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지루하다. 무탈한 하루하루를 보낼 때마다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평화가 좋아도 최소한의 자극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뭘 해도 마른 우물을 긷는 것과 같으니까.
꼬맹이들 앞에서는 차마 불평하지 못했다. 는 지금 자신의 삶에서 그 어느 때보다 좋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하호호 웃음소리가 들리면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괜히 끼어들어 분위기를 흐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누가 먼저 찾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너무 지루할 때는 말없이 뺨으로 나오기도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려서 그녀도 그런 나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지금은 유지와 신나게 떠들고 있어서 내가 뺨에 나와 있다는 걸 아예 모르는 듯하다. 노바라를 제외한 세 명이 나란히 걷는 중이다. 를 기준으로 왼쪽에는 메구미 오른쪽에는 유지가 있다. 오늘도 유지와 사이가 좋아서 방해되지 않도록 왼쪽으로 나왔다. 메구야, 메구야, 뭐라도 해 봐. 나를 위해서라도. 일부러 소리가 나지 않게 입술을 모으거나 혓바닥을 내밀거나 했다. 언제 알아채나 보자. 윗입술 아랫입술을 부딪혀 맑은 소리를 냈다. 결국 녀석이 돌아봤지만 얼굴을 가지고 노는 아이처럼 개의치 않고 계속했다. 뽀뽀. 메롱. 기가 찬다는 표정이었다가, 비웃는 듯한 눈빛이었다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녀석의 손이 내게 다가왔다. 잡히기 전에 쏙 들어왔다. 아무 일도 없는 척. 눈이 마주친 메구미가 멋쩍은 듯 손을 거두었다. "후시구로 군? 왜?" "아, 아무것도 아냐." 낄낄낄. 주술사 놈들이 작정하고 죽이려 들지 않는 이상 나는 10대의 여자애라는 훌륭한 인질을 잡고 있는 셈이다. 그래 봤자 인간, 꼬맹이 주제에, 내가 조금 약올렸다고 나를 어찌 할 수 있단 말인가. 아이고 재밌다, 재밌어. "제자들! 이쪽이야, 이쪽." "고죠 쌤? 무슨 일 있어요?" 교사라는 놈이 변함없이 경망스럽구만. 고전에서 저런 텐션을 가진 놈은 녀석이 거의 유일하다 보니 목소리만 들어도 다 안다. 아이들이 다가가자 녀석은 상당히 묵직해 보이는 서류를 반으로 나누어 유지와 메구미에게 주었다. "자, 받아. 유지 꺼. 메구미 꺼." "하⋯⋯ 어쩐지 올해는 조용히 넘어간다 했습니다." "응? 헉! 우와⋯⋯ 이게 다 뭐예요? 엄청나게 많네요." "갑자기 미안한데 일손이 부족해. 작은 문제들을 처리하고 오렴. 노바라는 이미 출발했어." 메구미는 익숙한 듯하고 유지와 는 호기심을 보이며 고죠에게 받은 서류를 펼쳐 봤다. "매일 같은 시간에 말없이 집을 나갔다 돌아오는 아이. 벌써 세 번째 자동차 증발. 이것들도 저희가 하는 일과 관련이 있는 거예요?"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신문 스크랩에 미스테리 5월호. 점점 가관이네. 간단히 말해 헛수고만 하고 돌아올 가능성 90% 이상이야." 유지의 질문에 메구미가 고죠 대신 대답했다. 귀찮아도 중요한 일이다. 고전은 평범한 학교가 아니고 교육 그 이상의 목적으로 주술사들이 지금까지 지켜 온 곳이다. 대소사를 따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정보를 모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뭐,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는 얘기다. 굳이 말하자면 고전에서 가지고 있는 신상 정보를 조금 얻고 싶긴 하다. 예를 들어 나로서는 주력을 타고난 인간들이 어디에 숨어 살고 있는지만 알아 두어도 새 그릇이 필요할 때의 고통을 크게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사소한 것도 아니고 그런 중요한 정보를 고죠가 내게 선뜻 내어 줄 리 없잖은가. "하하하. 착하지, 착하지. 모두 곤란해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힘내자. 시시할지도 모르지만 빈틈 없이 말끔히 처리해야 한다. 오늘 안에." "오늘 안에요? 가능해요? 아니 뭐⋯⋯ 다들 곤란하다니까 저희도 최선을 다하겠지만요. 