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힘을 다해 도망쳤다. 병마와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몇 날 며칠 고통에 울부짖으며 가까스로 살아나길 반복했다. 의식이 돌아온 뒤에도 눈을 부릅뜨고 밤새 잠들지 않았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멀어지는 삶을 붙잡으려 했다.
소독약 냄새가 섞이지 않은 맑은 공기가 그립다. 하얀 천장 아닌 하늘을 보고 싶다.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두 다리만으로 자유롭게 활보하며 자연을 만끽하고 싶다. 그럴 수 있다면 나는 누구에게든 어떤 대가든 치를 것이다. 죽음이 어떤 얼굴을 가졌는지. 어떤 냄새를 풍기는지. 고작 열 다섯이라는 나이에 알게 됐다. 기대와 실망이 마음 속에 뒤엉켰다.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절망이 그들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옴짝달싹 못하도록.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내가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지. 더는 생각을 이어나갈 기력조차 없다. 공연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 멈춰진 시간 틈으로 균열이 생겼다. 호젓한 병실의 커튼에 넘실거리는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그림자는 빠르게 지나갔다. 등골이 싸늘했다. 굳어 버린 몸이 고장난 기계처럼 삐걱거리기만 했다. 물결치는 백색 섬유에 너울대는 그림자가 침대와 침대를 오갔다. 더는 저항할 힘조차 없는 반송장 같은 몸을 깡마른 손가락으로 더듬고 또 더듬으며 다급하게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 어딘가에서 무거운 한숨이 떨어졌다. "누구세요?" 사람의 형체다. 그밖에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그것은 나를 돌아보았다. 내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불규칙한 발소리가 들렸다. 그림자가 갈수록 선명했다. 닫혀진 커튼 사이 하얀 손가락이 기어나와 커튼을 열어젖혔다. 전등 아래 적나라히 드러난 여자의 실루엣. 그녀는 바로 서는 것조차 힘에 겨워 보였다. 걸음걸음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이 휘청이며 뚜벅뚜벅 걸어왔다. 죽음이 드리운 얼굴을 보니 숨이 턱 막혔다.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았다. "당신, 사람이 아니지?" 사람이 아니다. 짐승이다. 더는 살아 있지 않은. 짐승의 사체다. 사람처럼 이치를 따지거나 실리를 계산하는 눈이 아니다. 맹목적으로 탐하는 눈. 무언가를 맹렬히 쫓던 순간 그대로 굳어 버린 눈. 그러나 짐승은 죽어도 짐승이다. 오롯이 살아남기 위해서만 취하리라는 결연한 의지가 보인다. 거기서 나는 인간이 아님을 알아챈 것이다. "꿈에서 본 괴물은 잊어라. 내가 그 괴물보다 더 끔찍한 걸 보여 줄 테니. 너와 나는 지금부터 한 몸이 된다." 간신히 나약함을 토해냈다. 막상 용기내어 마주하니 내 모습을 보는 것과 같이 낯설지 않았다. 그녀와 나의 호흡이 하나 되어 가라앉았다. 두려움을 버림과 동시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와의 첫 눈맞춤에 완전히 매료된 것이다. "나갈 수 있어?" "그리 될 것이다." "살아서?" "그것이 계약이다." 그녀와의 만남이 하늘의 응답이라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축복이다. 하지만 계약이 무슨 말인가. 적어도 나는 천사가 인간들과 거래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짐승이다. 죽어 가는 동물의 마른 살 가죽 냄새를 맡고 찾아온 순수악. 서로에게 바라는 것은 자명했다. 지독한 목마름을 딛고 방황하다, 갈망하다, 마침내 만난 것이다.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 그녀가 내게 온 것이 축복이건 저주이건 나는 그녀를 받아들였다. 두려움이 사라진 자리에는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마음이 눈물로 잠길 만큼 애틋했고 못 견디도록 사랑스러웠다. 하늘이 허락한다면 나는 숨이 다할 때까지 그녀와 함께할 것이다. 그녀가 행복하다면 하나뿐인 심장이라도 기꺼이 내어 줄 것이다. 스즈카는 천년 설화의 주인공.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평범한 가정에 태어나 부모에게 사랑받고, 교육받고, 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별 탈 없이 무난한 성적을 받으며 성장했다. 줄곧 그랬다. 