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연한 빛이 내리쬐는 거리. 감파른 하늘에 여름새가 날아다니고, 훗훗한 바람이 뺨을 스친다. 조금 푸근한 느낌이 들면서도 두꺼운 외투를 홀가분히 벗어던진 인간들을 보면 거리마저 활연해 보여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그렇게나 넓은 학교도 때로는 공원보다 좁아 보이고, 자신의 방에서 쉴 때조차 음울한 기분이 든다. 그러니 욱욱청청한 사내놈들은 얼마나 답답할까. 메구미를 보면 별다른 목적이 없어도 종종 외출하고 보자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맘때 공원은 신록의 색으로 물들고 분수도 볼 수 있기에 사람의 발길이 더욱 잦아진다. 사방이 트여 있어 바람 쐬기 더할 나위 없는 장소다. 메구미와 공원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다시 거리로 나와 사람 사이를 거닐었다.

 "목이 마르군. 뭐라도 마시면 좋겠는데."

 "그럼 돌아가기 전에 어딘가 들러서 쉬죠."

 메구미가 이끄는 대로 한 카페에 들어왔다. 명소라 불릴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커피와 어울리는 다양한 디저트들로 10년 전쯤부터 조금씩 유명세를 탄 곳이다. 나도 예전에는 이따금씩 들렀다. 다른 카페들처럼 심부름을 하다 알게 곳이지만 딱히 손해는 아니었다. 덕분에 나도 그 전보다 커피를 더 좋아하게 됐으니까.

 "메뉴, 고르기 힘드신가요."

 "아⋯⋯ 흠흠. 잘 모르겠다."

 메구미는 내게 메뉴판 대신 거치대에 놓인 안내 책자를 보게 했다. 원두가 원산지에 따라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고, 쓴 정도·신 정도·무게감으로 커피의 맛을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저는 이걸 추천해요."

 "꽃과 풀, 과일 향이 나는 커피라."

 디저트가 맛있는 집이고 메구미도 있으니 커피와 함께 너무 달지 않은 간식을 주문했다. 단 음식을 좋아하진 않아도 커피에 어울리는 것들이 대부분 스위트라는 점은 부정하지 않는다.

 "이 놈이, 누가 맘대로 계산하래?"

 "스즈카 씨가 점심을 사셨잖아요."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 마라."

 "제가 할말이에요."

 드물게도 창가 자리가 비어서 자리를 잡았다. 현대식 카페는 쇼윈도처럼 한쪽 벽면이 유리로 된 구조가 많다. 테이블에서 창밖의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구경하다 보니 어느덧 커피 한 잔과 케이크 한 접시가 내 앞에 놓여졌다. 심부름하던 시절에는 눈여겨 보지 않았는데 아기자기한 그릇이 귀여웠다. 물론 케이크는 더 보기 좋았다.

 "너는⋯⋯ 싫지 않은가 보구나."

 "뭐가요?"

 "나랑 이렇게 어울려 다니는 거."

 "왜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왜냐니, 쉬는 시간에 내 상대나 하고 있을 바에야 유지나 노바라랑 같이 놀러다니는 게 좋지 않으냐."

 "그럴 수도 있었는데 선수를 치셨네요. 잊으셨습니까. 외출하자고 말을 꺼낸 사람은 당신이었습니다."

 커피는 삼킬 때 신맛이 강하게 나다가 그 뒤에 향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케이크도 조금 달긴 하지만 설탕에 대한 거부감은 크지 않았다. 단팥을 올린 녹차 케이크 같은 친숙한 이름의 메뉴가 보이기에 골랐더니 떡이나 빙수처럼 익숙하면서도 산뜻했다.

 "맛있나요."

 "응, 맛있어."

 케이크가 생각 이상으로 괜찮아서 3초 정도 본론을 잊었다. 게다가 바보같은 표정으로 메구미에게 웃음을 사 버렸다.

 "나중에 스즈카 씨랑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카페."

 쑥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커피 한 모금에 케이크 한입. 메구미와 눈이 마주쳐서 포크를 문 채 씽끗 웃었다.

 메구미에게 나라는 존재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내 제안 따위 거절할 수 있었고 나와의 관계를 떠나 그리 문문히 다룰 수 있는 녀석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메구미는 어째서 내 제안을 거절하지 않는 걸까.

 "알고 있겠지. 너 자신을 생각한다면 나와는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

 "뭐라고 말씀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가르쳐 주세요. 제가 뭐 잘못했나요."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나야. 내용물까지 열 다섯 살의 계집애가 될 수는 없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막상 입 밖에 내고 보니 걱정스러웠다. 메구미는 나 둘 중 하나를 맘대로 고를 수 있다. 예를 들면, 자신에게 편한 쪽을. 메구미뿐 아니라 모두 마찬가지다. 혼란스럽기도 하겠지.

 나는 메구미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아무 말 않고 차를 마셨다. 그러더니 내가 시선을 돌렸을 때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죄송해요."

 "아니⋯⋯."

 "스즈카 씨의 말이 맞아요. 저는 눈앞의 상황에만 열중했을 뿐 솔직히 그 다음의 일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었어요.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아요. 두 분과 넘어져서 먼저 일어날 자신이 없어요."

 따뜻한 생강차는 마음을 안정시킨다. 짙은 쓴맛이 남기고 간 달콤한 여운이 내 마음까지 차분히 가라앉히는 것 같다. 케이크는 어떨까. 어울리는 것을 골랐을까. 차를 마시고 케이크를 입에 넣은 메구미의 표정은 평온했다.

 "뭘 걱정하시는지 알아요. 그리고 안심하세요. 분명, 당신이 걱정할 정도는 아닐 테니까. 앞으로도 주의하겠습니다. 착각하지 않도록. 다만 저에게도 당신을 통해 제가 계속 보고 싶은 모습을 볼 수 있는 자격을 주셨으면 합니다."

 메구미가 최대한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으려 애썼다는 것을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녀석의 말대로, 더 큰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은 나였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메구미가 누굴 원하든, 뭘 보든, 모른 체해 버리면 그만인데도.

 "그⋯⋯ 뭐냐. 한입 먹어도 될까?"

 "네, 스즈카 씨에게라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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