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죠 쌤은 출장으로 자리를 비우실 때가 많아서 그의 방은 대체로 비어 있다. 다행히 오늘은 바쁘지 않으신 모양인지 손에 턱을 괸 채 서류를 훑어보고 계셨다. 나는 가져온 숙제를 제출하고 채점을 받아야 하므로 기다렸다.

 "희한하네."

 고죠 쌤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말하고는 조금 시쁜 기색으로 입술을 삐죽이 내밀었다. 눈치채신 모양. 짐짓 모른체하며 그가 책상 한편에서 예쁘게 포장된 과자를 집어 내게 건넸다. 그 옆에 김이 올라오는 커피가, 하얀 종이 상자가, 그런 과자가 옹기종기 담겨 있었다. 방에 한 걸음 들어설 때부터 코끝에 아른거리던 달달한 냄새였다.

 "는 착한 아이니까 쌤한테 솔직하게 얘기해 줄 거지?"

 나는 과자를 받아들고 열이 쩍어 어쩔 줄 몰라하며 대답했다.

 "너무 힘들어해서 제가 좀 도와줬어요. 근데 혼내지 마세요. 스즈카도 요즘 되게 피곤해요. 저 때문에."

 그가 기우듬히 나를 바라봤다. 내 뺨. 사람들은 이렇게 스즈카를 찾기도 하지만 그에게는 이례적인 모습이다. 찾는다기 보다는 부른다는 느낌. 그러나 스즈카는 묵묵부답이었고 나도 웬만하면 그녀를 내 뒤로 숨기고 싶었다.

 "여기까지 와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니. 스즈카는 어지간히도 선생님하고 얘기하고 싶지 않은가 보네."

 "예? 그건 아니에요! 혼날까 봐 그렇죠⋯⋯."

 "딱히 혼내려던 게 아닌데. 추궁을 피하기 위해 숨은 건 괘씸하지만 선생님도 다 이해한답니다. 고생했어."

 이따금 장난도 치시지만 제자에게만은 다정하신 분이다. 동료들을 대하는 태도와 비교하면 더욱 분명하다. 나를 포함한 아이들은 그다지 선생님의 눈동자를 볼 일이 없는데 이렇게 작은 글을 읽을 때 종종 안대를 벗으신다.

 "저기, 고죠 쌤."

 "질문은 채점 끝나면 하자."

 "스즈카가 요즘 핸드폰을 자주 들여다봐요. 제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연락을 기다리는 게 아닌지⋯⋯."

 "가 착각한 것 같은데?"

 "진지하게 들어 주세요. 누구나 자신이 없을 때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쌤도 그런 경험 있으시잖아요."

 고죠 쌤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머리가 아픈 듯 이마로 손을 가져간다. 이제 보니 책상에 약병이 놓여 있다. 자신이 서랍에 넣어 두지 않았음을 알아챈 듯한 표정이다. 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커피에도 달달한 향이 섞여 있다.

 "어디 아프세요?"

 "그냥 편두통이야."

 "쌤도 스트레스 받으시는구나."

 "이제 만 아는 비밀이 됐네."

 "걱정 마세요.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해요."

 "착해라. 도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고죠 쌤은 웃음빛을 띤 채 채점을 계속하셨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그래, 쌤한테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냐고 했지. 사실, 많아. 최근까지 그랬어."

 좀 더 능청스레 시치미떼는 반응이 돌아올 줄 알았다. 그의 차근한 대답에 약간 씁쓸한 뒷맛이 따랐다.

 "그래도 쌤은 믿고 싶지 않네. 차라리 그녀가 먼저 연락하기 싫었다고 생각하는 게 낫겠어. 왜일 것 같아?"

 "음⋯⋯ 잠깐 생각해 볼게요."

 고민하는 사이 채점이 끝났다. 돌려받기 위해서 손을 뻗고 다가가는 것만으로 달고 씁쓸한 향이 풍겨 왔다.

 "선생님은 말이지. 스즈카에게도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어. 지금처럼. 아니면 그냥 숨 돌릴 틈이라도. 왜냐면 많은 일이 있었거든. 어찌 보면 아픈 곳을 섣불리 건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지만. 그래서 기다리는 거야. 알았지?"

 "네."

