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끝나고 교실에 남아 자습을 하다 혼자 남게 됐다. 모르는 게 있어도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오늘은 더 빨리 지쳤다. 책상 아래로 물장구치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뜻밖에 교실 문이 열리며 돌아간 줄 알았던 메구미가 들어왔다.

 "스즈카 씨가 아직 남아 있는 줄 몰랐어요. 어려운 문제 있나요."

 "실은 놀고 있었다. 이 VOD라는 걸 구매하려는데, 잘 모르겠어."

 메구미는 내 뒤로 다가와 무언의 양해를 구하고 화면을 움직였다.

 "애들이랑 방에 모여서 영화 봤던 날 끝까지 보지 못했던 거네요."

 "아무래도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말이야. 나머지는 이걸로 보려고."

 "그래서 저도 구매해 놨어요."

 "같이 봐도 돼? 아직 안 봤으면."

 그날은 앞서 두 편의 영화를 본 뒤였다. 애초에 심취하지 않으면 즐길 수 없는 영화랄까 내용이 길고 역동적인 장면이 없어서 애들이 견디질 못했다. 웬만한 영화는 다 좋아하는 유지마저 졸고 있을 때 그나마 몰두해서 본 사람이 메구미와 나였다.

 "언제 볼까요."

 나는 기꺼이 반기며 메구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언제든 상관없잖냐. 말 나온 김에 지금 보자."

 "교실에서는 안 돼요. 이따 제 방으로 오세요."

 "그러다 마사미치나 다른 놈들이 오해하면⋯⋯."

 "지난번 스즈카 씨 말을 듣고 저도 속상했어요. 왜 나는 고죠 쌤처럼 말할 수 없을까 하고. 어차피 의심을 산 이상 감시를 피할 수는 없고, 의심하게 두는 편이 나아요. 누가 추궁하면 저 때문이라고 하세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두 사람이 10년 간 쌓아 온 것만으로도 서로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아는 메구미가 그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에 이따금 종잡을 수 없을 때가 있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놀란 내 손이 절로 입을 향했다. 나는 체면 따위 상관없이 활짝 웃었다. 그것으로 괜찮은지 어떤지를 떠나서 듣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말이었다.

 "오히려 당당히 드러내서 단순한 애정 문제로 보이려는 거구나."

 "맞아요. 아마 질색하면서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는 반응일걸요."

 가슴에 얹혔던 것이 내려갔다. 그제야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어떤 감정이든지. 지금은 기뻐서 메구미를 와락 끌어안고 싶은 기분이다. 하지만 그 전에 나는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신에게는 멈춰야만 하는 이유가 있음을. 메구미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다시 앞으로 돌아앉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메구야."

 메구미에게조차 감추는 것 하나 없이 다 내보이자니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가끔이라도 단호하게 거절해 줄 순 없냐. 너에게 스스럼 없이 다가가는 나를."

 "거절해 달라 말할 것 같으면 부탁하지 마요. 스즈카 씨가 거절하면 돼요. 저를."

 "너⋯⋯."

 "그렇잖아요, 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예요? 어디 잔소리해 봐요. 내가 듣나. 흥."

 "너어, 그냥 하라는 대로 해! 혼날래! 어려운 거 아니잖아! 그냥 싫다고 말하면 돼!"

 "알았어요, 알았어. 해 볼게요, 거절. 대신 삐치기 없기입니다. 자기가 말해 놓고서."

 메구미가 두 팔로 나를 끌어안고 내 뺨에 다정하게 입맞췄다. 어깨에 실린 무게감은 나를 사뭇 긴장시켰지만 언제나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넓고 따뜻했던 그의 품은 나를 단단히 지지하고 잠시나마 눈을 감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같은 날 밤.

 "미안해요, 스즈카. 이번에는 제가 거절할게요. 저는 가고 싶지 않아요. 안 가요."

 "꼬맹아. 아니, ."

 "여러분! 저 소신 발언 하겠습니다! 이건 아니라고 봅니다! 이상입니다!"

 "부탁이다. 나 좀 보내 줘."

 기숙사로 돌아와 교복을 갈아입는 동안 귀찮게 굴더니 이제는 대놓고 나를 방해하고 있다. 그녀는 요즘 걱정이 많다. 메구미와 내가 가까워질수록 조마조마해 보인다. 그것을 누군가를 향한 배신으로 여기는 것 같다.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가지 마요! 제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예요! 스즈카 바보!"

 "이미 약속한 걸 어쩌라고. 나를 변덕쟁이 영감탱이로 만들어야만 속이 시원하겠냐."

 "그래요! 후시구로 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맘이 어떻겠어요! 쌤한테도 이건 아니죠!"

 "목소리 낮추어라. 이번만큼은 나도 자신의 사생활 보호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구나."

