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 부끄럽다거나 변명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애초에 체육 특기생이었던 나는 고전에 오기 전에도 운동만큼 공부에 마음을 둔 적이 없었다. 경연 준비다 뭐다 해서 수업을 빠지는 날이 많았고 성적은 늘 고만고만했다. 낯뜨거운 성적표도 몇 번 받아 봤지만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어차피 내 자랑거리는 억세게 단련된 몸뿐이었으니까.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인들 포기 못했을까. 여전히 희망사항에 불과했으므로 나는 운동하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격차를 만회해 보려 했다. 노력은 했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눈을 부릅뜨고 귀를 활짝 열어도 당최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다. 새 단원에 들어갈 때마다 마음만은 부싯돌 같았지만 제대로 불을 붙여 보지도 못했다. 그래도 필기는 멈추지 않고서 이해가 되든 안 되든 계속 듣다 보면 뭐라도 남겠거니 미간에 힘을 끌어모았다. 어째서인지 오늘은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 눈은 바로 뜨고 있을지 몰라도 귀는 먹먹하고 선생님 말씀이 마냥 잠꼬대처럼 들린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위기 탓도 조금은 있다. 다른 아이들도 손에 턱을 괸 채 멍하니 칠판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수업을 듣는 후시구로마저 눈꺼풀을 억지로 올려 졸음과 싸우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 "그러니까 반드시 이 공식을 외우고⋯⋯." 교실의 분위기는 눅진한 이불처럼 무겁고 축축했다. 고죠 쌤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는지 설명을 하다 말고는 교탁으로 돌아서서 차가운 목판 위에 몸을 축 늘어뜨렸다. 목에 힘없이 매달린 머리 아래로 짙은 한숨이 떨어졌다. 탕! 선생님이 이렇게 교탁을 내리치실 때 설마 그것을 제자의 얼굴이라고 생각하셨을까. 그러나 분명히 그 나무가 우지끈 하고 어디 한곳은 쩍 갈라졌다. 뇌성벽력같은 박안에 놀란 아이들이 마침내 그 손아귀에서 턱을 떼고 거반 잠들었던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나마 산 사람으로 보인 것 같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땀방울이 맺혀 가며 설명에 열을 올리는데 제자라는 놈들이 공부한답시고 교실에 들어와 한 자리씩 차지하고는 하나같이 청맹과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고죠 쌤 하면 웃는상이 바로 그려지는 만큼 그가 이처럼 화를 내는 것은 결코 예삿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제 잘못을 알고 숙연해져서는 움츠렸던 몸을 펴고 대강 쥐고 있던 펜도 얼른 고쳐 잡았다. "선생님이 방금 한 얘기 잘 모르겠다 하는 사람 손 들어. 화내지 않을게. 다시 천천히 설명해 줄게. 응?" 무거운 정적 속에 긴장감이 흘렀다. 네 아이들이 일제히 서로 눈치를 살폈다. 모두 우물쭈물 손을 들었다. "잘 들어, 똥강아지들아!" 화내지 않겠다 하시더니.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애초에 그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교사 신분으로 차마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을 수는 없으니 죄송스럽지만 우습기도 하다. 선생님에게 우리는 귀여우면서 골치아픈 강아지들이다. 우리가 말을 안 듣거나 대들어도 본래 성정으로는 웃어 넘겼겠지만 오늘은 도무지 그럴 수 없다. 결국 수업은 중단되고 설교가 이어졌다. 모두 숨죽인 채 반성했다. 두 사람의 뺨에서 입이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시끄럽구만, 잔말쟁이가." "스쿠나! 뭔 소릴 하는 거야!" "거기 서서 엉덩이나 뽐내시지." "스즈카! 저 아니에요! 방금 건!" 선생님께서 분필을 제자리에 놓고 교탁을 빙 돌아 걸어오셨다. 선생님 오신다. 고개 숙여. 이렇게 소리 없는 말이 이타도리와 나 사이에 오갔다. 멋대로 튀어나온 입. 얄미운 입. 기왕이면 한마디만 더 하지. 진작 내빼고 없다. "유지, . 아웃." "네? 저희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겟 아웃 오브 마이 클래스. 어느 입이건 모두 진실을 알고 있으나 누구의 입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의 몸에 입을 두 개씩 가졌다. 그런 이유로 사이좋게 쫓겨났다. 그 입 막지 못 한 죄. 이른 바 연대책임이란 것이다. "스쿠나⋯⋯ 너 진짜⋯⋯." "날도 더운데 허릅숭이가 젠체하는 걸 듣고 있어야겠냐. 참는 데도 한계가 있어." "스즈카⋯⋯ 왜 그랬어요⋯⋯." "애송이들은 귀에 딱지가 앉았겠지만 좀 따분해야 말이지. 이제야 숨이 트이는군." 이쪽은 덕분에 벌을 받는 중인데 저쪽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의 몸일지라도 좀체 같지 않다. 그래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오후가 되니 건물에 햇빛이 스며들어 여기저기 흑백의 빗살을 치고 있다. 복도 또한 음지와 양지로 선명하게 나뉘었다. 이타도리와 나는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고서 등을 편안히 벽에 기댔다. 비록 쫓겨나긴 했지만 긴장이 풀리니 평화롭긴 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맑은 풍경 소리가 작게 들려 왔다. "아⋯⋯ 억울해⋯⋯." "어쩔 수 없지 뭐⋯⋯." 가까이 또는 멀리서 잎사귀의 바스락대는 소리까지 바람을 타고 들어온다. 복도 유리창을 넘어 뺨을 만지고 귀를 스친다. 손에 잡힐 듯이 어릿어릿한 유월의 바람이 여름을 품에 끼고 날아든다. 길게 늘어뜨린 옷자락에 달보드름한 봄이 따라붙는다. 나는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스즈카에게도 전해지고 있을까. 그렇다면야 나쁘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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