 방에서 나온 뒤에는 조금 얼떨떨한 느낌이었다. 방금 실연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멍해졌다가 도리어 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괜스레 설레고 웃음이 나왔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지금까지 흐릿하기만 했던 무언가 점점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뺨에 손을 대 봤다. 뜨거웠다. 그러나 이건 내가 아니다. 내게도 욕심이라면 있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진심이었고 그와 동시에 착각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좋아하지만, 설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선생님은 듬직하고 잘생겼고 목소리도 좋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반할 수 있다.

 "제대로 지켜보고 있네요. 스즈카는."

 그야 베테랑이니까.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후후후 웃었다. 내 몸인데도 그녀와 같이 할 수 없는 나를 스스로 놀리는 것이기도 했다. 꿈에서 겪은 일은 내 경험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스즈카가 내 육체를 통해 겪은 일들도 내게는 한 편의 꿈과 다를 게 없다. 다시 말해 현실이 아니다. 문제는 어쨌거나 전부 내 눈과 귀를 통해 얻은 경험이기 때문에 온전히 그녀에게 떠넘기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게 나한테는 조금 자극이 컸던 것 같다.

 "앗, 노바라. 벌써 임무 마쳤구나. 굉장하다."

 "훗, 이제 보고만 하면 돼. 고죠 쌤 안에 계셔?"

 "응! 나도 방금 숙제 검사 받고 나오는 참이야."

 가벼운 발걸음으로 찾아 온 노바라는 서두르고 싶은 듯 수선스레 움직였다. 그러더니 불현듯 멈칫하고 내게 바특이 다가왔다. 홍윤한 얼굴에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놀라움 그리고 어떤 의심을 품은 채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혹시⋯⋯ 너, 고죠 쌤 좋아하니?"

 "좋아해! 왜 다들 물어보는 거지?"

 "눈에 보이니까! 내 말은, 연애적인? 그런 의미로?"

 "맞아! 내 짝사랑이지만 계속 좋아할 거야! 헤헤헤."

 노바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입술도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았다. 공연하게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던지 그저 삼키고 그대로 흘려 버렸다. 무의식 중에는 눈에 보인다는 그것이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끝나면 내 방에서 아이스크림 먹자."

 "어떤 아이스크림?"

 "하○다즈! 큰맘 먹고 사 왔지! 으히히."

 "헤헤헤.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노바라는 노크도 하지 않고 냅다 문고리를 잡았다. 그런데 또 멈칫하고는 그녀가 눈썹을 찌푸리며 바른편을 돌아보았다. 멀리서 북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불쑥 나타났다. 복도 맞은편에서 남자애들이 빠르게 돌진해 왔다.

 "조심⋯⋯ 꺄!"

 "미안!"

 "절대 안 놓친다!"

 이타도리가 도망치고 후시구로는 그 뒤를 쫓고 있었다. 빛처럼 바람처럼 얼핏 익숙한 목소리가 훅 지나갔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나처럼 아연실색하고 서 있던 노바라가 뒤늦게 피하려다가 하마터면 문에 코를 콱 찧을 뻔했다.

 "야, 그지 깽깽이들아! 밥 쳐먹고 힘이 남아도냐! 죽는다, 어어!"

 "노바라, 방금 두목님 같은 목소리 나오지 않았어? 괜찮은 거야?"

 "어⋯⋯ 그보다 내 하○다즈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하여간 남자새끼들, 다리몽댕이를 팍 뿐질러 불라!"

 고요해진 복도에 노바라와 내가 덩그러니 섰다. 멍하니 바라보는 내게 노바라가 조금 머뭇거리며 물었다.

 "아직 나랑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 거지?"

 "방금처럼 화내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좋아. 그럼 기다려. 금방 돌아올게, 바닐라."

 "아무데도 안 가니까 걱정 말아요, 스트로베리."

 노바라는 사뿐사뿐 문을 열고 뒤돌아서 천천히 닫았다. 내가 시야에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가끔 두목님 같은 목소리로 남자애들에게 화를 내도, 사투리로 욕을 해도,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나는 벽에 기대었다. 눈을 홉뜨고 바라보니 홀가분했다. 고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마음이 분주하다. 짧게 스치고 간 것치고는 짙은 여운을 남기고 새로운 기대를 심었다. 그래, 여러 가지 의미로. 뭔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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