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기까지. 고생했어."
마지막 수업이 방금 끝났다. 아이들은 모두 책상 위를 정리한다. 선생님은 교실에서 나가기 전에 한동안 그런 모습을 바라본다. 때로는 그 틈에 가볍게 고민을 털어놓거나 그날 공부했던 내용 등 이것저것 묻고 답하기도 한다. "참, 얘들아. 숙제는⋯⋯." "네? 없는 거 아니었어요?" "아, 쌔앰. 하루만이라도! 진짜!" "정리할 시간도 조금은 주셔야죠." 요즈음 숙제가 많다. 놀고 싶다. 학업에 지친 제자들의 간절한 소망이 촉촉한 눈망울을 더욱 반짝이게 한다. 설령 그것이 담임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지라도, 교과서와 문제집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음을 안다 해도, 그리 된다. "그래, 오늘은 숙제 안 낼게. 대신 무책임한 선생님이라고 소문내기 없기야." "아자! 무책임한 선생님 완전 좋아! 사랑해요! 내일 수업은 열심히 들을게요!" 노바라가 신이 나서 뛰어나갔다. 후시구로의 가붓한 걸음까지 보고는 고죠 쌤이 못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숙제를 하면서 어려웠던 부분이 있어 교실에 남았다. 설명을 듣고 있을 때, 느긋하게 정리를 마친 이타도리가 다가왔다. "오늘은 같이 나가서 먹자." 하얀 종이와 검은 글자의 덫에서 겨우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 내가 문제집과 씨름하는 사이 이타도리는 나를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배경의 날씨처럼 온화하고 나긋한 빛을 띤다. 그리고 평소처럼 살갑게 말을 걸어 온 것이다. 기숙사에서 해결하기 곤란하거나 게으름 피우고 싶은 날에는 점심 또는 저녁을 학교 밖에서 먹고 들어오기도 한다. 각자 일정이 달라 둘만 다녀오는 것도 딱히 예삿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조금 놀란 듯이 뛰었다. "이타도리 군⋯⋯ 괜찮아?" "응? 아⋯⋯ 나야 뭐. 너는?" "평소랑 똑같았어. 근데⋯⋯." "흠흠."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헛기침 소리에 이타도리와 나는 고죠 쌤을 돌아보았다. 물론 그를 잊었을 리가 없다. 방금 전까지 나처럼 문제집을 보면서 문제 푸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으니까. 그가 어깨너머로 이타도리에게 말했다. "유지, 지금 쌤이랑 공부 중이야." "기다리려고 했는데, 길어질 것 같아서⋯⋯." 이타도리는 멋쩍게 뒷덜미를 긁적였다. 내가 쌤을 다시 돌아보았을 때 짓궂은 미소가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허리를 숙이고 있었으니 이타도리에게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쌤은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책상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럼 쌤이 기다리지 뭐. 자, 먼저 하렴." 나는 눈썹에 힘을 주고 고죠 쌤을 올려다보았다. 얄미운 어른들은 이따금 그렇게 애들 앞에서 능청을 떨기도 한다. 거기까지라면 괜찮지만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하는 듯한 오만한 태도는 그다지 어른스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안, 이타도리 군. 오늘은 못 갈 거 같아." 다행이랄지 이타도리에게 실망하거나 당황하는 기색 따위는 없었다. 걱정이라면 모를까. 그것을 내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까지 눈동자에 어렴풋이 보이는 듯했다. 그럴수록 나는 저도 모르게 그 기분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이타도리도 나를 바라본다. 오늘따라 눈을 돌리지도 않는다. 아까부터 계속 시선을 받아서 쑥스러웠다. 고죠 쌤은 행여 놓칠까 그런 이타도리를 대놓고 관찰 중이다. 어쩌다 보니 만만찮은 두 남자에게 둘러싸인 모양새가 됐다. 그런데 문득 이타도리가 쌤을 흘겨보았다. 고개를 비스듬히 놓고. "혹시⋯⋯ 으음, 아무것도 아냐. 내일 보자." 돌아서는 제자에게 고죠 쌤은 점점 더 넌덕스럽게 이지렁을 떤다. "혹시? 뭐야? 선생님 더 기다려 줄 수 있어." 이 말에, 이타도리는 걸음을 멈추어 섰다. 그가 돌아보며 대꾸했다. "괜찮아요. 스즈카 쌤한테 선약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어쩌면 상대가 이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미안하잖아요. 아니면 한 번 물어볼까요? 스즈카 쌤, 솔직히 나가기 싫거나 하시면 몰래 신호를 보내 주세요! 도와드릴게요!" 이타도리가 책상을 붙들고 내 뺨에 복대겼다. 그럼에도 사람 좋은 말투는 누구더러 들으란 듯이 청산유수다. 