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이렇게 나와도 괜찮겠니."

 "네. 푹 잤더니 많이 좋아졌어요."

 새벽 내내 병마와 싸우느라 잠을 설쳤다. 아침에는 홀가분히 일어날 수 있길 바랐는데 나이지긴커녕 악화됐다. 결국 오늘은 수업에 들어가지 못했다. 더는 아프지 않지만 이렇게 한 번 앓고 나면 기력이 다해서 후유증이 남는다.

 교정에 노을빛이 쏟아져내렸다. 방과후에도 다른 애들과 트레이닝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고 방에 갇혀 있고 싶지는 않았다. 문득 한기가 느껴져 팔을 쓰다듬었다. 올해 봄도 대부분 침대에서 보냈다. 이 여름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답답하죠."

 "어떨 것 같냐. 나는 이미 인간 때문에 수백 년을 땅에 묻혀 있었어. 답답하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스즈카는 나한테 희망을 줬어요. 그런 당신에게 자유를 돌려주는 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고요."

 "자유라⋯⋯ 주령은 인간의 원념에 의해 태어나고 존재하는 거다. 깊은 원한이나 짙은 미련 따위. 그런 내게는 세상 자체가 감옥이고 너희 인간들이 족쇄나 다름없다. 아무리 도망쳐도, 숨어도, 어차피 나는 여기서 벗어날 수 없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결말은 아무도 몰라요. 지금부터라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잖아요."

 스즈카를 만나고 생각해 봤다. 그녀를 이 세상에 묶어 둔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생전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어쩌다 저주받았는지도. 그녀는 인간들을 그릇으로 삼아 왔다. 스쿠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우연이나 사고가 아니라는 것. 스스로 그릇을 고를 수 있다. 그러나 스즈카에게도 제약은 있다. 첫째, 그녀는 어떤 경우에라도 그릇이 될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둘째, 아무나 저주를 담는 그릇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 중 대전제라 할 수 있는 것이 어둠이다. 그날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스즈카가 강생할 수 있었던 것도 내가 어둠을 품었기 때문이다. 고통으로 시작해 고통으로 끝나는 것. 하나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쩌면 그녀와 내가 같은 어둠을 품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를 믿어요. 저는 끝까지 스즈카의 행복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 계약, 아니, 약속했잖아요. 헤헤헤."

 "시간이 없어. 너도. 나도. 그렇게 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자랑스레 여기는 버릇은 갖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나는 희생이라는 말에 회의적이다. 같은 어둠이라면.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면. 우리는 다르지 않다. 하나의 원인. 하나의 결말. 동시에 자유로워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내 희망사항에 불과하지만 고민하는 걸 그만둘 수는 없다.

 "무리하지 마라, 꼬맹아. 내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해서 너를 원망하진 않을 것이야."

 "스즈카는 해도 돼요. 원망해야 돼요. 그럴 자격 있잖아요. 나한테 희망을 줬으니까."

 "너의 희망, 너의 절망. 모두 원래 너의 것이었다. 나조차 그 둘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른들은 이래서 문제야. 왜 해 보기도 전에 안 된다고 하지. 왜 겁부터 내지. 왜, 왜.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반드시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한다면 차라리 전부 잃을 각오를 하자고. 스즈카는 분명 무모하다고 하겠지.

 "네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게 뭐냐."

 "네?"

 "죽음이냐, 아니면 무의미한 삶이냐."

 "죽는 건, 아픈 건, 살아 있는 게 더 고통이라면 아무렇지도 않아요. 저는 엄청 후회했어요. 아직 해 보고 싶은 일이 많은데. 이대로 끝낼 수는 없는데. 여기까지라도 좋으니까 아프기 전으로 돌아가서 다시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들은 너의 목소리도 그러했다."

 어렸을 때는 당연히 나도 내가 건강할 줄만 알았다. 고등학생이 되기도 전에 시한부 삶을 살게 된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해 본 적 없었다. 죽음 앞에서 휘몰아치던 감정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닌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시간들에 대한 후회. 미련이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었다 해도, 우울했다 해도, 의미만 있었다면 나는 겁나지 않는다.

 "똑똑히 봐라. 너는 이미 선택한 거다."

 스즈카의 말을 듣고 운동장을 돌아봤다. 나를 제외한 1 학년들이 신체 단련을 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이타도리가 스트레칭하는 후시구로의 뒤로 몰래 다가가서 그의 허리를 무릎으로 꾹 눌렀다. 후시구로의 비명이 들렸다. 이타도리는 도망치고 후시구로는 그를 쫓아가며 노바라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보고 있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에는 '의외로 진지한 면이 있네'라는 생각에 놀랐는데 지금은 '의외로 장난꾸러기네'라는 생각에 종종 놀라기도 한다. 문득 뺨에서 스즈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무슨 얘기 하고 있었지. 나는 왜 이렇게 한 사람만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거지.

 "부정해도 소용없어, 애송이. 너와 내게 비밀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 하소연이라도 들어 줄 테니 말해 봐라."

