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아니, 뭐⋯⋯ 너는 거의 맨날 그렇지만. 좋은 일이라도 있나 보지?"
"좋은 일이라 해야 할지, 반대로 평범한 일이라 해야 할지⋯⋯ 있죠, 스즈카. 잠깐 이거 좀 보실래요?" 나는 전날 누군가와 나누었던 메신저 대화 내용을 스즈카에게 슬쩍 보여줬다. 상대방의 사진도 있었다. "누구야?"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이요. 어제 갑자기 연락이 와서 깜짝 놀랐어요. 되게 오랜만이거든요." "그래서 누군데 이 말뼈다귀가. 생긴 게 그럭저럭 봐 줄 만하다만, 나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도 실제로 만난 건 예전 일이지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종종 전화해서 응원해 줬거든요." "흠." "제가 퇴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다면서 만나서 축하해 주겠다고 했어요.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죠." 어린시절 같은 동네 살았던 이웃 오빠다. 이사 후에도 연락을 주고받아 도쿄에 자취중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네 말을 들으니 조금 달라 보이는 것 같기도 하구나." "보시다시피 미남인데다가 상냥해서 예전부터 인기가 많았어요. 이 오빠의 별명이 '인소남'이었답니다." "인소남? 웃음을 참는 남자라는 뜻이냐. 무슨 그런 이상한 별명이 있어." "스즈카도 참, 웃음을 참는 남자가 아니라, '인터넷 소설 남자 주인공'의 줄임말이에요. 아이돌이라고요." 오빠가 중학생일 때 나는 초등학생에 불과했다. 작은 아이의 심장마저 뛰게 만들었던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웃이라는 게 괜스레 기분 좋을 만큼. 주변 언니들에게 들었던 그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소설이었다. 수업 중에 창문을 뛰어넘어 교실에 들어온다든지. 밸런타인데이 날이면 오빠 집에 놀러가서 과자나 초콜릿을 얻어먹었다. 눈부시게 화려한 포장지들. 그런 오빠를 좋아했다기 보다는 동경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순수한 의미로 설렌다. "근데⋯⋯ 어째 고등학생이라기에는 나이가 들어 보인다?" "그야 저보다 한참 선배니까요. 오빠는 지금 대학생이에요." "대학생이라고? 어이, 이 놈 정말 믿을 만한 거냐? 조심해라!" "괜찮아요. 인소남이라니까요." "인소남이라⋯⋯ 허허. 재미있군." 외출 준비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조금 늦을지도. 스즈카가 오늘따라 잔소리를 해서 그렇다. 조신하게 입어라, 화장하지 마라⋯⋯ 애들이랑 놀러갈 때는 아무 말도 안 하더니, 오빠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아무래도 걱정되나 보다. 벌써 몇 번이나 주의를 들었다. 그래도 내 나름대로 반항해서 최대한 차려입었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치마를 입는 대신, 긴 양말을 신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화장은 색조가 없는 투명한 립밤만 바르고 끝이었다. 스즈카 말을 들을 걸 그랬나. 속바지를 입긴 했지만 바람이 불 때나 계단을 오르내릴 때는 가방으로 가려야 할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기숙사에서 나왔다. 교정을 지나고 있을 때 이타도리가 무언가를 들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고죠 쌤에게 받은 수업자료나 시험지를 넣어 두는 파일 케이스였다. 