그러자 고죠 쌤이 양손을 꼭 쥐었다. 쌤도 약이 오르나 보다. 뻔질뻔질한 입매가 불긋하게 앵돌아져서 앙분을 토해낸다. "도와줘? 어떻게? 맞아, 쌤이랑 같이 먹기로 했어! 아무래도 스즈카는 너희와 다르니까, 좀 가엾어서 말이야! 그래⋯⋯ 중요한 일도 아니고, 다음으로 미룬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지. 대답해 봐, 스즈카 고젠. 어떡할래." 아무래도 편할 대로 하라는 뜻은 아닌 것 같다. 내 생각은 그렇다. 스즈카도 알겠지. 자신의 생각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쯤은. 쌤이 듣고 싶은 말은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죄다 헛소리다. 그러나 뺨에 붙은 입술은 알면서도 헛소리다. "상관없어." 쌤은 제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상관없다 했다." "너⋯⋯ 이 배신자!" 쿵, 그가 분한 듯 발을 굴렀다. 스즈카는 더 담담하게 받아쳤다. "방금 네 입으로 말했잖아.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잘못 들었냐. 애초에 밥 먹는 거 가지고 언제까지 꾸물거릴 셈이야. 큰 놈이나 작은 놈이나 사내 자식들이 입만 살아서는. 이제 아무래도 좋으니까 빨리 결정해. 셋이 가든가." 우습게도 고죠 쌤과 이타도리는 금세 얌전해졌다. 거기서는 스즈카의 무덤덤함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나도 이럴 때는 그녀가 주변 인물을 나름 능숙하게 통제한다 느낀다. 두 남자는 속도 없이 웃으며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찾은 가게의 낡은 목조 기둥과 입구에 너울거리는 천은 도심에서 홀로 시간을 건너띈 것처럼 보였다. 내부는 아담한 토분에 담긴 화초 그리고 이색적인 장식품으로 꾸몄다. 우리는 주방과 마주한 테이블에 일렬로 앉았다. "와, 맛있을 거 같아! 이거, 이것도." "되게 뭐랄까, 기본에 충실한 느낌이네." "아무거나 고르렴. 여기는 정말 다 맛있어." "고죠 쌤, 예전에 이 가게 자주 다녔나 봐요?" "응. 친구들이랑. 그때는 하루에 여러 건 해결해야 하는 날도 많았으니까, 언제나 출장지에서 돌아오면 지쳐 있었거든. 몸도 마음도 말이야. 그런 날 이 가게에 왔단다. 여기서 배를 가득히 채우고 잊어버렸어. 스즈카랑도 자주 왔었지. 싸운 채로 헤어지고도 약속한 것처럼 마주쳐서 이거나 쳐먹어라 너나 쳐먹어라 하다가 화해하는 거야." 이타도리가 피식 웃더니 물었다. "쌤들이 추천하는 메뉴는 뭐예요?" 쌤과 내 뺨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햄튀김." "명란구이." 대답이,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취향으로는 확실하게 갈리네요." 그래, 그래. 이타도리의 말대로다. "하하하. 스즈카는 안주밖에 몰라." 어쩐지 상상이 간다. 사진에서 보았던 어린 고죠 쌤 옆에 지금과는 여러모로 다른 스즈카가 앉아 있는 모습. 과거, 여기서, 고죠 쌤은 화풀이하듯 밥을 먹고 스즈카는 명란구이를 안주삼아 술을 푸었던 것이다. 지금처럼 투닥거리며. "그럼 저는 햄튀김이랑 우롱차로 할게요." 이타도리의 뒤를 이어 나도 메뉴를 정했다. "저는 명란구이 정식 먹을래요. 차밥이랑요." 고죠 쌤은 조금 더 고민하다가 점원을 불렀다. "주문할게요." "네." "아이들은 햄튀김, 명란구이 정식. 우롱차랑 차밥 주시고요." "네, 네." "저는 차슈 덮밥, 냉두부, 연어 구이, 새우 그라탕, 구운 가지 절임. 그리고 감자 샐러드랑 우롱차 주세요."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차부터 가져다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고죠 쌤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나도 모르게. 산을 깎아 놓은 듯한 신장뿐 아니라 뼈와 근육이 어마무시하게 떡 벌어졌다. 뭐랄까, 늑대인간처럼. 그러니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많이 먹는다 해도 이상하달 건 없지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타도리가 깔깔 웃으며 쌤에게 물었다. "고죠 쌤, 그거 다 먹을 수 있는 거예요?" "유지는 못 먹어? 뭐⋯⋯ 쌤도 맨날 이런 건 아냐. 제대로 조절하고 있어. 체중이라든지, 건강 관리 차원에서. 그래도 오랜만에 나왔으니까. 모처럼인데, 이쯤에서 한 번쯤 잔뜩 차려 놓고, 있잖아. 마음껏 먹고 싶다 해야 하나." 스즈카가 튀어나오더니 나직이 일갈했다. "이 놈이. 왜 내가 좋아하는 것만 고르냐." "왜 네가 좋아하는 걸 먹지 못하게 됐더라." 고죠 쌤이 돌아보지도 않고 무심하게 대꾸했다. 스즈카는 분한 듯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볼 땡겨요. 나로서는 도리가 없다. 스즈카가 점점 무뎌지는 것도 이해는 되는데, 쌤은 쌤대로 불만이 있고. 