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과후 교실이 몹시 조용했다. 넷이나 모이면 어수선해질 수밖에 없지만 둘이 빠졌다. 더구나 남은 둘이 나와 후시구로다. 대화라고는 몇 마디 주고받은 게 전부.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남았다. 정막이 흐르는 가운데 샤프 끄적이는 소리와 문제집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나는 감연히 펜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후시구로 군, 나랑 얘기 좀 하지 않을래?" "⋯⋯."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잠깐이면 되니까." 나는 어쩐지 그가 어려웠다. 원래 조용하고 잘 웃지 않는 편인 것을 알지만 이렇게 이타도리나 노바라가 없을 때는 새삼 어색함을 느끼기도 한다. 후시구로가 딱히 나를 의식하지 않는다 해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모처럼 집중하는데 방해한 걸까. 문득 한숨 소리가 들렸다. 마찬가지로 펜을 놓은 그가 문제집을 덮고 돌아앉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뭐야?" 이타도리나 노바라였다면 그들의 털털하게 웃는 얼굴로 부담도 덜했을 것이다. 그렇게 명랑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있으니 후시구로처럼 차분한 성격은 상대적으로 차가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의 눈빛과 말투가 정말 차갑게 느껴져서 내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부정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타도리 군과 노바라가 갑자기 좀 서먹해진 거 같아. 후시구로 군은 아는 거 없어?" "좋든 싫든 우리는 언제나 지켜보고 있잖아. 당연히 내가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아." "그럼⋯⋯." "반대로 나는 왜 네가 아무런 짐작도 못하고 있는지 궁금해." "미안해. 멍청해서⋯⋯." "맞아. 멍청해. 그러니 너를 탓해 봤자지. 근데 이건 알아 둬. 늘상 주변에 기대면서 자각이 없는 너. 민폐야." "만회할게. 그럴 수 있게 도와⋯⋯." "잘 들어, . 나는 이타도리랑 달라. 쿠기사키랑도 다르고. 네 문제에 나를 끌어들이지 마. 솔직히 관심 없어. 네가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건 나도 아는데. 모든 사람들이 너의 불행을 이해해줄 거라 생각한다면 착각이거든." "후시구로 군⋯⋯." "그것 때문이야. 네가 그런 눈으로 보니까. 너를 볼 때마다 책임감을 느끼게 하니까. 그래, 무언가를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겠지. 아무한테도 강요한 적 없겠지. 하지만 그게 강요야. 너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한다는 뜻이야." "⋯⋯." "자신 없으면 포기해. 너를 그냥 내버려 두라 말하란 말이야. 당연히 너는 잃고 싶지 않겠지만 결국 상처받는 건 너야." 후시구로는 기다려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두커니 선 내게 조금도 연연하지 않고 묵묵히 문제집을 펼쳤다. "나⋯⋯ 너한테만은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어. 처음부터 줄곧." "거짓말은 하지 않을게. 나는 상냥하지 않아서 바보처럼 순수한 네가 싫어." 그는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기숙사로 돌아왔다. 서랍을 뒤지다가 넘어졌다. 무릎에 파란 멍이 들 것 같다. 그냥 바닥에 주저앉았다. 심박수가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은 할일이 없다. 멍하니 눈물만 뚝뚝 흘렸다. 스즈카가 그런 내게 말했다. "메구미는 네 사정을 잘 모른다. 제 딴에는 너를 생각해서 그런 것이니⋯⋯." "알아요. 처음부터 어색하긴 했어도 미워한 적은 없었어요. 좋은 남자애예요." 아마도 후시구로는 내 사정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과거에 이미 완치됐고 현재는 몸이 좀 약할 뿐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고. 그의 잘못이 아니다. 내가 숨긴 거니까. 다른 두 사람에게도 숨겼다면 지금과 달랐을까. 적어도 후시구로에게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차가웠던 그를 이해할 수 있어서. "되게 오랜만이에요. 