다른 애들은 자습인가 보다. "안녕, 이타도리 군." "어, . 어디 가." "아는 오빠랑 만나기로 약속했어." "잘생겼나 보네. 사진 있음 보여 줘." 색다른 옷차림이어서였을까. 들떠 보여서였을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메신저 속 사진을 보여 주면서 이타도리에게도 스즈카에게 했던 말을 거의 똑같이 되풀이했다. 그는 기껏해야 3초 정도 사진을 보고 돌려 주었다. "너한테 먼저 만나자고 했지?" "으응. 그건 어떻게 알았어?" "스즈카 쌤도 보셨어? 뭐라셔?" "얼굴에는 윤태가 흐르고 고라말과 같이 늠름하니 과연 인소남이구나." 이타도리가 내 뺨을 쳐다보며 싱거운 웃음을 툭 내뱉었다. 그리고 말했다. "뭐, 잘 갔다 와."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더욱 서둘러 약속 장소로 달려갔다. 겨우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오빠! 오랜만이에요!" ", 못 본 사이에 되게 예뻐졌다. 이야, 정말로 남자친구 없는 거 맞아?" "헤헤헤. 불러 주셔서 감사해요. 요즘 숙제 때문에 외출을 못해서 답답했거든요." "일단은 영화부터 보고 밥 먹으러 가자. 오빠가 예약해 놨어. 로맨스 물 좋아하지?" "네! 엄청 좋아해요!" 오랜만에 만난 만큼 어색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오빠가 예전과 전혀 다를 바 없이 대해 줘서 마음이 놓였다. 그를 따라 들어온 영화관은 한산한 편이었다. 주말이라 북적일 걸 염려했는지 일부러 발길이 적은 곳을 고른 듯했다. "가서 팝콘이랑 마실 거 사 올게."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오빠가 간식을 사러 갔다. 스즈카와 얘기할 수 없어 입이 근질거렸던 나는 기회다 하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실제로 보니까 어때요? 잘생겼죠? 좋은 오빠죠? 그쵸?" "글쎄다. 그런 것 보다⋯⋯ 저 놈들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저 놈들이요?" "저, 저기. 저어기를 봐라. 어디서 많이 본 뒤통수들 아니냐." 스즈카의 말을 듣고 돌아보니 정말 있었다. 어디서 많이랄까, 하나는 오늘 기숙사를 나설 때도 본 뒤통수였다. "이타도리 군! 영화 보러 왔어?" "어어, . 여기서 또 보네." 오빠가 아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서 그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반갑고 사복이 잘 어울려서 조금 두근거렸다. 그 옆에는 마찬가지로 사복 차림에 선글라스를 쓴 고죠 쌤이 서 있었다. 그가 몹시 반가워했다. "어머, 정말 스즈카잖아. 세상에 이런 우연이. 신기해라. 호호호." "호호호. 나랑 둘이 얘기 좀 하는 게 어떠냐, 고죠. 잠깐 실례하마." 내 안 어딘가에서 조용히 여유를 즐기고 있던 스즈카가 불현듯 안에서부터 문을 확 열어젖히며 튀어나왔다. 그녀는 고죠 쌤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어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사토루, 너어. 무슨 속셈이야!" "사토루 군, 속셈 같은 거 없는데?" "시치미 떼지 마! 여긴 뭐 하러 왔어?" "영화관에 영화 보러 오지, 뭐 하러 와?" "하필이면 오늘? 여기서? 그것 참 희한하군. 어디 티켓 좀 보자. 내놔!" "왜, 왜 이래. 이런 데서⋯⋯ 사람들이 보잖아. 아앙, 어딜 만져. 진짜 웃겨." "웃기는 건 네놈들이지. 바로 뒷자석이구만! 좋은 말로 할 때 다른 데로 가라!" "뭐 때문에? 불편하면 네가 가든지. 우린 벌써 팝콘도 샀어. 서로 상관 말자구." 