내가 걸어 온 길은 빛나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자신에게 있어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살아 온 것이다. 그저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어렸을 때 지인과 함께 체육관에 가서 어느 리듬체조 선수의 퍼포먼스를 보았다. 그날로부터 체조를 시작해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성적을 받았다. 그런데 한 번은 공연을 미처 끝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호흡이 점점 가빠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전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를 지켜보던 이들 모두 술렁였다. 내 생애 최후이자 최악의 공연이었다. 시야에 비치는 모든 것이 거짓 같았다. 부정해도 소용없다. 도망쳐도 따라온다. 스스로 저항을 멈추었을 때 스즈카가 나타났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붙잡아야 한다는 것. 객기를 부리더라도 절대로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날 자신이 스즈카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뚜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벼랑 끝에 매달려 있었으니 살라달라 울고불고 애원했을 것이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나는 맹목적인 그녀를 맹목적으로 믿었다. 그녀가 내 몸을 차지했을지언정 순순히 따랐을 것이다. 격렬한 고통이 덮쳤다. 처음에는 불구덩이에 몸을 던진 듯했다. 그리고 머잖아 모든 감각이 둔해졌다. 마지막 기억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었다. 아마도 그녀와 내가 동시에 내지른 비탄일 것이다. "스즈카 씨, 고전은 어떤 곳이에요?" "가 보면 알아. 속옷이나 많이 챙겨." "속옷? 저 그럴 나이 한참 지났어요!" "그냥 하라는대로 해." 스즈카는 내 고통을 금방 없애 준다. 덕분에 심장의 병마도 두렵지 않다.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그런데 태어나 처음으로 주령의 실체를 봤을 때는 그녀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열 다섯 살 고등학생에게 왜 굳이 속옷을 많이 챙기라 했는지. 그녀와 내 첫 활약이라는 점에서 소중한 추억이자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이다. "학교다! 드디어 도착했어요 스즈카 씨. 가슴이 두근거려요." "나는 속이 울렁거려. 너도 웃을 수 있을 때 실컷 웃어 두어라." "헤헤헤." "학장실로 가자. 마사미치에게 여러 가지 부탁해야 하니." "키다리 아저씨가 도착하면 제일 먼저 알려 달라고 했어요." "키다리 아저씨가 누구냐. 언제 그런 수상한 놈과 어울린 거야." "있어요, 키 엄청 크고 잘생기고 모델처럼 생긴 사람. 제 은인이에요. 그러니까 키다리 아저씨. 도쿄에서 적응할 수 있게 계속 편의를 봐주셨잖아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제 병원비를 전부 정산해 주셨더라고요. 고죠 씨 말이에요." "얘기만 들어 보면 그럴싸하다만. 유감이구나. 고죠는 너의 키다리 아저씨가 아니야. 단순하게 생각해라. 놈에게는 너를 병원에서 빼낼 능력이 있었고 그래서 돈을 냈을 뿐이다. 팔려 온 셈이지. 바보처럼 기뻐할 일이 아니야." "저, 저는 고죠 씨한테 팔려 가도 괜찮아요." "이미 늦었나. 예나 지금이나 계집애 후리는 데는 선수군. 미안하지만 내가 안 괜찮아. 고전에서도 웬만하면 마주치고 싶지 않으니까. 어쨌거나 지금은 짐을 내려놓는 것이 먼저다. 마사미치에게 가서 방부터 내놓으라고 협박하자." "협박이요?" "그때는 얌전히 들어가 있어." "네, 우리 뛰어서 가요. 와아아!" "윽. 천천히 가라. 멀미난다니까!" 학교에 나가고 싶었다. 아니. 잠시라도 병원을 떠날 수 있다면 어디라도 좋았다. 소원대로 퇴원했지만 병마가 생기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스즈카가 내 몸을 버리면 아마도 끝이겠지. 그래도 좋다. 한 순간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두리번거리며 교정을 구경하다 창가에 서 있는 남자애를 보았다. 눈이 마주쳐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저 애는 누구죠? 우리를 보고 있어요." 스즈카의 눈과 입이 오른쪽 왼쪽 뺨에서 번갈아 튀어나왔다. 옆으로 살짝 돌아서자 남자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타도리 유지다." "아는 아이인가요?" "몰라. 그러니 녀석일 수밖에 없지." "뭔가 굉장한 걸 삼켜서 결과적으로 저와 같은 몸이 된 아이였죠." "그렇다.