차갑게 말하지만 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보지 않는 사람." "뭐, 하나 같이 맞는 말이긴 해. 알아줄 사람도 없는데 질질 짜 봤자 너만 힘들어." "스즈카도 좋은 어른은 못 되네요. 그게 어른으로서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에요?" "어른이라고 별 수 있냐? 내 말은, 누구나 살면서 시행착오를 겪는다. 움츠러들지 말거라." 병원에 갇혀 지내는 동안 나는 성장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면 달라질 줄 알았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정체된 삶에 익숙해져 있었다. 어쩌면 끝까지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발이 아파도, 곪아 터져도, 계속 나아간다. 누군가를 위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싫어도 나를 앞서가야 하는 이들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를 일으켜 달라고, 같이 데려가 달라고, 손을 뻗은 채 기다리기만 했다. 그동안 나를 모른 척했던 사람들, 도중에 손을 놓아 버린 사람들, 아무도 나쁘지 않다. 그들은 내가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이 앞은 더 험난한 길로 이어져 있다는 것. '.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어떤 사람은 그런 네 말을 듣고 부담을 느낄 수도 있어.' '솔직히 나도 마찬가지야. 왜냐면 내가 원하지 않아도 가끔 생각하게 되거든. 불쌍하다고.' 내게는 뒷모습만 보였다. 사람들이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얼마나 상처입었는지, 정작 중요한 그들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관계를 친구라 말하지는 않는다. 누구도 나 때문에 정체되어서는 안 된다. 방황하거나 다치는 일은 더욱 없어야 한다. 그래야만 나도 괴로워하지 않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녁이 됐다. 밖으로 나왔다. 방에서 나오기 전 이타도리와 짧은 메시지를 나누었다. 바람을 쐬고 싶은데 잠깐 나오지 않겠냐고 물어보았다. 이타도리는 별 말 없이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노을빛으로 물든 벤치에 그가 앉아 있었다. "이타도리 군, 안녕. 무슨 생각 하고 있어?" "안녕. 나 그냥⋯⋯ 얼굴이 왜 그래? 울었어?" "으응. 조금⋯⋯ 이제 괜찮아. 걱정 마. 헤헤헤." "혹시 후시구로야? 걔도 표정이 안 좋던데⋯⋯." 이타도리의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역시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아까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말하더니 돌아가서는 자기도 마음이 불편했던 건가. 표정 관리가 안 될 정도로. 무뚝뚝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부드러운 면도 있다. 내가 봤던 표정과 말투를 떠올리면 좋은 의미로 가슴이 꾹 조였다. 뒤에서는 더 솔직하구나. 귀여운 구석도 있네. "너네 싸운 거지? 왜? 걔가 너한테 뭐라고⋯⋯." "그러는 이타도리 군은 왜 노바라랑 싸웠어?" 나와 후시구로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싸운 적도 없거니와 그에게는 오히려 감사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쪽에 대한 것은 과감히 제쳐 두기로 했다. 이쪽은 원래 어색한 사이였으니까 그렇다 치자. 이타도리와 노바라는 솔직히 질투가 날 정도로 상성이 잘 맞는다. 가끔 투닥거리긴 하지만 내 눈에는 두 사람의 그런 모습이 오히려 다정해 보였다. 서먹한 모습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평소와 조금 다르게 장난을 치고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노바라는 이타도리에게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 때문이지?" "뭐야, 갑자기⋯⋯ 후시구로가 너 때문이래?" "웃는 얼굴로 대충 넘어가려 하지 말고 대답해." "이미 사과했고 다 끝난 일이야. 그냥 잊어버려." "끝나지 않았거든. 나는 알고 싶어. 이타도리 군." 