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를 본격적으로 즐기길 원한다면 모를까 점심을 먹은 뒤 잠깐 걷는 산책길이라면 굳이 학교 밖에서 찾지 않아도 된다. 산으로 둘러싸인 이 학교는 녹음을 비롯해 고된 심신을 정화하는 듯한 자연물이 곳곳에 널렸기 때문이다.

 서로 닮은 것들의 어울림도 어찌 보면 자연의 이치이기에 걸음이 빠른 편인 이타도리와 나는 대부분 나란히 걷는다. 후시구로도 느린 편은 아니지만 네 명이 모였을 때는 노바라가 뒤쳐지지 않도록 그녀에게 맞춰 주고는 한다.

 춘곤증이 가시지 않은 노바라는 저 나름 잠을 쫓아 보려 한 것인지 이따금 다른 아이들의 대화에 끼어들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더구나 여름이 고개를 내밀면서 점점 감사나워지는 더위 때문에 점심을 먹고 나올 때쯤에는 조금 후덥지근했다. 끝내 외투를 벗어 허리에 둘러맨 그녀가 앞에서 걷고 있던 이타도리와 나를 향해 두덜거렸다.

 "야, 지름길 없냐. 이제 들어가고 싶은데."

 시내에서 걸어 온 시간만 따져도 족히 반시간은 된다. 숙제며 자습이며 아이들의 시간도 그리 넉넉하지 않다. 하루 중 얼마 되지도 않는 휴식 시간에 이처럼 불평한다 해서 게으르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매일같이 걷는 내가 또래 중에서는 조금 별난 것인데 한 번 시작하면 한 시간쯤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런 내게 종종 어울리는 이타도리도 이 정도로 지친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노바라를 돌아보며 놀리듯이 재잘거렸다.

 "그렇게 걷는 거 싫어하면 나중에 배 나와."

 뭐야, 하고 분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말문이 막힌다. 목 아래로 전부 근육인 남자애를 입다물게 하려면 좀 더 그럴싸한 변명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반박할 수 없다 한들 가만히 듣고 있을 노바라가 아니다. 이런 그녀가 욱 하기 전에 마지못해 끼어들어 말리는 아이가 후시구로다. 귀찮아도 이타도리를 감싸고 그러면서 노바라의 편을 들어 준다.

 "산책이 네 건강에도 좋을 거란 뜻이야."

 "흥. 말 안 해도 알아. 가면 되잖아, 가면."

 고전이다 보니 아무래도 낡은 건물이 많다. 수 세기의 세월을 견뎌냈을 법한 기둥까지 더러 보인다. 현대식에 가까운 건물도 물론 없지는 않다. 그런 건물이 세워진 곳은 광장과도 같이 넓어서 돌을 깔아 놓았지만 거기서 외곽으로 조금 빠져나오면 흙길이다. 울울창창하게 뻗은 나무가 시야를 가려 조심하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다. 수풀 우거진 샛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이타도리의 팔이 내 앞으로 훅 다가오더니 뒤따르는 둘까지 멈춰세웠다.

 "위험해라. 하마터면 구를 뻔했어."

 낭떨어지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한 경사였다. 그러나 자칫 모르고 발을 디뎠다면 그의 말대로 저 아래까지 굴렀을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 번듯이 언덕이 있음에도 이타도리 말고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비가 내리면서 지반이 내려앉아 거실 크기 만한 구덩이를 만든 것인데 봄바람을 머금은 잡초가 아무리 푹신하게 깔렸어도 생각하면 아찔했다.

 "길 막혔냐? 그런 건 빨랑 말하고 유턴 해. 답답하긴."

 "뭐라고 말해도 이런 길은 가지 않을 거야. 바보 같아."

 앞으로 계속 가려면 구덩이를 뛰어넘거나 가로질러야 한다. 돌아간다는 선택지도 없다. 이렇게 파악을 끝낸 노바라가 돌아서자 후시구로도 묵묵히 뒤따랐다. 이타도리는 낭떠러지를 살피며 어깨 너머로 그들에게 말했다.