 이거야 원. 속으로 탄식했다. 유지에 비하면 한참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방심시키려고 일부러 얌전히 굴었던 건지 그새 나를 통제하는 데 제법 능숙해졌다. 내 허락 없이 나오지도 못하던 녀석이 불쑥불쑥 잘도 튀어나온다.

 "제가요, 고죠 쌤한테 다 일러바칠 거예요. 필요하면 다른 애들한테도 말할 거예요."

 "이제 너까지 나를 협박하냐. 네가 무슨 짓을 한대도 나는 메구미를 기만할 수 없다."

 "그럼 쌤은요. 쌤은 어떡⋯⋯ 나오지 맛! 들어갓! 떼찌! 떼찌! 후회할 거예요! 꺄아아!"

 별로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그릇이 힘으로 나를 억누르려고 하면 마찬가지로 내 힘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스쿠나와 유지는 몰라도 나는 이 짓거리만 수백 년을 했는데 꼬맹이에게 휘둘려서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거다.

 "인간 따위가 저항해 봤자다⋯⋯ 으하핫! 그렇지, 나가기 전에 거울 한번 더 봐야겠다."

 두 남자의 관계를 생각하면 나도 착잡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메구미를 보러 갈 수조차 없다니 황당하다. 고죠와는 최근 데이트를 한 번 하긴 했지만 옛날에 끝난 사이고 애초에 놈은 누구의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져버린단 말인가.

 방에서 나가기 전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다른 것과 착각하지 않도록 몰래 안쪽에 넣어 둔 것이 있다. 차가운 캔을 종이 가방에 두 개 담아 외투 안에 쏙 집어넣고 꼭꼭 감춘 다음 메구미에게로 향했다.

 "스즈카 쌤."

 꼬맹이치고 굵은 목소리와 건조한 말투. 누군지 뻔한데도 언제나 주먹밥 재료로만 떠들다가 뭐라도 멀쩡한 대사를 내뱉으면 쓸데없는 위화감 때문에 다른 사람인가 하게 된다. 남자 기숙사 앞에서 막 들어가려고 할 때 나를 불렀다.

 "토게야.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것이냐. 일찍 다녀야지."

 "가다랑어포. 연어알."

 "나야말로 어쩐 일이냐고? 나는 메구미 보러 왔다. 훗."

 "사토루⋯⋯ 다시마."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다 오늘은 손이 부족하니 조심히 다녀오라는 말만 건넸다. 돌아서는데 어쩐지 익숙한 이름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기분 탓이려니 했다. 쌤도 일찍 다니라고 투덜거리면서 한편으로는 걱정하고 있는 것이겠지.

 메구미가 문을 완전히 닫아 놓지 않아서 노크할 필요 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기숙사는 ㅁ 자 구조로 모퉁이는 없지만 싱크대가 현관문 옆에 있는데 마침 그 자리에서 돌아서는 메구미와 부딪혀 본의 아니게 오자마자 안겨 버렸다.

 "오셨어요."

 "와 버렸다."

 "옷 안에 뭔가 감추고 있네요. 뭐예요. 봐 봐요."

 "이거 말이냐. 내가 가끔 몰래 마시는 건데. 짠!"

 "뭐⋯⋯ 술이잖아요 그거. 어쩌려고 가져 왔어요."

 "쉿! 오늘만이야. 너랑 나만의 비밀이다? 알겠지?"

 이 스즈카 고젠 님은 웬만한 사내 놈들에게도 지지 않는 주당이다. 오늘 가져온 술은 도수가 3%밖에 안 되는 거라 내게는 술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릇의 몸을 생각해서 나름 자제하며 가끔 혼자 마시고 있다. 최근 했던 대작은 작년에 메이랑 한 번, 고죠랑 한 번, 그리고 올해 나나미랑 저녁을 먹을 때 그의 술을 뺏어 마셨던 것이 전부다.

 "스즈카 씨도 참. 그런 부분은 애 같아요."

 "그래, 애다. 오빠라고 불러 주랴. 오. 빠."

 "네, 네. 귀엽네요. 너무 유혹하지 마세요."

 얌전히 있으라는 뜻인 것 같지만 오늘처럼 기분 좋은 날도 드물다. 창가에 닿을 때까지 빙글빙글 춤을 췄다. 하늘을 보니 점차 밤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유지도 방에 있겠지. 밤이 되면 대화가 들릴 것 같아서 문을 슬쩍 닫았다.

 "엉덩이가 배기는구만. 메구미, 방석 없냐."

 "없어요. 애초에 바닥에 앉을 필요도 없죠."

 "그럼 어디⋯⋯ 설마, 침대에 앉아서 보잔 거냐."

 "영화가 기니까 무조건 편해야 돼요. 이리 와요."