스즈카가 고죠 쌤의 가슴팍을 짝! 때리더니 눈치 한 번 살피고 목소리를 낮췄다. "유지는 그렇다 치자. 너까지 유치하게 왜 이래? 나이를 어디로 먹었어? 응?" "나잇값도 못하는 게 누군데. 뭐? 얼굴에 윤태가? 고라말은 또 뭐야? 뭔데?" "분명히 말해 두겠다만. 봐주는 건 여기까지다. 둘 다 조용히 영화만 보고 꺼져!" "말 안 해도 갈 거야. 우리도 바람쐬러 나온 거니까. 얘기 다 끝났으면 비키시지. 흥!" 고죠 쌤은 엉덩이로 새침하게 스즈카를 밀어내고 유유히 상영관에 입장했다. 엿보기와 엿듣기는 최대한 자제하고 있지만 내게도 나름 고충이 있다. 톡 까 놓고 말해서 그냥 재미있다. 가끔은 두 어른이 정말 웃기고 귀여워서 못 참겠다.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이 궁금하고, 걱정되고, 간질간질, 흥미진진하다. 이런 식으로 하루에도 몇 번 씩 문이 열렸다 닫힌다. 다시 스즈카와 교대했지만 그녀는 틈틈이 창문을 열어 고개를 내밀었다. "저, 저, 잘났다! 잘났어! 아주 훌륭한 스승과 제자시구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현실감이 없었고 거기서는 나도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오빠가 팝콘을 사서 돌아왔다. 나는 로맨스가 좋다. 영화뿐 아니라 소설도 많이 읽었다. 책으로, 인터넷으로.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연애에 관한 이상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장르가 로맨스이면서 흔히들 말하는 B급 영화다. 스토리보다는 재미에 중점을 둔다. 여자도 심심풀이로 보는 걸 남자가 무슨 재미로 볼까 싶기도 하지만 나를 생각하며 골랐다고 생각하면 기쁘다. 지루한지 작게 하품 소리가 옆에서⋯⋯ 뒤에서도 거푸 들려 오며 때아닌 하모니를 이루었다. "오빠. 제가 잘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노블리가 왜 제인에게 마틴을 조심하라고 한 거예요?" "아. 노블리는 알고 있는 거야. 마틴이 제인에게 진심이 아니라는 걸. 남자끼리는 척 보면 다 알아." "오빠가 설명해 주니까 내용이 금방 이해가 돼요. 헤헤헤." "하하하. 또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 오빠가 가르쳐⋯⋯ 헉!" "저 아저씨 진짜 나쁜 사람이다. 제인은 진심으로 자기를 아끼는 줄 알고 있는데, 끝까지 가식 대마왕이네." 이타도리가 불쑥 튀어나와 등받이에 팔을 올렸다. 졸지에 오빠와 나는 각자 반대쪽으로 밀려나 뚝 떨어졌다. 오빠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의 손이 갈 곳을 잃고 헤메다 조금 어색하게 음료수를 집어들었다. " 너도 꽤 집중해서 보는구나. 자, 팝콘 좀 먹어." "이해하고 보니까 더 재미있어요. 앗, 팝콘. 떨어졌다." "도 참. 옷에 다 묻었네. 괜찮아. 오빠가 털어 줄⋯⋯ 더헉!" "미안합니다. 화면이 안 보여서요. , 쌤도 캬라멜 팝콘. 아아." 오빠의 양옆으로 고죠 쌤의 팔이 툭 튀어나왔다. 오빠는 흠칫 놀라고 나는 얼떨결에 캬라멜 팝콘을 쌤의 입에 넣어 드렸다. 한 번은 실수할 수 있다지만 아무래도 이건 좀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괜히 내가 눈치를 봤다. 어쩌다 보니 오빠와 나란히 앉았음에도 멀찍이 떨어져 데면데면 영화를 관람했다. 그래서인지 더는 아무 일도 없었다. "해피 엔딩이네요! 재밌었어요! 오빠는 어땠어요?" "어, 어어. 나는 왠지 영화에 별로 집중할 수 없었어." "아침 먹고 나왔어요? 배고파서 그런 건지도 몰라요!" "그, 그렇네! 그런가 보다! 그래⋯⋯ 는 뭐 좋아해?" 영화는 만족스러웠다. 이제 배를 만족시켜 줄 차례다. 나는 도쿄에 대해 잘 몰라서 오빠를 얌전히 따라왔다. ", 여전히 단 거 좋아하는구나. 