 "이 정도는 그냥 뛰어내려도 되지 않아?"

 "진짜 바보냐고! 여자애들도 있는데⋯⋯."

 "여자애처럼 구는 건 너고. 우린 괜찮아."

 "맞아! 나 자신 있어. 해 보자 이타도리 군."

 "과연 체조 선수! 격이 다르다는 걸 보여 줘!"

 "좋아!"

 다른 두 사람이 할말을 잃은 채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이타도리가 먼저 뛰어내렸다. 여기저기 미리 봐 둔 곳을 사뿐사뿐 밟으면서 내려가면 다섯 걸음 안에 무사히 착지다. 체조 선수인 내가 보기에도 흠잡을 구석이라고는 없는 완벽한 동작이었다. 나는 이타도리에게 아낌 없이 박수를 보낸 뒤 바로 준비 자세를 취했다.

 " 차례. 얼른 와."

 "네애. 갑니다. 헉."

 "어어."

 "꺄!"

 내가 계속 주의를 주어도 스즈카는 이따금 깜빡하고 속바지를 입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를 탓할 수만은 없는 것이 나도 그 사실을 뛰어내린 다음에야 떠올렸다. 근성 있는 몸은 치맛자락을 끌어내리며 꿋꿋이 도약했지만 이타도리가 무언가 이상함을 알아채고 재빨리 받아 주지 않았다면 뼈에 금이 갔거나 최소한 발목을 삐었을 것이다.

 "휴, 세이프. 다음부터는 팬티 조심해."

 "헤헤헤. 착지했어. 그치만 빵점이네애."

 "아니야. 여긴 매트도 없잖아. 만점 줄게."

 "아자! 해냈다!"

 나는 언덕 위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래쪽에서 보니 더 만만했지만 노바라는 곤란한 표정이었다.

 "저것들이⋯⋯."

 "참아, 쿠기사키."

 "나도 지금은 좀 그런데⋯⋯ 겁나 높아!"

 "기다려. 너랑 나까지 뛰어내릴 필요 없어."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했더니 새의 형상을 띤 주령이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얘긴 들었어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라 입을 헤 벌린 채 바라보았다. 후시구로의 식신으로 이름은 누에고 사람쯤은 거뜬히 나른다.

 "야, 어디서 멋있는 척이야? 좋은 말로 할 때 이 팔 치워!"

 "위험하니까, 좀, 너도 여자애라면 팬티 안 보이게 조심해!"

 후시구로가 누에의 발을 잡고 노바라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노바라는 울상이 됐지만 딴은 우리한테서 못 볼 꼴을 본 데다 그 까짓것 무슨 대수냐 싶은 얼굴로 후시구로의 목을 척척 끌어안고 매달렸다. 그렇게 허벙저벙 언덕을 내려왔다.

 "거기 둘, 때와 장소를 가려서 꽁냥거려라! 어? 적당히 하라고!"

 "딱히⋯⋯ 평소처럼 하고 있는 것뿐이야. 같이 산책 자주 하거든."

 나는 속으로 노바라에게 미안해하면서도 실쭉샐쭉했다. 후시구로는 잘 모르겠지만 노바라는 애써 화난 얼굴로 민망함을 감추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털털한 모습을 생각하니 더 웃음이 나고 어쩐지 조금 설레는 것 같았다.

 "다음에는 다른 길로 가자. 그래도 후시구로 군이랑 노바라가 내려오는 모습은 또 보고 싶네애."

 "맞아. 너희 둘이야말로 내 얼굴이 다 뜨거워지던데. 뭐라고 해야 하나, 지브리의 한 장면 같았지."

 "윽⋯⋯ 후시구로!"

 "헉! 왜 나한테 그래?"

 재재바르게 떠들썩한 가운데 이타도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까지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고 능청스럽게 웃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삼 얼굴이 뜨거워졌다. 노바라와 후시구로가 계속 티격댔지만 어느새부터인가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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