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고 도움이 될 테니 잘 지내 보거라." 이타도리 유지. 그의 이름을 한 글자 한 글자 읊었다. 동그랗던 눈이 더 커졌다. 창가의 아이, 이타도리 유지가 내게 손을 들어 보였다. 마찬가지로 답해 주었다. 그가 뒷통수를 긁적이며 웃더니 얼른 가 보라는 듯 맞은편을 가리켰다. "고마워!" 그렇게 이타도리와 인사를 나누고 야가 씨를 만나러 갔다. 현재 주술고전 도쿄부의 학장님이다. 기숙사를 배정받고 첫발을 디딜 때까지 스즈카가 나서 주었다. 저녁에는 고죠 쌤이 스즈카를 만나러 오셔서 그녀와 다시 교대했다. 고죠 쌤과 스즈카의 대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차를 내어 갈 틈도 없이 돌아가 버리셨다. 비록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내가 모르는 과거부터 계속 지속되어 왔을 것이다. 절대로 단순한 것이 아니다. "꼬맹아. 그만 자라." "이거 다 쓰면 잘게요." "뭘 그리 끄적이는 거냐." "일기예요. 보면 안 돼요!" "보이는 걸 어쩌라고. 보아하니 반 정도는 고죠에 대한 이야기군. 둘이 별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잖아." "헤헤헤. 예전에 그런 남자친구를 상상했던 거 같아요. 하지만 왠지 남편 모습으로는 그려지지 않네요." "무슨 말인지 안다. 알다마다. 내게 불만이 생기거든 말해라. 일기 따위에 몰래 적으면서 꿍해지지 말고." "불만이라니 당치도 않아요. 스즈카 씨나 고죠 쌤과 만나지 못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일들인걸요. 이렇게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 굉장히 행복해요. 필요하다면 제 영혼까지 내어드릴게요. 두 사람을 위해서라면 조금도 아깝지 않아요." "나도 그렇게 제멋대로는 아니야. 중요한 일⋯⋯ 지금은 딱히 떠오르는 게 없지만 너와 상의한 뒤 결정한다." "고마워요. 두 분은 제게 축복 같은 존재예요." "여짓껏 들어 본 것 중 제일 황당한 두 글자구나." "아닌가요?" "⋯⋯." 그녀는 침묵했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딱히 까닭을 모르는 것도 아니기에 말없이 웃어넘겼다. 언젠가 맞이할 그날이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더는 그런 이유로 뒷걸음질치거나 소중한 매 순간을 흘려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일기를 덮고 이부자리에 들었다. 침대는 기숙사 것이라 낡았지만 시트를 새로 깔아 상쾌했다. 이불도 고전에 오기 전 스즈카와 쇼핑하러 나가 같이 골랐다. 만져 보자마자 이거다 하고 마음이 맞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스즈카 씨. 자요?" "네가 깨어 있으니까. 당연히 나도 자는 것은 무리다." "앗! 그, 그렇네요. 바보 같은 질문을 해서 죄송해요." "별로 싫지 않아. 잠이 오지 않는다면 뭐든 떠들어라." "이타도리 유지라는 남자애 어쩐지 좀 귀였던 거 같아요." "그럭저럭 봐 줄 만하더구나. 얼굴은 고죠보다 못하지만." "헤헤헤. 실은 저 잘생긴 남자보다 귀여운 남자가 좋아요." "훗⋯⋯ 어리군. 다 필요없어. 남자에게 필요한 건 색기다." "꺄." "너도 늙으면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게다." "저랑 교대했을 때는 거기서 뭘 하시나요?" "멍때린다." "그럼 앞으로 매일 좀 더 많이 얘기해 주세요." "심심한 것 보다야 그게 낫다만. 참견하는 것이 좋으냐." "네. 저는 스즈카 씨랑 이렇게 얘기하는 게 정말 좋아요." "너에게는 저쪽이 오히려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겠군." "저쪽⋯⋯ 아아, 이타도리 군이랑 료멘스쿠나였던가요." "말 나온 김에 충고 하나만 하겠다. 이타도리에게 너의 어떤 생각도 강요하지 말거라. 너나 나와는 애초에 입장이 달라. 그 점을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이타도리에게는 타협의 여지가 없어. 그저 빼앗길 뿐이지. 더욱이 스쿠나라니." "간단히 말해서 스즈카와 저처럼은 도저히 될 수 없는 관계라는 거네요. 이타도리 군이 불쌍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타도리 군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과도 잘 지낼게요. 그런데 그 료멘스쿠나라는 주령이 그렇게나 무서운가요?" "허허허. 그야 엄청나게 무섭지. 뭐⋯⋯ 의외의 면도 있어. 그래 봬도 자기한테 깍듯하게 구는 놈들한테는 너그럽거든. 예의바른 걸 좋아해. 성실한 거 좋아하고. 건들대는 놈도 언제나 꺼리지는 않아. 제대로 웃기기만 하면." "스즈카가 이렇게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는 거 처음 들어요. 어쩐지 고죠 쌤 얘기 할 때랑은 많이 다르네요." "이상한 부분에 집중하는구나. 잘 기억해 두어라. 