 갈게! 워, 또 뭐야?"

 나가려는 이 들어오려는 이가 현관에서 딱 마주쳐 서로를 꽝 들이받았다. 예정되어 있던 진짜 방문객, 노바라였다.

 "쿠, 쿠기사키?"

 "윽⋯⋯ 이타도리!"

 3초 간의 정적 끝에 살벌한 음률이 울려 퍼졌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내, 내 말 좀 들어 봐!"

 나는 허둥대다 옷을 떨어뜨렸고 그걸 주우려다 발라당 넘어졌다. 심지어 가구에 제법 세게 부딪혔다. 이윽고 노바라가 이타도리를 밀치며 방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아프고, 부끄럽고, 눈물이 찔끔 났다.

 "쿳키⋯⋯."

 울먹이는 소리로 중얼거릴 때만 해도 다른 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이를테면, 어떤 오해를 받을 수 있는지. 나는 하의와 브라만 입은 상태였다. 미처 다 입지 못한 웃옷을 품에 꼬옥 안은 채, 바닥에 엎어져서, 엉엉 울고 있었다.

 "아냐! 오해야! 오해!"

 "다 씨부맀나? 딱 대라!"

 오해였지만 그녀의 분노는 대단했다. 첫 번째 일격이 어찌나 셌는지 이타도리의 입술이 터져서 피가 고였다. 오죽하면 내가 옷 입는 걸 포기하고, 두 번째 일격을 막기 위해, 반라 상태로 그녀에게 울고불고 매달려야 했을 정도다. 그때 나는 이미 '아, 시집 다 갔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멍하니 앉아 있는 것 외에 도리가 없었다.

 "아⋯⋯."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신음소리만 들렸다. 나는 부딪힌 곳이, 이타도리는 맞은 곳이, 노바라는 주먹이 아팠다. 그렇게 세 사람은 얼음팩 하나씩 들고 상처도, 머리도, 차갑게 식혔다. 노바라가 이타도리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미안하다, 이타도리. 너를 오해해서."

 "미안하다면 다야? 사람을 뭘로 보고!"

 노바라의 일격도 일격이지만 터무니없는 오해로 짐승 취급 받은 이타도리의 정신적인 충격 또한 나 못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화내긴커녕 토라지는 것조차 본 적 없는데. 그런 이타도리 군도 이번에는 쉽게 용서해 줄 것 같지 않다.

 "야, 인마. 잠깐 기다려. 이거 좀 먹고 가."

 "참 나! 됐거든! 너나 많이 먹으세요. 흑."

 "이타도리 군! 어떡해. 진짜 상처받았나 봐."

 노바라와 나만 남겨졌다. 노바라는 머쓱한 얼굴로 찜질을 하다가 에잇 하고 들고 있던 얼음팩을 팽개쳤다.

 "너도 참! 누구인지 확인은 하고 들여보내야지."

 "미안해. 당연히 너인 줄 알고⋯⋯ 나도 부끄러워."

 이타도리가 봤다. 빨래 건조대에 널려 있는 것도 아니고 입고 있는 브라를 맨살과 함께 그에게 내보인 것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단 한 번도, 남자에게 보였던 적은 없다. 그야 당연하다. 아무리 천연덕스러운 나라도 부끄러웠다.

 "됐어, 잊어버려. 이건 사고야, 사고. 근데 저건 뭐야? 뭘 들고 온 건데?"

 "고죠 쌤이 주신 걸 이타도리가 대신 가져온 거야. 으음, 아마 내 약일걸."

 "약? 왜 아직도 약을 먹어? 너, 그 몸⋯⋯ 다 나아서 퇴원한 거 아니었어?"

 "그게⋯⋯ 영양제야. 심장에 좋은 거. 아무래도 아직 재활 중이다 보니까."

 노바라는 어딘가 찜찜한 얼굴을 하며 잠깐 망설이더니 하얀 봉투를 뒤져서 약통을 꺼내들었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인간, 나랑 후시구로한테는 적당히 둘러댔구나. 이타도리만 제대로 알고 있는 거네! 그렇지?"

 "미안⋯⋯."

 "왜 얘기를 안 한 거야? 우리가 알면 무슨, 무슨 편견이라도 가질까 봐? 진작 알았으면 나도 더⋯⋯."

 "내가 부탁했어. 쌤은 괜찮을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아서. 있잖아⋯⋯ 쿳키."

 노바라는 봉투에 다시 약을 넣고 나를 외면했다.

 내가 말했다.

 "조만간 얘기할 생각이었어. 쿳키는⋯⋯ 그래, 나랑 지내는 걸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하나둘 씩 떠나보내야 했다는 말은 물론 덧붙이지 않았다. 노바라가 분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의미 없는 일?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어! 그런⋯⋯ 네 앞에서, 그 따위 말을 지껄인 놈이 있는 거야? 응?"

 상처받았지만 나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내게 마음을 내어주기가 무섭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다 잊었어. 잊어도 돼. 이제 나한테는 쿳키랑, 이타도리 군, 후시구로 군⋯⋯ 게다가 쌤도 있잖아."

 어째서일까. 노바라의 눈동자에 놀라움 그리고 두려움 같은 것이 비쳤다. 그녀가 내 눈을 피하며 말했다.

 "에이, 이놈의 망할 배. 이 와중에 배고프다고 난리네. 가라아게나 먹어야지. 너는⋯⋯ 이런 거 먹어도 돼?"

 "나한테 편견 안 갖는 거 아니었어?"

 "이, 이건 다르지! 그, 뭐냐, 있잖아, 기름진 음식은 심장에 좋지 않을 거 같아서⋯⋯ 아, 그래! 됐어! 먹자!"

 "헤헤헤."

 앞접시와 포크, 샐러드를 가지고 왔다. 오랜만에 먹으니 맛있었다. 하지만 노바라는 먹는 게 시원찮았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물었다.

 "무슨 생각해?"

 배고프다더니 입맛이 달아났는지 포크를 쥔 노바라의 손이 그녀의 발치로 툭 떨어졌다. 그녀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조금 석연찮은 구석이 있는데, 내가 틀렸으면 좋겠어."

 "⋯⋯."

 "뭐, 그런 것쯤은 네가 구별하겠지! 그리고 녀석도, 그 정도까지 바보는 아닐 테니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고 싶지 않았다.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 같아서 가라아게 하나를 집어 노바라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픽 웃더니 입을 아 벌려 가라아게를 냉큼 받아먹었다. 우물우물. 평상시 그녀로 돌아와 줘서 기뻤다.

 "다음부터 옷 갈아입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면, 꼭! 누군지 먼저 물어봐. 알았어?"

 "네, 달링. 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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