참견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돌이켜 보면 고죠 쌤도 처음부터 딱히 심술부릴 생각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녀를 생각해서 일부러 그런 주문을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물론 나도 적절한 타이밍에 물러나 스즈카가 두 사람과 함께할 수 있도록 했다. "잘 먹었습니다. 고죠 쌤." "배부르다아. 감사합니다." "쌤도 고마워. 음, 지금 몇 시지." "또 임무예요? 이제 밤인데⋯⋯." "그렇네. 놀 수 있을 때 실컷 놀아." 이렇게 제자들을 겁주기도 하면서, 고죠 쌤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익숙해져 버린 탓일까. 어깨를 툭 털고 나서는 덤덤하게 웃는다. 어쩌면 오늘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그에게 놓치기 아쉬운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체념한 것처럼 보이고 미련이 없어 보이기까지 해서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다음은 꼭. 제가 약속할게요. "쌤 먼저 갈게. 늦지 않게 돌아가렴." "내일 봬요." "다치지 마요." "그래." 고죠 쌤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돌아서기 전 잠깐의 정적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 일 때문에 스즈카가 나와 교대하는 수고를 감내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것으로 만족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스즈카는 이번에도 내 뺨을 택했다. 무엇 때문에 망설이는 걸까. 고죠 쌤이 남겨 둔 정적만큼 그녀도 머뭇거렸다. "고죠." "응?" "그, 뭐냐. 힘내라. 다음엔 내가 한 턱 낼게." "하하하. 너는⋯⋯ 나중에 딴소리 하지나 마." 고죠 쌤은 돌아보는 체 만 체하며 대답하고는 그대로 가 버렸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알 수 있었다. 그가 비로소 만족에 가까운 얼굴빛으로 웃고 있는 것을. 그것은 마치 두 사람의 관계를 축약해 놓은 표정과도 같다. 쌤과 헤어지고 두 사람만 덩그러니 남았다. 스즈카도 방관할 뿐. 여기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는 오롯이 내게 달렸다. "저기⋯⋯ 음⋯⋯ 뭐 마시고 돌아갈까?"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안 들어가. 헤헤헤." "으응, 나도. 그럼⋯⋯ 조금 천천히 걷자." "이타도리 군,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 이타도리는 입술을 떼었다가 잠시 감추어 두고 말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었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교차하는 하늘, 네온사인 아래로 걸어가는 사람들. 그런데 왠지 두 사람만 동떨어진 느낌이다. 최근 그런 기분을 종종 받는다. 여러 가지 면에서 앞으로 전과 다른 날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까. "저기⋯⋯ 그날⋯⋯ 나⋯⋯ 너한테⋯⋯ 기억해?" "으, 응. 너한테 업혔던 거랑⋯⋯ 기억합니다아." "내 얘기⋯⋯ 별로 듣고 싶지 않다 해도 이해해." "이타도리 군이 괜찮다면 나도 괜찮다고 생각해!" "솔직하게 말해 줘. 나는⋯⋯ 모르겠어. 전에는 네 얼굴 보면 네가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었거든. 예를 들어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근데 그날 이후로는, 뭐라고 해야 하나, 달라. 너한테 말을 걸 때, 뭔가를 같이 하고 싶을 때.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그러니까 혹시라도, 그런 마음이 드는 게 나 때문이라면, 미안해." "⋯⋯." "어쨌든 일단 사과하고 싶었어. 그리고 네가 왜 그랬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해 봤는데. 정말 미안.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봐도, 이것도 저것도 전부 아닌 거 같아. 나는 그런 게 아니었어. 내 말은, 내 기분은⋯⋯ 화내도 되고, 때려도 돼. 나도 그냥 솔직하게 말할게. 나는 그날,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 거야." 첫키스는 특별한 사람과 하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당연하게도 상대가 친구이길 바랐던 적은 없다. 더군다나 술 맛이 나는 첫키스라니. 술을 마신 사람은 나였지만. 