이런 얘기, 이 몸 외에는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을 테니까." "네! 그리고요? 스쿠나 씨는 취미가 뭐예요?" "취미라는 것이 언제나 같을 수는 없다만. 그래 봬도 옛날에는 시를 잘 썼다. 그리고 신궁이지. 백발백중이야." 어쩌면 그녀에게는 내가 순진한 아이로 보이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령의 강생이 이타도리에게 제 몸을 빼앗기는 불쾌한 일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였다. 그렇다 해도 스즈카를 만난 내가 운이 좋았다는 것은 더욱 분명한 사실 아닌가. 나는 그녀가 좋다. 내가 향하는 곳 어디든 함께하는 그녀. 매일 같은 것을 보고 듣고 잠들다 보니 나 아닌 다른 존재와의 일상에 금세 익숙해졌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그녀와 이야기하는 것이 즐거웠다. 눈이 말똥하다가도 서서히 잠이 밀려 온다. 요람에 누운 것처럼 편안하고 내일이 기대된다. "저는 행복해요." "못 살겠군⋯⋯." "병원에서는 무서워서 한숨도 못 잤어요. 같이 있으면 안심이에요. 아무도 저를 데려갈 수 없게 지켜 주실 거잖아요. 그쵸?" "충분히 떠들었다. 자라." "네애." 스즈카는 이타도리의 훈련을 위해 고죠 쌤에게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고전으로 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듣자하니 나도 이타도리와 같은 훈련을 받으면 나중에 스즈카의 주력을 빌려서 주술사로 활동할 수 있다는 것 같다. 당연하게도 내게는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고 섣불리 결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단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할 수 있을까. 별로 자신이 없다. 솔직히 아직은 주령이 무섭다. 스즈카는 언제나 상냥하고 정말 좋지만. 스즈카에게 몸을 맡긴 채 생활하는 동안 나는 어떻게 그녀가 몇 백 년이라는 시간을 그저 멍때리며 보낼 수 있었는지 알게 됐다. 처음에는 깨어 있을 때와 똑같을 거라 단순하게 생각했기에 당연히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내 쪽이 주체가 되었을 때 무언가에 집중하려고 하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방해를 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그런 게 없어서 훨씬 수월하다. 머리를 비우려 애쓰지 않아도 텅 빈 상태가 될 수 있다. 정신차리면 시간이 부쩍 흘러 있다든지. 그게 보통의 일이다. 가끔은 스즈카가 뭘 보고 어떤 소리를 듣고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이타도리의 훈련이 끝날 때까지 나는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방금 라고 이름을 불렸다. 꼬맹이 외의 호칭으로 불린 것은 처음이다. 뜨거운 희열이 몸에 번졌다. 가볍게 날아오르듯 무아의 상태로부터 깨어났다. 그밖에도 놀라운 점은 이타도리가 순식간에 이루어진 그녀와 나의 교대를 바로 알아챘다는 것이다. 상대에 따라 겸손해 보이기 위해 어리숙한 면을 감추지 않을 때와는 다르게 그의 낯꽃이 꾀 많은 장난꾸러기처럼 변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돌아왔네? 어서 와." "다녀왔습니다! 실은 계속 있었지만!" "나 훈련하는 동안 뭐 하고 있었어?" "나는 계속 여기서 멍때리고 있었어." "여기인 거야? 그런 느낌이구나. 으음." 이타도리가 나를 볼 때 그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내 얼굴과 눈 그 너머까지 관찰하는 것 같았다. 그는 허리를 숙여 더 가까이 내게 다붙었다. 의아함에 나도 멀거니 바라보다 맥쩍은 기분이 들어서 시선을 피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가슴이 답답했다. 이제 보니 얼굴도 뜨겁다. 쳐다보는 걸 그만두었는데도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었거든. 다른가." "음⋯⋯ 비슷한 거 같아. 잘 기억 안 나는 점이!" "그치. 분명히 깨어 있었던 것 같은데. 하하하." "헤헤헤." 이타도리가 다시 허리를 펴며 웃고 나도 웃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 밥 먹으러 가자. 배고파." "둘이서? 다른 애들한테는 안 물어봐도 괜찮아?" "으응. 어쩐지 귀찮네. 오늘은 그냥 갔다 오자. 나도 근처에 뭐가 있는지는 잘 몰라. 도쿄가 아예 처음이거든." "그런 거라면 스즈카가 알 거야. 고전에서의 생활에 익숙하고 전에도 선배들의 훈련 감독을 했었다고 들었어." "오. 부탁해요, 선생님. 여기인가요? 여기?" "시끄럽다. 귀에 가까이 대고 말하지 마라." "역시 뺨이네요. 맛있는 가게 추천해 주세요!" 