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는 제가 원하는 만큼 잘 수만 있다면 행복합니다. 평범한 고등학생이라서요."
"고등학생이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한계를 정해 두지 마! 지금부터 몸 만들고! 여자친구도 사귀고!" "안 그래도 얼마 전에 혼났습니다. 쿠기사키가 심심했는지, 대뜸 앞으로의 계획이 뭐냐고 묻더군요." "그거다! 아쉽게도 좋은 기회를 놓쳤구나. 거기서 마음을 확 사로잡아야지 뭐라고 했길래 혼난 게야." "그냥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요." "완전히 계획도 비전도 없는 남자로 찍혀 버렸구만. 그딴 구닥다리 근성이 요즘 여자들한테 먹히겠냐." "어쩔 수 없잖아요. 지금 성적을 유지하는 것도⋯⋯." "성적도 중요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야. 야망을 가져!" 메구미가 고개를 모로 돌렸다. 그대로 생각하기를 잠시, 그가 다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사실, 저도 있어요. 야망." "핫,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그래서?" "이건 사람에 대한 것이고 마음에 대한 것입니다. 거기에 복잡한 이해 관계로 얽혀 있구요." "사람, 마음, 이해 관계라. 어려운 고민을 하는구나." "그렇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도 혼자서는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랍니다." 혼자서는 어찌 할 수 없는 일? 턱을 만지작거리며 나름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 그런 다음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고 메구미를 가리켜 자신있게 외쳤다. "오호라, 사랑이구나! 그냥 욕망하는 여자가 있다고 하면 되는 걸 무얼 그리 빙 돌려 말하냐." "대놓고 드러내는 게 아니죠, 욕망은." 메구미는 근처 벤치에 앉았다. 나도 뒤따랐다. "연상이냐? 대학생? 직장인? 설마 유부⋯⋯." "어떻게 생각하셔도 좋으니까, 비웃지 마세요." 내가 벤치를 다리 사이에 두고 돌아앉으니 메구미도 내 시선을 의식하고 나와 마주봤다. 의아한 표정이었다. 나는 뜸들이지 않고 다만 조심스레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곤란한 상황을 피하려 했지만 놔 주지 않았다. "메구미 네가 그 여자를 안고 싶다 여기게 되면 알 게야.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은 그밖에도 많아. 나를 그녀라고 생각해 봐라. 마음의 준비가 됐든 안 됐든 늦든 빠르든 상관없어. 네가 원하면 어차피 벌어질 일들이야." "그래서요? 말씀드렸죠.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지 않아요. 안고 싶다는 생각쯤은 지금도 합니다. 누구나 하는 일에 쓸데없이 무거운 의미를 두고 생각하게 만들지 마요. 당신들도 기분 좋으면 아무래도 좋잖아요." 메구미는 아직 어리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놈들에 비하면 예측하기 어렵다. 이런 치사한 방법으로 겁주려는 생각부터가 너무 안일했다. 나는 메구미의 손을 놓았다. 나름대로는 부딪혀 보겠다고 저지른 일이었으나 일단 물러나야 했다. 살풍경이다. 그 정도로 차마 못할 짓이다. 지금은 나도 꼬맹이에게 너그러운 마음이지만 나중에는 혼자 앓다 내팽개칠 것이 분명하다. 몸만 젊은 채로 고리삭아도 틀림없이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꼬맹이의 청춘을 범하느니. 메구미와 재회했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더라. 그새 많이 자랐다. 점잖은 말투에 쓸데없는 격식이 없어 좋다. 얌전한데도 어쩐지 다루기 힘들다. 이상하게 벅찬 기분이다. 나를 바라보는 눈이 전과 다르다. 나를 빗겨가지 않는다. 메구미가 나를 끌어당겨 갑자기 입맞추었다. 그래도 된다는 약속은 없었을 뿐더러 꼬맹이에게는 눈빛으로도 허락한 적이 없다. 나는 지난 10년 간 오직 한 남자의 손길만 받아들였다. 숫처녀 계집애의 몸은 말할 필요가 없다. 순억지다. 멈추어야 한다. 그런 생각과 동시에 오한이 서렸다. 떨어져야 하는데 무작정 내뺀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밀어내도 잡아뜯어도 안 되고 엄살부리며 애원을 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청승궂게 애달픈 소리만 나왔다. 한때는 메구미의 몸은 물론 마음에 손톱 만한 흉터 하나라도 남길까 하는 걱정으로 애를 태웠던 적도 있다. 어리니까. 귀여우니까. 