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마사미치에게 불려갔다. 메구미의 임무에 끼어들었던 걸 들켜서였다. 학칙과 무관한 일이라 패널티를 받진 않았지만 어쨌든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10년 전쯤에는 마사미치를 볼 때도 지금 고죠처럼 꼬맹이가 꼬맹이를 가르치는 것 같았는데. 그 시절 이따금씩 녀석을 격려해 주었던 내가, 이제는 툭 하면 녀석에게 혼이 나는 신세다.

 나이가 들어서 잔소리만 늘었구만. 그렇게 생각하면 혼나면서도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기가 어려웠다. 다만 오늘은 차마 웃지 못할 이유가 있었달까, 들킨 건 둘째치고 어쩌면 마사미치가 메구미와 내 관계를 의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둘러대고 있는데도 집요하게 추궁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신경 쓰이고 기분이 영 찜찜했다.

 고민 끝에 나는 당분간 메구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기로 결정했다. 나 때문에 감시라도 받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될 테니까.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오랜만에 교대하고 밖으로 나왔다.

 한동안 뺨에 나오는 것도 자제하고 얌전히 있었다. 메구미가 있을 때는 답답해도 참는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그를 피해다니면서 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지도 않았으니 벌써 며칠째 메구미와는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한 셈이다.

 그 이후로 대부분의 시간을 멍하니 보냈다. 애초에 여기서 내게 기꺼이 시간을 할애하는 인간은 메구미뿐이다. 훈련보다 사적인 이유로 내게 말을 걸고, 놀러다니고, 달리 얻을 것이 없어도 찾아 주는 것은 메구미가 거의 유일하다.

 슬슬 한계다. 메구미는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을까. 그냥 자습하면서 도움을 받는 것뿐이라면 같이 있어도 되지 않나. 홀로 교정을 방황하다 정신차려 보니 고죠의 방 근처였다. 달리 갈 곳도 없어서 잠깐 시간을 떼우다 가기로 했다.

 "이리 오너라. 고죠 이 놈, 일 잘 하고 있느냐!"

 "하하하. 어르신께서 갑자기 나를 왜 찾으시나."

 고죠는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프레젠테이션인지 뭔지 하는 그거였다. 가끔 빔 프로젝터라는 기계로 그림이 있는 자료를 보여 주는데 직접 만들기도 하는 모양이다. 시험 문제 답이라면 모를까 수업 자료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심심하다면 내가 재밌는 얘기 해 주려고 하는데."

 "주책바가지 할망구, 또 야한 얘기 하려고 그러지."

 고죠는 내가 들어와도 아랑곳 않고 계속 일만 했다. 바쁜가 보다 하고 그냥 나갈까 했더니 마침 뻐근한 듯이 허리를 펴고 등받이에 기대기에 능청스럽게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대충 주무르는 척하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너도 좋아하면서 뭘. 흐흐흐."

 "내가 참고 들어 준다. 해 봐."

 운 좋은 줄 알아. 이런 얘기는 돈 주고도 못 들으니까. 어디 가서 천년 전의 음담패설을 들어 볼 수 있을 것 같냐. 썰렁하고 기분 더럽다고 질색하면서도 끝까지 듣는다. 응큼한 녀석들. 가끔 내 얘기를 듣고 웃을 때도 있다.

 "푸핫⋯⋯."

 "재밌지, 재밌지."

 "어우, 진짜. 그래."

 인간들이 나한테서 듣고 싶어 할 만한 얘기라고 하면 역시 천년 설화겠지만 내가 뭘 위해 놈들에게 좋은 일을 하겠는가. 나로서는 차라리 음담패설을 하는 게 낫다. 꼬맹이들은 반응이 재밌어서 들려 주기도 한다. , 유지, 노바라도 들었는데 메구미만 아직이다. 일부러 분위기를 띄우지 않아도 즐거웠으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메구미를 생각하고 있을 때 놀랍게도 그가 제 스승을 찾아왔다. 오랜만에 얼굴을 봐서 가슴이 뭉클했다.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몇 년은 보지 못한 것 같아서 다른 것은 다 잊었다.

 "실례했습니다. 그냥 다음에 다시 올게요."

 "아니야, 메구미. 보고서 이리 줘. 어디 보자."

 나도 모르게 앞으로 튀어나가 메구미를 잡으려 했다. 그 전에 고죠가 메구미를 불러 세우고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메구미는 책상 앞에 서서 가져온 보고서를 고죠에게 건넸다. 어떤 임무를 받았던 건지 궁금해서 슬쩍 보려다 고죠에게서 스읍 하는 소리를 듣고 멈칫했다. 그래도 조금 딴청부리는 척하면서 계속 요리조리 훔쳐봤다.