오랜만의 학교, 또래, 기타 등등. 그밖에 남자애의 허물 없는 담백한 태도에는 적응할 틈이 없었던 것 같다. 고전에서 처음으로 교실에 들어가던 날 나는 교실 안의 모든 사람들과 한 번씩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미루어 둔 일이 있었다. 경황이 없었다지만 스스로도 결코 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흠흠." 고맙게도 스즈카는 오직 내게만 가르쳐 주었다. 료멘스쿠나에 대해. 덕분에 그가 위험하다는 사실뿐 아니라 어떤 것들을 좋아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바른손을 심장에 올리고 그에게 성심성의껏 예의바른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스쿠나 씨. 인사가 늦었습니다. 제 이름은 입니다. 부족한 몸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이타도리는 어느새 저기까지 걸어갔다. 그가 나를 돌아보더니 조금 당황한 듯 습관처럼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거 알아? 스쿠나한테 자기소개한 거 네가 처음이야." "내가 처음? 초면인데 인사도 하지 않는 건 무례하잖아." "듣고 보니 그렇네. 나는 아직⋯⋯ 뭐랄까. 스쿠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는 익숙하지 않아서. 지금은 얘기할 마음이 없는 거 같아. 보다시피 이쪽은 대체로 이런 느낌이야. 번갈아 인사하는 건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스즈카의 얘기를 듣고 예상은 했다. 료멘스쿠나와의 첫인사가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닐 것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깔끔하게 무시당하다니 민망하고 섭섭했다. 번갈아 하는 인사도 확실히 거추장스럽지만 분명히 거기 있는데도 무시하는 건 그것대로 민망한 일이다. 이타도리의 말대로 다음부터는 태연하게 인사를 생략해도 되는 걸까. "이타도리 군은 스쿠나 씨와 대화 같은 거 안 해?" "안 해." "나는 해. 잘 잤는지, 뭘 먹을지, 어떤 걸 골라야 좋을지.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어." "고죠 쌤이 나한테 너를 도와주라고 말씀하셨는데 보아하니 도움은 내가 받아야 할 것 같네." "이런 대화가 불편하지 않아? 불편할 때는 말해 줘. 그렇지 않으면 들떠서 떠들어댈지도 몰라." "솔직히 처음에는 내가 생각했던 거랑 달라서 조금 복잡한 기분이었어. 저렇게 지내는 것도 가능하구나 하고. 근데 네 얘기를 듣고 있으니까 어쩐지 긴장이 풀리는 거 같아. 한편으로는 안심이야. 너도 다른 애들하고 다를 바 없네." 이타도리는 손가락을 삼킬 때도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 아닌 다른 존재와 공존하는 몸. 평범함과의 거리를 따지면 분명히 정상은 아니다. 그래도 나는 내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를 보며 안심했다는 이타도리의 말이 나는 은근히 기뻤다. 처음 그를 봤을 때부터 나도 어쩐지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주변 환경에 녹아 들어 아무런 위화감이 없는 자연스러운 모습. 같은 이유였던 것이다. 문득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시선을 돌렸다. 차를 타고 처음 고전에 들어왔을 때 차창을 빠르게 스쳐간 푸른 언덕과 격자무늬 햇살. 저녁이 되어 모두 옷을 갈아입었다. 석양으로 물든 풍경도 훌륭했다.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타도리 군. 번호 교환하자." "스즈카 쌤한테 알려 드렸는데." "우리는⋯⋯." "각자 쓰는구나." 아까처럼 흥미를 내비치며 이타도리가 전화기를 가져갔다. 자신의 번호로 한 번 걸었다가 끊고는 돌려줬다. 그 자리에서 바로 저장했다. '이타도리 유지'라고 썼다가 지우고 다시 '이타도리 군'이라고 썼다. 그게 좋을 것 같았다. 이타도리는 원래 친화력이 좋은 남자애인 것 같다. 스스로 벌거벗은 상태가 되어 덤덤하게 치고 들어온달까. 번화가와 이어지는 한적한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서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내 마지막 한 꺼풀까지 홀라당 벗겨 버렸다. "있잖아, 원래 이런 건 어색해서 잘 안 하는데 그래도 중요한 거니까 해 둘게. 이제 와서 말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이타도리가 걸음을 멈췄다. 나도 그것을 깨닫고 그와 마주섰다. 자드락길의 나무가 흔들리는 노을빛을 드리웠다. "잘 부탁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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