 메구미가 먼저 침대에 오르는 것을 보고 그의 말에 따랐다. 두 사람의 무릎 위에 베개를 그 위에는 태블릿을 올려 놓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 앞부분 내용은 이미 알고 있지만 처음부터 다시 진지하게 감상하기로 했다.

 "둘이서 보기에는 태블릿도 작구나."

 "지금보다 가까워지는 건 무리예요."

 "무리일 것도 없다. 그냥 아까처럼⋯⋯."

 "네, 무슨 말인지 알아요. 하지만 안 돼요."

 안 되겠지. 긴장감이 너무 없어도. 그냥 잠깐 교실에서 안겼을 때 느낌을 떠올리며 상상해 봤다. 사실, 나란히 앉은 지금도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깝다. 그런데 사내 놈 주제 좀처럼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생각보다 쉽지 않구만.

 "제 어깨에 기대셔도 됩니다."

 "그것도 좋지."

 밤이 꽤 깊었지만 영화의 결말까지는 아직 멀었다. 갈수록 몸이 나른해져 앉았다기 보다는 누운 듯한 모습이 됐다. 비단 영화가 길어서만은 아니다. 은근히 술기운이 도는 것 같다. 내가 주당이라도 그릇인 술에 면역이 전혀 없기 때문에 예상했던 일이다. 그리고 메구미도 마찬가지일 터인데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아서 영 재미가 없다.

 "메구미 너, 그거 마시고도 아무렇지 않네?"

 "그런 것 같아요. 뭐, 감주 같은 거니까. 왜요?"

 "오늘은 네 애교를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거든."

 "푸핫! 무슨 애교요? 으으, 싫다. 기대하지 마요."

 졸음이 밀려 왔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자면 안 되는데 쉬이 떨쳐내기에는 너무 안락한 자리였다. 메구미가 어렸을 때 이렇게 잤던 적도 있다. 뭔지 몰라도 파우더 같은 냄새가 났다. 그래서인지 조금 그리운 기분도 들었다.

 "스즈카 씨, 아직 같은 향수 쓰시는구나. 오랜만이네요. 그때도 말했지만 저한테는 좀 강해요. 나를 시험하는 건 나중에 해도 되잖아요. 일단 당신의 시험부터 마치세요. 징그러운 애교라도 상관없다면야 까짓거 보여 드릴게요."

 메구미와 내 체취가 한데 뒤섞였다. 냄새는 그때와 같지만 그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더는 작지 않은 몸. 듬직함에 마음이 놓였다. 서서히 잠에 빠져들면서도 차분한 목소리는 귓가를 맴돌며 가슴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골의 작은 온천마을에서 눈을 뜨던 내게 고전의 아침은 자신이 도시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할 만큼 익숙한 느낌이었다. 차가운 이슬을 머금은 맑은 공기와 새들의 지저귐으로 일어날 시간임을 알 수 있었다.

 아침부터 휴대전화기 진동이 울렸다.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다. 침대를 더듬거려 손에 익은 물건을 집어든 뒤 '고죠'라는 이름만 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까지 같은 새의 울음소리. 숨소리도 어렴풋이 들렸다.

 내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말이 없냐⋯⋯ 고죠야⋯⋯."

 그제서야 그의 대답이 돌아왔다.

 「미안. 좋은⋯⋯ 아침이네. 스즈카.」

 비몽사몽해도 고죠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이유를 묻기 전에 잠부터 깨는 것이 먼저였다. 깜빡깜빡.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썼다. 시야의 흐릿했던 부분들이 점차 선명해졌다. 이제는 꽤 제대로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좀 전에 무언가 어깨를 쿡쿡 찌르는 걸 느꼈는데, 나는 그게 뭔지 생각도 하지 않고 손으로 치워 버렸다.

 "좋은 아침은 얼어죽을. 지각 안 하면 될 거 아냐⋯⋯ 우이씨⋯⋯."

 「그래. 교실에서 봐. 근데 끊기 전에 물어볼 게 있어. 왜 네가 받아.」

 "응?"

 「왜 네가 받냐고. 지금 내 전화기에는 메구미라고 나오는데? 너는?」

 그리고 내 어깨를 또 찌르고 있다. 뭐야 이건. 조금씩 쌔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보지 않으니 결국에는 나를 돌아눕혔다. 메구미. 그가 전화기와 자신을 번갈아 가리켰다. 애타는 눈빛으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그거 제 거예요'라고. 파란색 케이스는 분명 메구미 것이었고, 전화기 화면에 비치고 있는 통화 상대의 이름은 '고죠 선생님'이었다. 예전에 고죠가 종종 깨워 준답시고 아침에 갑자기 전화하곤 했던 기억이 떠오르며 비로소 나는 완전히 눈을 떴다.

 "꺄아아아아!"