이타도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지하게 묻는 내가 되려 우스워 보이는 것처럼. 그는 천연스럽게 자신의 빨간 후드 안에 손을 넣고 어깨를 주무르면서 말했다. "내가 잘못한 거야." "들어 보고 판단할게. 나한테도 생각할 기회는 줘야지." "쿠기사키 말이 맞아. 내 생각이 짧았고, 반성하고 있어." "이타도리 씨, 이렇게 피할 거예요? 왜 싸웠냐고 묻잖아요!" 이타도리의 눈이 커다래졌다.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도 물러날 수 없다. 눈을 치켜뜨고 그를 노려봤다. "정말 답답하네! 빨리 말하라구요! 노바라가 뭐라고 했어요!" "⋯⋯." 부름이 잘 들리지 않고 입술 사이에서 맴돈다. 지금까지 수동적인 나만 봤기 때문에 그에게 의외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사실 내가 봐도 그렇다. 자신의 단호함은 그다지 효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타도리는 못 이긴 척 시뜻하게 대답했다. "쿠기사키가 씨한테 잘해 주지 말래요." "이유는요? 노바라가 이타도리 씨를 좋아한대요? 그래서 질투난대요? 대답해요!" "그랬으면 뒤통수나 긁적이고 말지 왜 화냈겠어요? 말할게요. 그러니까 무리하지 마." 이타도리의 손이 다가왔다.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그가 손을 거두고 말했다. "쿠기사키가 물어보더라. 너한테 잘해 주는 이유가 뭐냐고. 혹시 동정심 때문이냐고." "⋯⋯." "그래서, '맞다'고 했어. 됐지? 내 가식이 전부 탄로났네. 절교 선언이라도 받아들일게." "⋯⋯."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는 건 역시 그랬구나. 노바라에게 사실을 고백한 뒤로 이따금씩 나는 그녀에게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나를 향한 눈동자에 수심이 담겨 있어 한편으로는 계속 숨길걸 그랬나 후회하기도 했다. 그날 이후 달라진 것은 비단 눈빛만이 아니었다. 사소한 행동이라도 차이가 있음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녀가 나를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대하려고 노력했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잠깐 발을 삐끗한 것만으로 나를 어르신처럼 방까지 부축하려고 했던 건 너무했지만. 그때 일을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딱히 슬프지도 화나지도 않았다. "이타도리 씨는 나한테 거짓말한 적 없어요. 숨긴 적도 없고요. 그러니까 그건 가식이 아니죠." "나는 씨 만큼 솔직하지 않은데요. 과거에도 미래에도 언제든 가식적으로 변할 수 있어요." "나를 동정한다고요? 알고 있었어요. 우리 통화했을 때부터. 괜찮아요. 그럼요. 이해하고 말고요." "이해한다니 고맙네요. 하지만 씨, 바보 아니에요? 거기서는 멋대로 동정한 사람을 탓해야죠." "동정하는 게 어때서요? 이웃끼리 동정하고, 친구끼리 동정하고, 애인끼리, 하물며 부부끼리도 해요." 아차, 이건 좀 너무 갔나. 헤헤헤. 쑥스럽게 웃으며 뒷덜미를 긁적였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동정하는 건 나쁜 게 아니야. 동정하게 만드는 사람이 못난 거지. 그동안 정말 미안했어. 이타도리 군." "⋯⋯." 이타도리도 보기 보다 마음이 약하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뻗었다가 멈칫했다. 이타도리는 정면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를 거부하는 듯했다. 그런 기분은 처음이라 다가갈 수 없었다. "근데 있잖아, 나는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게 정말 싫었어. 나, 지금까지 대체 뭘 한 거지?" "이타도리 군, 그리고 후시구로 군이, 중요한 걸 깨닫게 해 줬어. 내가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것." "무슨 뜻이야?" "이제 나 때문에⋯⋯ 나한테,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야. 더는 친구들에게 걱정끼치지 않을래." "그렇구나. 알겠어. 나도 앞으로 너를 동정한다는 이유로 쓸데없이 애쓰거나, 헷갈리게 하지 않을게." "미안⋯⋯ 아니, 고마워. 솔직히 말하면 별로 자신 없었거든. 덕분에 이제 결심이 섰어. 그럼 내일 보자." 처음부터 나는 그의 상냥함이 좋았다. 