여기 파르페 진짜 맛있어." "네! 요즘에는 스즈⋯⋯ 아무튼 자주 못 먹어서. 저도 파르페 먹을래요! 그리고 이거! 이거도 먹고 싶어요!" "혼자서 다 먹을 수 있어? 밥도 먹어야 되는데, 간식으로 배 채우면 안 되지. 하나씩 시켜서 같이 나눠 먹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다 먹을 자신도 있고 좀 쑥스러웠지만 혹시라도 남으면 미안할 것 같아서였다. 그때 가게 출입문이 열렸다. 점잖은 옷을 입어도 겉모습부터 화려해 보일 수밖에 없는 장신의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 시원스러운 느낌의 맵시 좋은 남자애가. 멋있고 귀엽고 다 좋은데 역시나 어디서 많이 본 얼굴들이었다. "여기야, 유지. 쌤이 추천하는 곳. 자, 그럼 어디 앉을까?" "고죠⋯⋯ 저 웬수 같은 놈." ", 방금 뭐라고 했어?" "네? 그, 그게,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저는요. 헤헤헤." 하루에 한 번 마주치기도 힘든데 어째서. 어떻게. 두 번이나 겹치지. 너무 비현실적이라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정말 신기하다. 영화관에서 보고, 여기서 또 보네. ." "이, 이타도리 군. 고죠 쌤. 두 사람도 배가 고팠나 보네요." "파르페 먹으러 왔어. 쌤도 요즘 다이어트하느라 못 먹었거든." "무언가 네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 같아. 합석하라는 계시 아닐까." 틀림없이 일부러였다. 둘의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이유가 뭐든 간에 우연을 가장한 필연임이 분명해 보였다. "오빠, 그래도 괜찮을까요?" "어? 음, 글쎄. 나는 별로⋯⋯." "아, 날씨 좋다. 이런 날은 햇빛이 잘 드는 창가 자리에 앉아야지. 여기가 딱이네." 소년의 씩씩함에 오빠의 잘량한 목소리가 묻혔다. 이타도리가 개의치 않고 내 옆에 앉았다. 나는 그와 어깨가 부딪혀서 주춤주춤 밀려났다. 그런데도 그는 개의치 않고 다가붙었다. 오빠와 대각선으로 바라보아야 할 정도였다. "이타도리 군. 평소보다 가깝지 않아? 시, 싫은 건 아니지만 오빠 앞인데 좀⋯⋯." "어어, 어!" 다행인지 뭔지 얼굴이 빨개지기 전에 고죠 쌤이 오빠의 신경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여기는 다 좋은데 테이블이 작더라. 아이고. 불편하시죠. 다리가 좀 길어서 그래요." "아니⋯⋯ 다리가⋯⋯ 무슨 다리가⋯⋯ 진짜 왜 이렇게⋯⋯ 네⋯⋯ 괜찮습니다⋯⋯." 고죠 쌤이 앉으면 스툴쯤은 그냥 어린이용 의자가 된다. 평범한 소파에 앉아도 다리를 꼬지 않으면 어딘가 불편해 보인다. 그런 쌤이 옆에, 심지어 사양 없이 다리를 쫙 벌려 앉으면. 오빠가 너무 작아 보여서 내가 다 민망했다. "오빠, 안색이 나빠요. 땀도 나고⋯⋯ 컨디션 안 좋은 거 아니에요? 제가 닦아 드릴게요." "그래 줄래?"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손수건을 꺼내서 오빠의 얼굴에 톡톡 두드려 가며 땀을 닦았다. "오빠가 전화해 줘서 놀랐어요. 사실 저는 오빠가 저를 진작에 잊어버리신 줄 알았거든요." "사실은 며칠 전 길에서 우연히 너를 봤어. 음, 그때는 머리도 묶고 조금 다른 분위기였는데." "네?" 나는 최근에 그런 모습으로 다닌 적이 없다. 머리를 항상 묶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스즈카다. "내가 알고 있는 너보다 훨씬 성숙해 보였달까, 다시 봤어. 만나서 얘기하고 싶었⋯⋯ 어⋯⋯." "그렇구나. 그럼 오늘 저를 보고 실망하셨겠어요. 그날 저는 평소랑 조금 달랐으니까⋯⋯." "아니! 아니야! 만나 보니까 예전 그대로라서 더 좋아. 지금 너도 정말 귀여⋯⋯ 워⋯⋯." 