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보이는 유리창은 감파른 색이 되었는데 두 꼬맹이가 좀처럼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메구미와 교실에 남아 자습을 하고 있다. 나는 하릴없이 펜 끄적이는 소리와 문제집 넘기는 소리를 듣고 있을 뿐이다.

 처음에는 메구미를 보면서 지루함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곧 그건 그것대로 답답해졌다. 훈련을 할 때는 그렇게 혈기 넘치는 꼬맹이가 공부할 때는 어쩜 그리 미동도 없이 문제집만 계속 쳐다보는지. 탄복,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들은 저마다의 일에 충실한다. 그에 비해 뭐든지 적당히에 익숙해진 내가 보기에 메구미 정도면 고등학생치고도 부지런하고 끈기 있는 꼬맹이다. 그래서 기특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나로서는 녀석의 생활에 끼어드는 것이 쉽지 않다.

 마음 같아서는 메구미의 문제집을 빼앗은 뒤 그의 팔을 잡고 교실을 나가고 싶다. 밤이 되었으니 가로등 불빛 사이를 산책하는 것도 좋다. 다만, 아무리 나라도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다. 그저 마음속으로 '힘내라'라고 응원하는 수밖에.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가끔 쓸쓸한 기분이 들어서 일부러 메구미에게 장난을 걸거나 그를 화나게 만들기도 한다. 꼬맹이라는 말도 습관적으로 내뱉은 게 아니라 괜히 심술부린 거다. 친구로 여겨 달란 말은 들은 뒤로는 계속 그랬다.

 슬슬 장난이라도 치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 마침 도 꾸벅꾸벅 졸고 있다. 그래, . 너도 지쳤겠지. 이제 나한테 맡기고 쉬어라.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구미의 책상 앞으로 가서 무릎을 구부려 앉고 머리만 위로 쑥 내밀었다.

 "후시구로 군!"

 "왜?"

 메구미는 손에 턱을 괸 채 문제집을 보고 있다가 시선만 위로 올려 나를 봤다. 아까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몰랐는데 미간에 주름이 졌다. 지금 기분이 별로인가. 그래도 모처럼 나왔으니 나는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따라하며 말했다.

 "정말 열심히 하네애."

 "뭐⋯⋯ 다들 그러니까."

 "성적 높잖아. 그게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다는 증거야."

 그릇과 한몸이 되어 살면서 다른 사람 흉내에는 도가 텄다. 같은 꼬맹이는 처음이지만 따라하는 것뿐이라면 어렵지 않다. 보아하니 메구미도 아직 나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면 그냥 지금은 이쪽에 관심이 없거나.

 "열심히 한다고 다 원하는 점수를 받으면 성적 발표하는 날 질질 짜는 놈도 없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겠지. 게으른 사람만 시험을 망치는 건 아니니까. 곧 있으면 또 단원평가인데 그런 얘기 꺼내 봤자 다들 기분 안 좋을걸."

 그래, 너의 말이 맞긴 하다만. 그렇게 딱딱하게 말할 것도 없지 않냐. 속으로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메구미의 내적인 부분도 잘 알지만 이런 부분은 뭐라 두둔할 수가 없다. 노바라야 털털해서 신경 안 쓴다 쳐도 보통 계집애들은 사내놈들에 비해 여리고 겁이 많다. 이러니까 너를 어려워하지. 메구야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그런 부분이 멋있다고 생각해!"

 "⋯⋯."

 이게 아닌데. 메구미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만이 아니다. 이야기를 주고받을수록 서먹해지는 느낌이다. 방향을 엉뚱하게 잡았나. 그야 나도 잘 모른다. 고등학생쯤 된 꼬맹이들이 어떻게 친해는지. 뭔가 잘못됐다.

 "이, 있잖아. 좋아하는 사람 있어?"

 "갑자기? 그런 게 왜 알고 싶어?"

 "전부터 궁금했어. 혹시, 나라든지!"

 "⋯⋯."

 어떡하지. 메구미의 눈에서 한기가 느껴진다. 최근에는 이런 눈빛을 본 적이 없어서 더욱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렇게는 안 되는구나. 그 전에 전혀 고등학생 같지 않았는지도. 이러다 내가 오히려 망칠 것 같다. 어휴, 그만두자.

 "정말 어울려 주질 않네애. 부끄러워라아."

 "미안⋯⋯ 이 문제 못 풀겠어. 머리 아프다."

 "나는 문제 읽어 보고 바로 넘겼어. 헤헤헤."

 "넘기면 안 되지. 나중에 어쩌려고 그래, 너."

 메구미의 목소리가 전보다는 한결 부드럽게 들렸다. 뜻하지 않게 책상만 보고 있던 나는 약간의 희망을 품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내가 불쌍해 보였나. 눈빛도 다정해졌다. 좀 어처구니없어서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거면 됐다.