아무리 그래도 후시구로랑 저 둘만으로 될까요?" "돼요, 돼요. 무조건 돼요. 그리고 이참에 선생님이 한테 첫 임무를 줄게. 그냥 옆에서 도와주기만 하렴. 절대로 무리하지 않는다. O.K?" 하여간 웃는 낯짝으로 좀처럼 봐주는 법이 없다. 그래도 걱정하는 게 의외다. 스스로 교사의 길을 택하고 뒤쳐지는 녀석은 필요없다 말하는 뻔뻔한 놈이 얼굴에 미소 아닌 철판을 깔아도 아픈 손가락 하나쯤은 있다는 건가. "근데요 보스⋯⋯ 아니, 선생님. 질문 있습니다!" "아휴, 바쁘다 바빠. 그래 양. 질문이 뭔가?" "저는 누구를 도와야 하나요? 그러니까 이타도리 군과 후시구로 군 둘 중에요." "⋯⋯그렇지 참. 흐음. 어느 쪽인지 모르겠지만 가 좋아하는 사람과 가렴." "네⋯⋯ 네?" 저, 저. 주책바가지 담탱이. 어렸을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능구렁이지만 쇼코나 나나미와 달리 아직 애 같은 면이 있고 장난기도 여전하다. 그렇잖아도 간이 콩알 만한 계집애를 넋이 나갈 정도로 놀래켜 놓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그렇게 그냥 가시면⋯⋯." "하하하. 나랑 가자, ." "꺅!" 위험해라. 유지 놈, 제 스승과 협심해서 나를 죽일 셈인가. 한 번 놀랄 때마다 숨이 멎을 것 같다. 아픈 것조차 잊은 듯하지만 이러다 정말 죽겠다. "뭘 그렇게 놀라. 엣, 얼음 됐어." "말 조심해야지. 심장 아프겠다." "미안⋯⋯." 메구미는 사정을 몰라도 유지는 알고 있으니 메구미가 그저 내뱉은 말에 정말 자책하는 얼굴이다. 일부러냐고 나중에 따질까 했는데 귀여워서 봐줬다. "고죠 쌤 말은 무시하고 우리끼리 대화해 보자. 그녀가 절실한 건 나도 마찬가지야." "야, 너야말로 말하는 거 이상해. 더 얘기할 것도 없이 항상 내 옆에 있잖아." "그건 부정할 수 없으니까 좋아. 내가 불편하면 스즈카 씨와 교대해. 듣고 있어, ?" "쌤으로서는 교대해 봤자 귀찮은 일을 떠맡는 것밖에 안 되는걸. 무리라고 생각해. 그치?" 어쩐지 얘기가 묘하게 흘러간다. 그야 마음 같아서는 도망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을 때도 있다. 나의 든든한 인질은 나를 지켜 주면서 붙잡아 두는 것이기도 하다. 꼼짝 않고 서 있는데 어쩌랴. 메구미도 만만치 않다. "스즈카 씨는 내가 나와 달라고 부탁하면 나와 주실 거다." "무슨 자신감이야. 누가 나를 오라 가라 하냐고 화내시겠지." "내기하자. 내가 이기면 그녀는 나랑 같이 가는 거야. 깔끔하게 인정해라. 어때."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선생님의 약점을 알고 있는 거면 나한테도 가르쳐 주라." "마음대로 떠들어. 스즈카 씨, 듣고 계시죠. 별로 돕지 않으셔도 되니까요. 나와요." 나는 익숙하게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고무줄로 머리를 동여맸다. "헉." 메구미의 체면을 봐서 나온 거다. 그런 척이라도 해야 한다. 유지가 얄쌍한 눈으로 쳐다보는 건 이해한다. "거기 유지 뺨에. 같이 입 벌리고 있는 양반. 아무 말도 하지 마. 소란피우기 싫으니까." 꼬맹이가 하필 저 영감 손가락을 삼켜서 내 체면이 말이 아니다. 과연 질렸는지 스쿠나가 조용히 들어갔다. 이제 보니 메구미도 은근히 즐기는 것 같다. 유지 앞에서 보란듯이 내게 팔을 두르고 나를 데려왔다. 요즈음 메구미는 내게 그런 과감한 접촉을 하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그대로 조금 걷다 이내 겸연쩍은 듯 한걸음 떨어졌다. 넓은 보폭으로. 굳이 말하자면 아까, 처음부터 이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번에는 내가 일부러 바짝 다가붙었다. "너, 하필이면 그런 때 부탁해서⋯⋯ 영감이 속으로 나를 얼마나 비웃겠어!" "영감? 아, 료멘스쿠나 말이죠. 하지만 스즈카 씨가 먼저 신호를 보냈잖아요." 메구미한테 입술을 내밀거나 메롱을 하긴 했지만 그런 게 무슨 신호란 말인가. 그냥 장난친 것뿐인데. 어떻게 보였길래 유지의 시선도 아랑곳 않고 나를 당당히 뺏어 온 건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했던 행동이 갑자기 부끄럽고 메구미가 보였던 반응도 왠지 머리에서 지울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자신의 생각이 오히려 변명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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