눈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리며 말끝을 흐리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제 알겠다. 물론 두 남자 때문이다. 옆을 봐도 부담스럽고, 앞을 봐도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뒤를 볼 수는 없으니 결국 창문만 바라볼 뿐이다. "두 분⋯⋯ 저한테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하고 싶은 말은 무슨. 그냥 잘생기셔서. 하하하." "잘생긴데다 귀여우시고. 인소남이세요. 하하하." "근데 왜 살기가⋯⋯ 저기, . 오빠 잠깐 화장실!" 오빠가 자리를 비운 뒤. 나는 조용히 옆을 돌아봤다.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지그시 보기만 했다. 그러자 굳었던 이타도리의 얼굴이 부드럽게 폈다. 내가 몰랐던 표정에서 잘 알고 있는 그 표정으로 돌아왔다. 서글서글한 눈. 고죠 쌤도 언제 그랬냐는 듯 새침떼기가 됐다. 무서운 사람들이다. 어쩜 이리 순식간에 낯빛이 달라지는지. "잘 하는 짓이다, 고죠 사토루. 그리고 유지 너도. 네놈들 등쌀에 밀려서 남자가 도망가게 생겼어." "방금 하는 말 못 들었어? 길에서 우연히 보고 갑자기 생각나서 연락했다? 수작부리는 게 뻔하잖아." "처음부터 위해 전화한 게 아니었고 진심으로 축하해 줄 마음 같은 건 전혀 없었던 거라고요." "저기, 저도 화장실 다녀올게요." 오빠에 대해서는 그리운 마음뿐이었다. 무엇보다 짙었던 감정은 고마움이었기에 조금도 실망스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나는 실망감을 감추기 위해 거울을 보며 웃는 연습했다. 설령 오빠가 스즈카에게 관심이 있어 연락했던 것이라 해도 그를 탓할 이유는 없다. 어쨌든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다. 영화를 보는 내내 즐거웠다. 이대로 좋은 감정만 남긴 채 헤어지면 그걸로 충분하다. 이러나 저러나 오빠는 오빠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는데. "그래, . 다 죽어 가던 애 있잖아. 내 눈에 잠깐 뭐가 씌였었나 봐. 하도 순진해 보여서 좀 데리고 놀까 했더니. 얘는 대체 어떤 인간들이랑 어울리고 다니는 거야. 말도 마, 영화관에서부터 계속 따라다닌다니까. 뭐 하는 놈들인지 눈이 이상해. 소름끼쳐. 아무튼 적당히 둘러대고 들어갈 거야. 안 그럼 나 오늘 진짜 죽을지도 몰라."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오빠의 목소리를 듣고 멈춰 섰다. 매장까지는 들리지 않겠지만,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만, 내가 서 있는 곳에서는 듣고 싶지 않아도 다 들렸다. 만약 그가 느꼈을 살기라는 것을 내가 몰랐다면 아마 거기서 실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죽을 리가 없잖아. 보기 보다 겁이 많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지만 뭐, 이해한다. 두 사람과 친한 나도 무서웠는데 처음 본 사람은 오죽할까. 딱히 아니라고 우길 생각은 없다. 그게 뭐든 간에 악의로 가득한 존재와 다투다 보면 살벌해질 만하다. 애당초 평범한 인간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는데 소름끼친다 할 수밖에. 부정하지 않으니까 그건 됐다. 그들의 좋은 점도 나쁜 점도 나만 제대로 알고 있으면 그만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해 함부로 말한 것도 물론 화가 났지만, 내게 극도의 실망감을 안겨준 것은 따로 있었다. 내가 품었던 그리움, 동경심, 모두 한순간에 무너졌다. 