 벌떡 일어남과 동시에 무언가 내 손을 떠나 휙 날아갔다. 우당탕 하며 떨어진 그 물건은 물론 메구미의 전화기였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방이 아니었다. 밤새도록 나를 따뜻하게 감싸 주고 잠들도록 해 주었던 것은 다름아닌 메구미의 품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메구미와 밤을 지샜고, 그와 잤고, 어쩌면⋯⋯ 아니,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렇다고 비명을 지르면 어떡합니까. 여기가 어딘지 잊었습니까."

 "기, 기억난다. 남자 기숙사잖아. 메구미, 왜 나를 깨우지 않은 거냐."

 "그게⋯⋯ 깨울 생각이었는데, 잠깐 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 그, 그렇다 쳐! 내 말은, 너는 왜 거기서 태연하게 잠을 자냔 말이야!"

 "제가 언제 잠들었는지는 기억 안 납니다. 그보다 목소리 좀⋯⋯ 으⋯⋯."

 "너, 너, 너어 혹시 나한테 무슨⋯⋯ 무슨⋯⋯ 아아악! 미쳤어! 미쳤어!"

 "진정해요. 아무 짓도 안 했으니까. 으윽⋯⋯ 머리가 왜 이렇게 아프지?"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마음을 다잡은 뒤 메구미의 안색을 살폈다. 그에게도 여러 가지로 괴로운 아침 같았다. 그때 날아간 전화기가 생각났다. 다급히 침내에서 내려가 확인했다. 일단 그 자리에서 해명할 기회는 잃었다.

 "끊어졌어. 어떡해⋯⋯."

 "뭘 어떡해요. 등교해야죠."

 의연히 털고 일어나는 메구미를 봤을 때 나는 눈을 감고 이마를 쳤다. 고등학생은 학교에 간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놀라 자빠졌어도 수업을 듣는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아이러니가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그러한 까닭에 어떻게든 등교 준비를 하기 위해 나는 지체 없이 내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반쯤 넋이 나간 내 상태를 보고 안심할 수 없었는지 메구미가 현관까지 나를 배웅하면서 문을 열어 줬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미쳤⋯⋯."

 "그렇게 허둥대지 마시고⋯⋯ 어어!"

 복도로 나오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졌다. 메구미가 감싸 줬기에 다치지 않았지만 둘 다 바닥에 무릎을 찧었다. 그런데 벌써부터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메구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유지가 벽에 기대어 선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이타도리."

 "후시구로. 그리고 스즈카 쌤."

 "일단 묻겠는데. 거기서 뭐 하냐."

 "나 말이지⋯⋯ 뭐, 일단 대답할게."

 유지는 메구미와 내게 일어날 틈을 주지 않았다.

 "실은 말이야. 어제 세 명이서 밤 새워 게임했거든. 나, 이누마키 선배, 고죠 쌤. 즉흥적으로 결정된 거라 미안. 새벽에서야 해산했어. 나 혼자 남아서 자려고 누웠을 때 비명이 들렸어. 도와줘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서 뛰쳐나왔는데. 저기, 너무 티나잖아. 나도 알고, 선배도 알고, 쌤도 알아. 하나만 묻자. 두 분, 한테 허락 받으셨나요."

 메구미와 나는 말없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메구미가 심난한 얼굴로 탄식을 삼켰다. 우리는 다시 유지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하. 맞아야겠네."

 훈련을 통한 경험으로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유지의 터무니없이 센 주먹이 메구미에게 날아드는 광경을 보는 순간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 뭐 하는 짓이야! 왜 이래! 이 놈아!"

 유지가 주먹을 날리기 전에 해명할 기회는 없었다 해도 최소한 메구미가 원하면 피할 수 있는 틈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야말로 얼굴에 제대로 들어가서 바닥 위로 피가 흩뿌려졌다. 메구미의 입술이 새빨간 선혈로 물들어 버렸다.

 "메구미! 어떡해! 이 잘생긴 얼굴에! 어떡해!"

 "저는 괜찮습니다. 사람들 몰려와요. 제발, 쉿."

 이른 아침이고 무엇보다 기숙사 안이라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건지 피하려고도 하지 않고 화를 내지도 않으니 오히려 맞지도 않은 내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심지어 메구미는 당황하는 기색조차 없이 나를 진정시켰다.

 "얼른 가서 씻고 준비하세요. 지각하면 안 돼요."

 "흑⋯⋯ 알았어⋯⋯."

 자신에게도 그것보다는 할말이 더 많았겠지만 나도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늦기 전 교실로 들어가서, 좋든 싫든 내 자리에 있어야 했다. 모두가 마찬가지다. 유지, 메구미, 그리고 선생님까지.

 "하아⋯⋯ 이따 봬요. 너무 기대되네요 오늘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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