그저 한때의 재미있는 사건으로 끝나 버린다 생각하면 분한 마음도 있다. 그래도 어쩌랴. 이제 와서 돌려달라 말할 수도 없고.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간다. "나도 괜찮아⋯⋯ 정말이야⋯⋯." "어⋯⋯ 지금은 확실하게 알겠네." 그 말을 들으니 조금 분했다.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휙 하고 이타도리를 돌아봤다. 나를 걱정하고 있다든지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는 건 보지 안아도 안다. 어쩐지 안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요즘들어 자주 그러는 거 같아. 너한테 전부 말할 수는 없지만, 한다 해도 제대로 못하겠지만, 실은 그날만이 아냐. 내가 신중함이랑은 거리가 멀잖아. 이제 충동적이라고 해도 돼. 어차피, 차라리, 이참에, 기왕이면⋯⋯ 더 단순해졌어." "이상해⋯⋯." "역시 그렇구나." "아니, 이타도리 군이 말하고 있는 건 이해해. 나도 그랬던 적 있어. 나는 단지 너한테는 그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래서 이상하다고 한 거야. 있잖아, 이타도리 군. 우울한 얘기일지도 모르는데 들어 줄래? 한 번만!" 갑자기 수선을 떨었던 까닭인지 이타도리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병원에 있을 적의 일인데. 당연히 그때는 내 마음대로 퇴원할 수도, 외출할 수도 없었어. 근데 딱 하루, 어렵사리 허락을 받아 나갈 수 있게 됐어. 똑같아. 어차피, 차라리⋯⋯ 그냥 그렇게 생각나는 대로 했어. 그동안 모아 두었던 용돈을 다 써 버렸을 정도야. 왜냐면 다음은 언제가 될지 모르고 어쩌면 다음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맞아." 나는 말주변이 없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나를 이해해 준다면 그만큼 나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 나는 내처 어떤 의문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자신감이 생겼다. "이타도리 군⋯⋯ 언제나 고맙다는 말이 하고 싶었어. 다른 어떤 말보다 그게 먼저야. 지금도 네가, 너만 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아무리 바보라도 얼굴에 드러나는 것만 보고 내 기분을 알아 주는 사람은 없어. 헤헤헤." "⋯⋯." "나, 궁금했어. 네가 왜 그렇게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지. 방금 한 얘기 덕분에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아. 어쩌면 나한테 옮아 버린 건지도 몰라. 왜 있잖아, 원한다기 보다는 간절한 거. 무섭고, 불안하고, 하기 싫지만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 그치. 기왕이면 둘이서 같이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게 더 재밌을 거야." 이타도리가 실소를 터뜨렸다. 마치 나를 다그치듯이 "화내도 된다니까." 하고 안타까워하는 얼굴을 보며, 나는 빙그레 웃었다. "화내면 이타도리 군이 슬퍼할 거잖아. 다른 남자애라면 몰라도 너는 그런 표정 안 지었으면 좋겠어. 게다가, 나는 괜찮아. 괜찮아졌어. 다행이네애. 내가 너만큼 단순한 여자애라서. 다른 여자애들한테는 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알아⋯⋯ 안 해." "그럼 됐어. 잘됐다." 뭐가 잘된 거야. 그렇게 묻는다면 아마도 나는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쑥스러워서. 이타도리도 말꼬리를 잡으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왜 그런 약속을 하겠냐라든지. 민망하긴 마찬가지인가. 결국에는 웃어 넘긴다. 나는 문득 눈에 띄는 한 골목을 가리켰다. "이타도리 군, 저쪽 길로 가 본 적 있어?"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 보자!" 여러 가지로 전과는 다른. 그럼에도 어제와 같은. 이제는 그 말을 기분좋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싫었던 적도 없다. 때로는 불친절하고 뻔뻔하기까지 한 현실에 그런대로 만족하면서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 나란히 걸으면 가슴속에서 왈랑거린다. 천진난만하고 기분 좋은 소리가 울린다. "게임 센터 같은 거 있음 좋겠다." "으음, 게임 센터는 없을 거 같아." "없어도 괜찮아." "그렇네. 헤헤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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