고마움을 넘어서 가끔은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부끄러운 얘기이지만 다른 남자애와 사귀게 된다 해도 여전히 그를 더 좋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미처 말하지 못한 내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런데 한없이 기대고픈 마음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던 건 아니다. 내게도 있었다. 귀를 막아서라도 듣고 싶지 않았던 말. 이타도리에게 대놓고 의지하면서도 부담만은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타도리에게 뭘 바랐던 걸까. 늘상 천사처럼 웃고 있는 그가 보고 싶었을 뿐이었나. 어쩌다 한 번 나를 소홀히 해도 실망하고, 어쩌다 한 번 나한테 화를 내도 상처받아서 울고, 그런 밉살스러운 여자애가 되고 싶었나. 어느 쪽도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의 진심도, 터무니없는 바람도. 내 진심을 부끄럽게 만들 뿐인 바람이었다. 더는 고민할 필요 없었다. 그렇잖은가. 동정받기 싫다면 기대지 않으면 된다. 부담 주기 싫다면 바라지 않으면 된다. 너무나도 간단한 문제다. 게다가 나는 이미 골랐다. 그를 만나기 전 다른 선택을 했다.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스즈카." "듣기 싫다." 걷다 보니 네잎클로버를 발견했던 곳이었다. 그새 더 무성해진 클로버와 토끼풀이 군집을 이루었다. 빙 둘러 봤지만 역시나였다. 행운은 쉽게 찾을 수 없다. 행복을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다면 그건 현재에 만족하는 것이다. 스즈카는 열이 올랐다. "너 지금 이러는 거. 실수하는 거다. 나도 주책맞게 끼어들기 싫고 꼬맹이들의 청춘사업에는 끝까지 참견하지 않으려 했다만. 이 멍청한 것아.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저건 진짜야. 어딜 가도 저런 건 못 찾아. 당장 돌아가! 가서 붙잡아!" "이미 엎질러진 물인걸요. 제가 다 책임질게요. 대신 이번에는 절대로 끼어들면 안 돼요. 약속이에요." "안 되겠다. 당분간 들어가 있어라. 바보 같은 짓 못하게 내가⋯⋯ 뭐야, 왜 이래. 네 녀석 언제부터 이런!" "헤헤헤. 깜짝 놀랐어요? 네, 저 이런 것도 할 수 있어요! 제가 문을 꽉 닫아 버리면 스즈카도 못 나오지요!" "이런 건방진! 기다려! 지금 어디에 전화를 걸려는 거냐? 안 돼! 하지 마! 그 버튼을 눌렀다간 용서하지⋯⋯." "잠깐 실례할게요." 찰싹. 스즈카는 나의 무례함에 충격을 받을 만하다. 지금까지 내가 그녀를 막은 적도 과감히 자신의 뺨을 때린 적도 없었으니까. 그녀는 더 이상 나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 정말 손쓸 방법이 없는 걸까. 힘으로 밀어붙이면 솔직히 버틸 자신 없다. 꽤 흥미로운 반응이었다. 그래, 뭐라 말해도 포기할 수 없는 거다. 나를 아주 꼬맹이로만 보고 있지는 않은 건지도. 그녀가 나를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뿌듯하다. 잘 생각했어요. 그래야만 우리가 공평해질 수 있어요. 처음부터 당신이 이어붙인 목숨에 불과했는걸요. 내가 먼저 당신에게 손을 내밀었으니 다 책임질게요. "여보세요. 고죠 쌤, 저예요." 「응, 우리 . 무슨 일이야?」 "저, 저기⋯⋯ 잠깐 봴 수 있을까요?" 「갑자기? 그렇게 중요한 일이니?」 "중요해요. 꼭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요." 「알았어. 그럼 가 이쪽으로 올래?」 "네, 지금 바로 갈게요. 어디 계세요?" 내가 휴게실을 찾아갔을 때 고죠 쌤은 소파에 거의 누운 거나 다름없는 편안한 모습으로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지금도 쌤에 대해서는 뭐라 한마디로 형용할 수가 없다. 평범해 보이면서 어떤 면에서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부터 열까지 믿기 어려울 만큼 굉장하다. 짓궂은 면은 있지만 학생들에게도 언제나 상냥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불량 교사 이미지에다 인성 논란까지 심심찮게 들려와서 피식 웃음을 터뜨리곤 한다. 뭐라고 해야 하나. 신기하다. 표현이 안 되지만 매력 있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스즈카도 그런 쌤을 좋아하는 거겠지. "그동안 두 분을 지켜봤어요. 전부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모른 척했던 것들도 많아요." "." "저, 깨달았어요. 두 분이 서로에게 어떤 마음인지. 