나를 불쌍히 여기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불쌍히 여기는 척하는 건 참 가증스럽다. 누굴 위해? 뭘 위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리로 돌아왔다. "쌤이 미안해⋯⋯ ⋯⋯." "나도 미안해⋯⋯ ⋯⋯." 풉! 그 와중에 웃겨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둘 다 왜 이리 귀여운지. "저 괜찮아요, 고죠 쌤. 괜찮아, 이타도리 군. 걱정하지 마요. 헤헤헤." "⋯⋯." "이따가 다같이 학교로 돌아가요." "다같이?" "저 밖에서 전화 좀 하고 올게요. 오빠한테는 잘 얘기해 주세요. 남자끼리는 척 보면 알잖아요. 그쵸?" "당연하지. 눈빛만 봐도 감이 와요.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 아니면 나쁜 새끼인지. 응, 그래. 다녀와." 모두 아는 것을 나만 몰랐다. 왜 몰랐을까. 정말 순진해서일까. 나를 진심으로 아끼는지 가지고 노는지조차 구별하지 못할 만큼. 당장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가 병약해진 뒤 거의 모든 이들이 내 곁을 떠났다. 그 중에서 남은 몇 안 되는 소중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괴로움이 마음을 잠식하기 전에, 그늘이 방을 뒤덮기 전에, 깨끗이 치워야 한다. 할 수 있다면 버려야 한다. 이미 가치를 잃어버린 감정. 방해만 될 뿐이다. 「여보세요.」 "쿳키⋯⋯." 「, 왜 그래.」 "흑⋯⋯ 흑흑⋯⋯." 「무슨 일이야? 누가 울렸어!」 "나⋯⋯ 나 좀 도와주면 안 돼?" 이렇게 사람은 철면피가 되는 법을 배워 가는 걸까. 아무도 모르게 한바탕 울고난 뒤에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태연한 얼굴로 식사하고 디저트까지 먹었다. 그 뒤에 두 남자와 헤어지고 공원에 왔다. 오빠는 돌아가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지만 말 그대로 철면피가 되어서 갖잖은 애교까지 부려 가며 그를 졸랐다. 조금은 성장했는지도. "바쁘실 텐데 제 어리광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오빠." "괜찮아, 그 사람들도 더는 안 따라오는 것 같고. 흠흠." "오늘은 장난이 좀 심했지만, 사실 좋은 사람들이에요." "솔직하게 말해. 남자끼리는 눈만 봐도 알 수 있으니까." "뭘요?" "그냥 장난치는 건지, 질투하는 건지 말이야. 너, 혹시⋯⋯." "혹시, 뭐요?" "그러니까⋯⋯ 혹시, 남자친구 없다고 했던 거. 내숭이었어?" "글쎄요? 후후후." 능청스럽게 대답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언뜻 보기에도 훈훈해서 시선이 저절로 향했다. 놀랍게도, 후시구로였다. 누군가 오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지만 어째서 후시구로가 왔는지는 의문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이제껏 본 적 없는 다정한 미소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요즘 어떻게 된 거야. 전화도 안 하고.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그가 내 팔을 살짝 흔들었다. 다급히 낯빛을 고치고 나도 맞장구를 쳤다. "미안해, 안 그래도 오늘 전화할 생각이었는데. 나 없는 동안 쓸쓸했어?" "그걸 꼭 말해야 아냐. 나한테는 너밖에 없어. 알잖아. 이 남자는 누군데." "그냥 아는 오빠야. 스쳐지나가는 사람. 메구미랑은 다르니까 질투하지 마." 제대로 차려입은 후시구로는 처음 본다. 미남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연기인데도 하마터면 반할 뻔했다. 