 "잠깐만 쉬자. 모처럼 지금 우리 둘뿐이잖아."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나도 모르게 메구미의 손을 덥석 잡았다. 평소의 내 성격 대로. 너무 나갔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메구미가 손을 확 뺐다. 메구미도 놀란 것 같다. 표정이 싸늘하게 식는다. 결국 눈썹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싫다⋯⋯ 무서워라아⋯⋯ 미안합니다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갑자기 손을 잡다니. 누가 봐도 친해지려는 노력 이상의 행동이었다. 연기가 재밌고 메구미를 속이는 것도 짜릿해서 무심코. 나중에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미 벌어진 일. 지금은 도망가자.

 "뭐 하세요, 스즈카 씨."

 일어나려는 찰나 메구미가 말했다. 하긴, 들키지 않는 게 이상하다. 어쩐지 마주보기 두려워서 한참 망설이다 고개를 들었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그러나 내게 있어서는 오히려 더 익숙한 메구미가 보였다. 아까처럼 손에 턱을 괴고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도망쳐도 소용없고 뻔뻔하게 나가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보고 있자니 답답해서 좀 도와주려고 했지."

 "풉, 저는 가 뭘 잘못 먹었나 했어요."

 처음에는 내 연기에 깜빡 속았으면서. 어딘가에 작은 실수가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상황이 바뀐다면 그 외에도 여러 가지로 많이 달라질 거다.

 "나도 잘나가던 때가 있었다."

 "네, 있었겠죠. 그럼요. 푸핫!"

 믿지 않는군. 그럴 만하다. 내가 어떤 연기를 했는지와는 관계 없는 일이다. 10대인 척은 할 수 있지만 10대를 꼬시는 건 내게도 무리일 수 있다. 왜냐면, 본래의 나는 성숙한 여자니까. 새파랗게 어린 놈이 내 매력을 알 리 없지.

 "얄미운 놈. 이제야 웃는구나."

 "스즈카 씨가 너무 웃기잖아요."

 그렇게까지는. 한마디 하려다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무릎을 펴고 일어나 책상에 펼쳐진 메구미의 문제집을 봤다. 어떤 문제길래 메구미가 그리 어려워하나 했더니 아직 수업에서 다루지 않은 부분을 미리 공부하고 있는 거였다.

 "너를 못살게 구는 게 그 응용이란 놈이냐."

 "네. 응용 녀석이 내 맘대로 안 돼서 화나요."

 "불쌍한 것. 공부하느라 많이 힘들지. 착하다."

 "하아⋯⋯ 괜찮아요. 웃었더니 조금 나아졌어요."

 지금이라면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선지 평소처럼 다가가지 못하고 손을 거두었다. 아무리 메구미가 내 앞에서는 싫은 티를 내지 않는다지만 그동안 지나치게 거리낌없이 대하긴 했다.

 "내가 한 번 풀어 볼까?"

 "스즈카 씨가요? 해 봐요."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거꾸로도 한번. 문제집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쳐다본들 문제가 풀리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배웠던 것들을 잊어버리지 않기도 벅찬데 아예 처음 보는 문제다 보니 내게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였다.

 "전혀 모르겠다."

 "당연히 모르겠죠."

 무리해서 아는 척해 봤자 메구미는 고죠만큼 나를 잘 알고 있다. 늘 도와주고 있으니까. 그저 쑥스레 웃으며 펜을 돌려줬다. 그리고는 책상에 걸터앉았다가, 다시 일어났다가, 조금 망설이다, 쭈뼛거리며 서서 메구미에게 말했다.

 "손 잡아서 미안."

 "아⋯⋯ 그거요?"

 메구미가 성인이었다면 이런 말은 안 한다. 해 본 적도 없다. 상대가 꼬맹이라도 솔직히 지금까지 별로 신경 안 썼다. 그런데 이제는 손을 잡았을 때 당황하는 표정이나 뿌리치던 것이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 무시할 수가 없다.

 그래도 좀 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는데. 기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하니 꼬맹이에게 정말 죄라도 지은 것 같다. 이래 봬도 메구미의 눈치를 보는 중이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그리고 메구미는 내 손을 보고 또 웃음이 터졌다.

 "미안하긴요. 저도 남자앤데요. 그냥 랑 어색해지는 걸 피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렇게 저한테 아양 아닌 아양을 떨고 어째서 사과하십니까. 덕분에 힘이 됐습니다. 게다가 스즈카 씨.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꽤 귀여웠어요."

 아양떨긴 누가. 할 수만 있다면 때려 줬을 거다. 나처럼 덥석 잡지는 않았지만, 메구미가 그냥 내 손가락 끄트머리를 살짝 잡았을 뿐이지만,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귀엽다는 말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감추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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