스즈카가 모르는 것도 저는 알아요." "아." "저는요, 두 분을 돕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니었어요. 오히려 방해하고 있었죠." 쉬고 있을 때 갑자기 연락해 민망하기도 하고 그와 마주앉으니 긴장이 됐다. 그래도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렇잖아요.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스즈카의 그릇이 제가 아니길 바라신 적 있죠?" "너를 처음 봤던 날. 맞아. 솔직히 바란 적 있어. 가엾다는 생각도 들었고. 근데 지금은⋯⋯." "지금도 분명 마찬가지일 거예요. 10 년 동안 그리워하셨던 거잖아요. 근데 어떻게 기다려요?" "쌤은 10 년이든 100 년이든 기다릴 수 있어. 지금처럼 지내는 것도 너희가 싫다면 그만둘 거야." 선생님의 배려도 배려지만 거리낌 없이 기다리겠다 말하는 그를 보면 가슴이 찡했다. 그럴수록 마음을 단단히 굳혔다. "저도 솔직하게 말할게요. 가끔은 모르겠어요. 쌤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요." 말하지 않아도 선생님은 알겠지만. 직접 듣는 건 역시 견디지 못하고 손에 얼굴을 묻는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저 어린애 아니에요. 제가 스스로 내린 결정이니 끝까지 책임질게요." "못해." "저를 정말 걱정하신다면, 생각하신다면, 저한테 못한다거나 안 된다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만." 나는 쌤을 보지 않았다. 각설탕을 가득 넣은 커피가 손도 대지 않은 채로 차갑게 식어 있었다. "너한테는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이건 선생님이 바라는 것도, 그녀가 바라는 것도 물론 아니야." 여자 마음은 여자가 더 잘 알거든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쌤을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두 손을 꽉 쥐며 외쳤다. "스즈카는 진짜예요! 그런 건 어딜 가도 못 찾아요! 그러니까 가요! 아니, 가지는 말고 붙잡아요! 안 그러면 어⋯⋯ 정말 남자도 아니에요! 선생님! 저랑 약속해 주세요! 앞으로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겠다고! 포기하지 않겠다고요!" 박력 있게 말하다 보니 머리가 튀어나갔다. 쌤도 당황했는지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냅다 손을 잡았다. "부탁이에요! 제가 두 분의 행복을 책임질게요! 그게 제 의무예요!" 쌤에게 어떻게 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스스로 만족했다. 좋아, 이만하면 됐어. 이것으로 쌤도 내 진심을 알아 주시겠지. "흑⋯⋯." 문득 그의 입에서 비탄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예상 밖이라 조금 놀라긴 했지만 제대로 전해졌다는 생각에 내 마음도 뭉클했다. 어떡하지. 나도 울 것 같아. 만감이 교차하고 있을 때 쌤의 손이 다가왔다. 칭찬받을 줄 알고 경계하지 않았는데. "으이그! 말이나 못하면!" "아야야! 고죠 쌤! 아파요!" "이래 놓고 집에 가서 펑펑 울 거지? 응?" "아야! 아야! 아파요! 아파요! 선생니이임!" 쭈욱 쭉 내 뺨이 찹살떡처럼 늘어났다.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아팠다. 손가락의 크기도 힘도 내게는 몬스터나 마찬가지였다. "스즈카 도와줘요!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꼬맹이 주제에 건방져. 더 꼬집어라, 고죠." 어째서! 스즈카도 내심 바라고 있었던 게⋯⋯ 생각하기 무섭게 힘이 꽉 들어갔다. 그래봤자 나는 꼬맹이일 뿐. 아픈 만큼 서러웠다. "속상해 죽겠네! 너어! 쌤 울리는 거 아냐!" "죄송흐애요오! 울디 마헤요오오! 흐애애앵!" 이 이야기는 다음날 조례에서 일단락지어진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펜을 들었다. 스즈카를 만나고 시작된 두 번째 삶. 그때부터 조금씩 채워 나가고 있는 내 일기장에 눈물로 얼룩진 청춘의 한 구절이 새겨졌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이타도리, 후시구로, 노바라는 고죠 쌤에게 사이좋게 꿀밤을 맞았다. 그리고 나는 남자친구가 생겼다. 지금 나의 이야기를 기쁘게 써내려 가고 있다. 남은 챕터에서도 울고 웃겠지만 이번 챕터는 해피 엔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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