이따 전화할게, 속삭이며 끈적하게 달라붙는 것부터 아쉬운 듯 한숨을 쉬고 천천히 떨어지는 것까지 완벽하다. 이런 면이 있었다니. 겉으로 티내지는 않았지만 깜짝 놀랐다. 뒤돌아서 눈짓하기에 엉덩이를 탁 때려 줬다. "역시 있구나 남자친구. 잘생겼네." "남자친구만 있다고 누가 그랬어요." "응?" 계속 연기를 해야 하는데 나까지 정신이 쏙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만큼 후시구로의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더는 놀랄 일도 없을 거라 방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서부터 반짝반짝 빛나는 노바라를 보고 또 눈이 커다래졌다. "쿳키,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 데리러 와 줘서 고마워." "어쩌겠어. 이렇게라도 안 하면 너를 만날 수가 없는데." "그러니까 진작에 나 같은 건 잊어버리고 남자를 만나라고 했잖아." "괜찮은 남자가 어디 보여야 말이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없네. 풉." "노바라도 참 짓궂다니까. 아무리 내가 좋아도 오빠를 무시하지 마." "맞아. 네가 너무 좋아서 남자들⋯⋯ 아니, 너 외에는 다 감자로 보여." "이런 곳에 감자가 있을 리 없지. 노바라는 설마 내가 유지만 좋아한다고 생각한 거야?" "내가 뭐한테 밀려났는지도 모를 거 같아? 그 감자, 지금도 어디 감추고 있는 거지! 말해!" 노바라가 애원하듯이 내게 매달리며 소리쳤다.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돌려받지 못하고 서서히 망가져 가는 히스테릭 연기가 일품이었다. 연기일 뿐이지만 좋아서 입 꼬리가 자꾸만 올라갔다. 모두에게 사랑받는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그때 어딘가에서 이타도리가 달려오더니 거침없이 나를 돌아세웠다. 숨을 헐떡이며. ",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잖아. 내가 잘못했어. 나는 네가 아니면 안 돼. 우리 다시 만나자." "나야말로 미안했어, 유지. 오빠랑 같이 영화 보고 밥 먹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나 때문에 속상했지." "누구? 아아. 그건 벌써 잊어버렸어. 내가 안아 주지 않아서 홧김에 나간 거였잖아. 이제 혼자 두지 않을게." 어떤 느낌인지 알겠다. 굳이 말하자면 이타도리가 내 애인이고 나머지는 가볍게 만나는 사이라는 설정 같다. "쿠기사키?" "이타도리!" "일회용까지는 참을 수 있지만 이건 못 참아. 다시는 안 만나다며. 이번에는 그냥 안 넘어갈 거야." "피차일반이야. 일회용 따위는 알아서 사라지게 놔두고 결판을 내자고. 누가 그녀의 온리 원인지." 거기서부터는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잠깐이나마 연극의 주인공이 된 것만으로 나는 만족했다. 아무래도 좋았지만 오빠를 돌아보니 얼굴에 혼란이란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뒤돌아서 가려는데, 누군가와 딱 마주쳤다. 고죠 쌤이 그를 막아섰다. 왼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원하는 게 뭐예요! 호, 혹시 당신도?" "아니, 나는 그냥 저 아이 담임이에요." "뭐든 상관없어요. 길 막지 말고 비켜요." "갈 때는 가더라도 한테 말은 하고 가야지. 이게 무슨 매너야." 헤어질 시간이다. 나는 노바라와 이타도리를 지나쳐 그에게 걸어갔다. "오빠, 화났어요? 뭐가 문제예요?" "뭐가 문제냐고? 