 "이제 가도 되죠."

 고죠가 대답하지 않자 메구미의 안색이 나빠졌다. 여기까지 온김에 조금 여유롭게 머물렀다 가도 좋을 텐데 오늘따라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야 고죠랑 내가 노닥거리는 꼴을 봤으니 당혹스럽고 민망했겠지만.

 "응, 수고했어. 스즈카, 너도 메구미랑 같이 가 봐."

 "아, 알았다. 메구미 너도 자습할 거냐. 같이 하자."

 볼일이 끝났다면 더 기다릴 것도 없으니 나도 나가야지. 누가 뭐래도 오늘 저녁은 메구미랑 있을 거다. 나는 책상을 빙 돌아 메구미에게 갔다. 같은 순간 메구미가 돌아서서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그리고 눈이 딱 마주쳤다.

 "⋯⋯."

 방에서 나가는 메구미를 멍하니 바라보다 급하게 따라나섰다. 지금 눈치 없이 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그가 내 이마에 출력 200%의 메구를 붙여 놓는다 해도 일단 나왔다. 어쨌든 계속 거기 있을 수는 없으니까.

 고죠 앞에서는 자습한다고 했지만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해야 된다면 일단 공부부터 하고 생각해야겠지. 뭘 해도 좋으니 찰싹 붙어 있고 싶었다. 메구미의 발이 너무 빨라서 뒤쳐져도 끈질기게 따라가 팔을 잡았다.

 "어디로 가냐."

 "제 방으로 갑니다."

 "나도 갈래. 어어⋯⋯!"

 메구미에게 끌려가다시피하던 나는 그가 걸음을 멈추는 순간 그대로 휘청했다.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다. 휴 안도의 숨을 내쉬고 메구미의 얼굴을 보았다. 딱딱하지도 차갑지도 않은데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는 게 오히려 섬뜩했다. 예전에, 어렸을 때는, 거의 항상 이런 표정이었다. 내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듯한. 한동안 잊고 있었다.

 나를 탓한다 해도 상관없다. 어찌 하면 좋을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메구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제야 그가 인상을 확 구기며 감정을 드러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의 찌푸린 얼굴에 안심하고 반대로 웃을 수 있었다.

 "화났니."

 "그럴 리가요."

 "농담 아니다. 왜 화가 났는지 말해 봐라."

 "말하면 어쩔 건데요? 풀어 줄 수 있어요?"

 메구미가 이런 말투도 썼던가. 한참 반항할 때였다면 모를까 좀처럼 그답게 느껴지지 않는다. 무슨 말을 못하겠다. 갑자기 손이 다가와 한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메구미가 손을 거두고 평소와 같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밀 얘기라도 하고 계셨나 봅니다."

 "흐흐흐. 너는 몰라도 돼. 아직은 일러."

 더 들을 필요 없다는 듯 메구미가 나를 지나쳐갔다. 포기하지 않고 쪼르르 쫓아가서는 가까운 벤치로 끌고 와 앉혔다. 이번에는 생각보다 저항이 크지 않았다. 저 때문에 발라당 넘어질 뻔한 나를 보고 일순간 화가 누그러졌나 보다.

 "알았어, 알았어. 얘기하면 되는 거지. 그럼 해 줄게. 좀 더 가까이 와 봐."

 메구미는 썩 내키지 않아 보였지만 들어 줄 용의가 있는지 기꺼이 귀를 대 주었다. 나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간지럽히듯 속닥속닥 얘기했다. 아까 내용을 그대로, 아니, 오히려 과장해서 더 야하게 바꿨다. 뜨거운 숨결에 신음까지 더해서.

 메구미로서는 속는 기분이 들지 몰라도 실제로 술수 따위는 부리지 않았으니 별 수 없을 거다. 물론 내가 좀 과격한 방법을 쓰긴 했다. 무엇이든 빨리 잊어버리게 하고 싶어서. 그리고 부끄러워하는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하하. 이럴까 봐 말린 거야. 볼이 빨개져서는. 누가 보면 어떡할래?"

 "뭘 어떡해요. 스즈카 씨가 제 귀에 대고 야한 얘기 했다고 말할 거예요!"

 메구미가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결국 나만 두고 가 버렸다. 방금 전에는 내가 심했으니 곧바로 쫓지 않고 여유부리다 천천히 일어났다. 어쨌든 말리긴 해야 한다. 정말로 저렇게 말했다간 위험한 오해를 받을지도 모르니까. 앞으로 계속 주변의 시선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걸까. 그래야 한다면 자신의 쓸쓸함은 무슨 말로 달래야 좋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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