아무리 잔인한 어른이라도 상처 주고 싶지 않다. 아껴 주고 싶다. 그런 생각이 차츰차츰 무너졌다. 이제 꼬맹이를 걱정하고 싶어도 내가 그럴 형편이 못된다. 몸도 마음도 마지막 저항으로 진이 다 빠졌다. 내치지도 받아주지도 못해 체념을 하고 나서야 마침내 나는 모지락스러운 손에서 벗어나 참았던 숨을 한껍에 들이쉬었다. "안 때립니까." 그 한마디에 울컥하고 손을 쳐들었으나 무거워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도 딱히 잘한 것은 없다. 그러니까 나는 메구미가 밉지 않았다. 오히려 미안했다. 그런데도 단지 내게 말도 없이 키스했다는 게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때려 주세요." 제 뺨을 손으로 가리키며 으스대는 꼴을 보니 귀여운 메구미는 온데간데 없고 웬 날건달 같은 놈이 내게 치근덕거리며 은근히 나를 비웃는 듯했다. 그동안 짝사랑으로만 간직해 왔던 과거의 한 사내를 나도 모르게 원망하고 있었던지 붕어빵처럼 똑 닮은 것이 새삼 그리 아니꼬울 수가 없었다. 뒷감당은 생각하지도 않고 열이 확 올라 힘껏 내리쳤다. 분명히 예사롭지 않은 소리가 들렸음에도 눈앞의 남자는 아랑곳 않고 오히려 재미있다고 웃었다. "뭐가 그리 우스우냐?" 분해서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렇지 않게 곁을 허락하고 심지어는 스스로 메구미의 품에 안겼던 내가 도리어 억울해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속은 기분이었다. 메구미는 피곤한 기색도 없이 나를 놀리는 데 푹 빠져 내 손을 잡아끌었다. 가히 으스댈 만한 하반신의 적나라한 느낌을 도저히 모른다 잡아뗄 수 없었던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뭘 그리 놀라세요?" 그냥 놀란 정도가 아니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바로 손을 거두었지만 민망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잖아도 뜨뜻한 얼굴에 열이 번졌다. 그제서야 나는 다시 앞으로 돌아앉았다. 메구미가 애써 먼눈을 팔며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놀래켜 드려서 죄송해요. 화내지 마시고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저를 남자로 보고 계신가요." "그래⋯⋯ 하지만⋯⋯." "알아요. 하나만 더요. 방금 한 대답이랑 상관없는 거예요. 저희 선생님을 다시 사랑하게 됐나요." "아⋯⋯ 그런 것 같아⋯⋯." 고개를 떨어뜨리며 애탄하면서도 속으로 이게 맞나 싶어 고개를 저었다. 다시라는 말도 틀렸고 사랑은 더욱 그릇된 말이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나는 그저 도망다니기 바빴을 뿐이다. 딱히 두렵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죽겠거니 체념한 채 무덤덤하게 살아 왔다. 그런 놈을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이 언제부터 그리 대단한 것이었단 말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걸 먼저 했어야 됐는데. 아무도 없음을 재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게 다 뭐냐.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다. 아, 정말. 미쳤어. 연애하자. 누구라도 좋으니까 일단 만나고 보자. 그게 낫다. 분명 나을 거다. "야망을 가지세요." "무슨⋯⋯." "말 그대로예요. 뭐, 원한다고 다 가질 수는 없겠죠. 저는 다른 거라면 몰라도 바람은 절대로 용서 못합니다. 스즈카 씨가 사랑하는 남자에 대해서는 더 잘 아실 테고요. 그러니까 제 말은 당신도 죽을 각오를 하시라는 뜻입니다." 연애를 위해 죽을 각오까지 해야 한다면 수지가 맞는 일인지 모르겠다. 비록 그렇지만 메구미가 아무리 살벌하게 주의를 주어도 나는 끄떡없었다. 죽을 각오라면 진작 되어 있었고 인제 협박도 우스갯말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하늘을 보니 말간 못에 벽운이 흐른다. 빗방울 하나 내리지 않건만 나의 속사정은 벌써 개흙이나 다름없다. 적당히 일하고 게으름피우면서 이 놈 저 놈에게 겹귀염이나 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삶을 산다면 참으로 좋겠다. 늘 지나친 욕심이 문제다. 야망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되묻길 멈추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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