 스즈카의 말이 귀에 아른거렸다. 놓치지 말라는 게 그런 뜻이었다니. 얼굴이 주체할 수 없이 확 달아올랐다.

 "저, 저, 저는 부정하는 게 아니라! 생각해 본 적은 있는데요! 아직은, 좀 더, 많이, 생각해 봐야 할 거 같아요!"

 이타도리가 좋아하는 애는 행복할 거 같다. 부럽다. 생각해 본 적 있다. 하지만 그 정도 생각은 영화 볼 때도 책 읽을 때도 하는데. 이건 영화도 소설도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제서야 진정한 무게가 느껴졌다.

 "저기 오는군. 그럼 나는 이만."

 "예? 예에? 스즈카? 잠깐만요!"

 스즈카 때문에 교실 밖으로 쫓겨났을 때도 복도를 청소했을 때도 그녀를 탓하지 않은 나였지만 이번 만큼은 너무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내빼는 건 빠르다. 그녀는 진작 알아차렸을지도 몰라도, 나는 지금 알몸과 다를 바 없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자신의 감정을 숨길 자신이 없다. 그대로 혼자 쏙 들어가 버리면 어떡하냐고요.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을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며칠은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은 고작 1분. 1분도 안 걸렸다. 오늘따라 그의 다리가 원망스러웠다. 왜 이렇게 빠르냐고 진짜. 그가 바람처럼 날아와 내 옆에 앉았다.

 "안녕, 이타도리 군. 무슨 일이야? 갑자기⋯⋯."

 "나를 보고 있길래, 나한테 할 얘기가 있나 해서."

 "이, 있긴 한데. 지금 말고. 나중에 얘기할게."

 "그래. 몸은 좀 어때? 내일은 나올 수 있겠어?"

 "어⋯⋯ 어⋯⋯."

 쓰르라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빨갛게 타오르는 태양의 열기가 느껴졌다. 짙은 활력의 냄새가 났다. 더웠다. 뜨거운 여름이었다. 여름이 내 가슴에 스며들었다. 언제나 시작은 따스한 봄 같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름이라 더 강렬했다. 이타도리가 내 이마에 손을 올린 것만으로 심장이 달싹쿵했다. 목소리도 왠지 귓전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야, 너 아직 뜨거워. 밖에 나오면 안 되지 않아?"

 "아니야, 열은 다 내렸어. 그냥 조금 부끄러워서."

 "그렇네. 미안. 무리하지 말고 들어가. 업어 줄까?"

 "괜찮아. 바람 좀 쐬고 들어갈게. 트레이닝 힘 내!"

 이런 무방비 상태에서 들킬 수는 없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

 나는 두 손을 꽉 쥐었다. 이타도리가 조용히 웃으며 일어났다.

 "이타도리 씨."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다. 이참에 조금 용기를 내 볼까.

 운동장으로 돌아가려던 그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향해 돌아섰다.

 "나는요! 말할 수 있을 것 같⋯⋯ 아무래도! 말해야 될 거 같아요!"

 나는 겨우 말을 이었다.

 "나한테 물어봤잖아요. 이타도리 씨에게 비밀을 얘기할 수 있냐고."

 이타도리는 잠시 돌이켜보듯이 눈을 돌렸다. 무덤덤한 얼굴. 그가 벤치로 돌아와서 앉더니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씨. 다른 건 제쳐 두고 나한테 말해야만 하는 비밀이 있는 거죠."

 "네."

 "저기, 비밀이 여러 개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 중에 하나는 벌써 들킨 거 같아요."

 "네애?!"

 "내가 먼저 알게 됐어요. 도저히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라서 의심해 본 적도 없어요."

 머릿속에 비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뒤덮고 번개가 내리쳤다. 우르르쾅쾅. 갑작스러운 기후변화로 인해 완전히 마비되었다. 사고 정지. 이건 꿈이야. 마음의 소리가 쓸쓸하게 울려 퍼졌다. 산소가 사라지고, 중력이 사라지고, 결국 말라 죽었다. 낙엽처럼 흔들흔들 떨어져 장렬히 전사했다. 아니라고 해 줬으면. 이번만큼은 게으른 거짓말쟁이가 되어도 좋다. 그래, 제일 좋아하는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해도 상관없어. 부정 좀 해 줘.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구름 위로 떠올라 심판대에 섰다.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했다. 그래요! 좋아해요! 뭐가 나빠! 나는 부끄럽지 않은걸!

 진심을 담아 외치고는 구름 아래로 추락했다. 나만의 천사가 받아 줬다. 그에게 안기자 몸도 마음도 가벼워서 상상이지만 깨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선명한 감각에 정신차렸다. 이타도리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이타도리 씨는 아직 나한테 아무 말도 못 들은 거예요!"

 자신의 얼굴, 눈을 보도록. 이타도리는 내 얼굴을 듬직한 손으로 감쌌다. 안심시키는 것이 분명히 느껴졌다. 숨이 차오르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심장을 움켜쥔 채 몰아붙이고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일단, 나를 봐. 내 말은. 씨가 알고 내가 아니까.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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