내 눈으로 본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진짜든 가짜든 내가 너를 잘못봤단 건 알겠어." "대체 저를 어떤 애로 보셨길래요?" "뭐, 그래. 너는 죽다 살아난 물고기나 다름없지. 맘껏 헤엄치고 다녀. 하지만 나는 이런 진흙탕 사양이야." "뭐라고요? 말이면 다인 줄 알아요? 그래요, 나도 한마디만 할게요. 공공장소에서 통화는 조용히 하시죠!" 눈시울이 뜨거웠다. 그래도 다행히 스즈카가 먼저 알아차렸다. 퍽! 그녀가 나 대신 시원하게 한 방 날려 줬다. 경쾌한 타격음이었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오빠가 그대로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스즈카가 손목을 풀며 말했다. "왜, 설마, 네가 베개처럼 부드러운 손에 따귀나 한 대 맞고 씩 웃으며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냐. 어림도 없지." 어림도 없지. 암. 나는 뒤에서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왠지 스즈카를 올려다보는 오빠의 눈빛이 이상야릇했다. "그, 그래. 이거야. 내가 그날 느꼈던 설렘⋯⋯ 저, 저기. 방금 전에는 말이 잘못 나왔어. 우리 한 번 더 만나자!" 현실인가. 오히려 연기라 믿고 싶었다. 스즈카의 손을 꼭 잡고 히죽거리는 한때의 인소남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모르는 게 나았다. 알고 싶지 않았다. 부풀리고 부풀려진 소문 뒤에 변태 마조히스트가 있었다는 사실까지는. 어떤 면에서는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나쁜 기억에 더러운 기억까지 더하기 전에 진심으로 그만두고 싶어졌다. "뭐래, 이 새끼가." 고죠 쌤의 발길질로 시원하게 마무리. 약간 사적인 감정이 실려 있었지만 상관없다. 이제 끝이다. 다시는 보지 말자. 나.쁜. 새.끼. 마음속으로나마 욕하고 나니 후련했다. 돌아올 때는 연기에 가담한 모두가 함께였다. 내 학교. 내 집. 가끔은 답답하지만 그래도 제일 좋다. 조금 걷다 들어갈 생각이다. 이타도리와 오늘 못한 산책을 하기로 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복잡한 거리와 비교도 되지 않는 숲의 맑은 공기가 폐부를 감쌌다. 밀랍과 향의 냄새도. "있잖아, . 왜 나한테는 화 안 내? 아무 말도 안 하니까 괜히 더 불안한데 차라리 화를 내 주라. 나는, 그게, 걱정이 되어서 그랬어. 내 남자의 감이 처음부터 이 자식은 조심해야 된다고 나한테 신호를⋯⋯ 그래서, 진짜 미안해." 해질녘의 평화로움 다가오는 밤의 안정감으로 가슴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씩 웃었다. "화 안 났어. 낮에는 나도 당혹스러워서 쬐끔 화날 뻔했는데⋯⋯ 그런 인간, 더는 생각하기도 싫어. 어휴." 이타도리가 가까이 와서 내 안색을 살폈다. 결국 씰룩거리는 입 꼬리를 봤다. 그가 안심한 얼굴로 말했다. "후시구로랑 쿠기사키가 왔을 때는 놀랐어. 나 자신한테도 놀랐고. 그거 누구 아이디어였어? 스즈카 쌤?" "무시하지 말아 줄래? 나야. 내가 노바라한테 전화해서 부탁했어. 후시구로 군까지 도와줄 줄은 몰랐지만." "나한테 먼저 얘기하지. 갑자기 남자친구 연기를 하라고 해서⋯⋯ 뭐, 그 자식 표정을 보고 나도 좀 즐겼어." "다른 건 몰라도 여자를 가볍게 보는 건 용서 못해. 그래서 마지막에 뒤통수를 확 때려 주고 싶었던 거야." 모처럼 기분 좋으니 울었던 얘기는 안 할 거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서가자 이타도리가 곧바로 따라붙었다. "의외의 면이 있네애." "나는 순진하지 않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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