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무였는지 훈련이었는지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지만 오늘 교실에는 이타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수업 자료를 전달하러 왔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머잖아 안쪽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발소리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나는 문이 열리기 전에 말했다.

 "내가 누군지 맞춰 봐."

 그러자 어리둥절해하는 듯하더니,

 " 아냐?"

 그가 되물었다.

 나는 칫 하다가도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왜 왔는지 맞춰 봐."

 싱겁게 터져나오는 웃음소리.

 "문제 내러?"

 "땡! 틀렸어!"

 "왜? 문제 냈잖아. 그것도 맞지."

 문제에 빈틈이 있었음을 인정하며 또 한 번 칫 하고 말았다.

 "이제 열어 버릴 거야. 문에 안 부딪히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뒤로 가야지."

 "그치. 맞았어."

 그래도 이타도리는 일부러 조금 천천히 문을 열렸다. 드물게도 그의 얼굴이 지쳐 보였다. 웬만해서는 지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잠이 부족한 걸까. 짙은 눈동자가 생기를 잃었다. 그래도 헤실헤실. 그가 귀엽게 눈웃음을 지었다.

 "안녕."

 "안녕. 선물 가져왔어. 레몬. 그리고 이건 오늘 수업 자료."

 "고마워. 근데 레몬은 어떻게 하지. 레몬 소다라도 만들까."

 "나도 마시고 싶다!"

 "으응. 그럼 들어와."

 날씨가 좋다. 빛은 더욱 밝다. 수업이 끝나고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산책을 했다. 발치에 흙이 떨어졌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나슬나슬한 풀밭과 레몬처럼 싱그럽고 향긋한 나뭇잎. 그런 계절이다. 한 걸음 딛자마자 눈이 부셨다.

 나왔다. 내 뺨에 입이. 스즈카는 내 또래의 아이들과 농담을 주고받을 나이가 아니라고 늘 입으로만 거드름을 핀다. 어른이면서. 사실은 좀 못된 버릇을 하나 가졌다. 실쭉샐쭉. 이렇게 입술을 오물거리다 하는 말은 거반 이렇다.

 "유지, 이 노옴. 계집애를 그리 쉽게 들여보내 주면 안 되지. 솔직히 말해 봐. 가 몇 번째야."

 "안녕하세요, 스즈카 쌤. 제 방에 첫 번째로 들어온 여자애는 였어요. 두 번째도, 세 번째도요."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아무도 말리지 않으면 한 술 더 떠서 씰룩쌜룩한다. 갈수록 열이 올라서는,

 "아, 그래. 혹시 거기에 규칙 같은 거라도 있냐. 백 번째가 되면 계집애랑 둘이서 은밀한 축하 파티라든지."

 하니까, 얼굴이 그만 뜨거워진다. 나는 대개 알아듣지도 못하고 어리둥절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부끄러웠다.

 "꺄! 스즈카! 그런 농담 하지 마요!"

 "낄낄낄. 왜, 유지는 좋아하잖아. 봐라."

 "아, 아니! 저는 그냥! 뭐⋯⋯ 웃기잖아요."

 그나마 얼렁얼렁 받아치는 남자애들도 어르신의 상대가 되기에는 멀었으므로 휭 돌아서 수선을 떨거나 한다. 천년 묵은 재간을 어찌 당해낼까. 여기서 그녀와 대등하게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고죠 쌤뿐일 것이다.

 수업 자료는 책상에 던져 놓고 레몬을 싱크대로 가져간다. 레몬 소다는 즙을 짜서 소다와 섞으면 그만이다. 어젯밤에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모두 깨끗이 씻어 두었다. 레몬 하나를 푹 찍어 아담히 가르고는 눈 코 입을 다 찡그린다.

 "풉, 표정 좀 봐."

 "헤헤헤. 냄새 좋다."

 이타도리와 산책할 때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이타도리는 고전에 오기 전 그의 할아버지와 센다이에서 살았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냈는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보면 의외로 가정적인 면이 있는 듯하다. 소질 보다는 요령이 있는 살림꾼이랄까. 자취가 처음인 것치고는 크게 어색한 부분이 없고 그런대로 능숙한 모습이다.

 딱! 치르르. 캔을 따서 소다를 유리잔으로 옮길 때 투명한 물방울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금방 냉장고에서 꺼냈기 때문에 아주 차가웠다. 조금 흘러넘친 것은 행주로 닦았다. 그런 다음에는 이타도리의 어깨 너머로 잠깐 구경을 했다. 즙을 내고 있었다. 눈으로만 봐도 입에 침이 고이는 신맛. 아늑하게 휘어들어 부는 바람에 물씬 스며들었다.

 레몬 소다 두 잔이 뚝딱 만들어졌다. 노란 파스텔이 선연하다. 얼음도 몇 개 띄운다. 딸그락딸그락 유리잔에 부딪힌다. 한 모금 마시고 찡긋. 꿀꺽꿀꺽 삼키면 찌뿌드드하고 짜릿짜릿하다. 청량한 단맛이 그 뒤를 바짝 따른다.

 "스즈카도 마셔요. 잠깐 들어가 있을 테니까요."

 "아니, 네가 마셔라. 나는 마셔 봤자 소용없으니."

 그렇게 대답하고 스즈카는 다시 쏙 들어가 버렸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애초에 레몬을 사자고 말한 사람은 스즈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시지 않았다. 레몬을 고를 때처럼 그저 바라보고 냄새를 맡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때 유리창에 반사되어 쏟아지는 빛에 잠시 아찔했다. 멍하니 바라보니 그 빛 가운데 어렴풋이 그녀가 눈에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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